2025 터너상 후보 발표, 주목해야 할 작가는?
신체, 기억, 공동체를 꿰는 네 작가의 시선
2025년 영국 현대미술계 최고 권위의 터너상 후보가 발표됐다. 네나 칼루, 르네 마티치, 모하메드 사미, 제이디 차 등 신체성, 정체성, 망명, 디아스포라를 탐구하는 4인의 작가가 이름을 올렸다. 이들의 작업 세계 면면을 살펴본다.

1984년 설립된 터너상(Turner Prize)은 영국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상 중 하나로, 19세기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J.M.W. Turner)의 이름을 따 제정됐다.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에서 주관하는 이 상은 매년 영국 출생 또는 영국에서 활동하는 작가 중 지난 1년간 주목할 만한 전시 및 기여를 한 인물을 선정해 수여한다.

터너상은 설립 초기부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을 조명하며 논쟁의 중심에 서 왔다.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안토니 곰리(Antony Gormley) 등 영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들이 후보에 올라왔으며, 수상 이후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을 확장한 이들도 많다.
올해 발표된 후보는 네나 칼루(Nnena Kalu), 르네 마티치(Rene Matić), 모하메드 사미(Mohamed Sami), 제이디 차(Zadie Xa)로,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 정체성, 공동체, 신체성, 디아스포라와 같은 주제를 탐색하며 현대미술의 새로운 실천을 제시하고 있다.
네나 칼루
네나 칼루는 반복되는 신체 동작과 축적된 재료의 층위를 통해 감각적 조각 언어를 구축해온 작가다. 리버풀 워커 아트 갤러리에서의 <Conversations>, 마니페스타 15 바르셀로나에서의 <Hanging Sculpture 1 to 10>을 통해 후보에 오른 그는 종이, 셀로판, 천, 테이프, VHS 테이프 등 쉽게 폐기되는 물질을 반복적으로 감고 묶으며 ‘고치’ 형태의 설치물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조각은 물리적인 부피와 무게감뿐 아니라, 반복적 행위를 통해 ‘시간’ 그 자체를 물질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칼루의 드로잉 역시 반복적인 원형 선을 통해 몸의 움직임을 기록하며, 건축적 공간 속에 신체적 리듬을 불어넣는다. 심사위원단은 그의 작업이 지닌 “강렬한 공간 반응성과 조각적 리듬”을 높이 평가했다.

칼루는 지적 장애가 있는 예술가들을 위한 런던의 액션스페이스(ActionSpace)에서 1999년부터 작업을 이어왔고, 퍼실리테이터 샬럿 홀린스헤드와의 오랜 협업 속에서 창작의 자율성과 실험성을 유지해왔다.
르네 마티치
베를린 CCA에서 열린 개인전 <AS OPPOSED TO THE TRUTH>로 터너상 후보에 오른 르네 마티치는 사진, 사운드, 설치, 퍼포먼스, 글쓰기를 넘나드는 작업을 통해 정체성과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예술을 펼친다. 작가의 작업은 흔히 주변화된 공동체인 가족, 친구 등 친밀한 기억에서 출발하며, 정치적 언어로 전환된다.


마티치는 ‘무례함(rudeness)’이라는 개념을 통해, 백인이 아닌 퀴어 노동계급 문화의 에너지와 정체성을 예술적 언어로 풀어낸다. 작가는 종종 노던 소울, 스카, 투톤과 같은 댄스 및 음악 운동에서 출발점을 찾아, 이를 영국 서인도 제도와 백인 노동계급 문화 사이의 친밀함을 퀴어하고 재구상하는 장소로 활용한다. 작가에게 이러한 음악 운동은 단순한 사운드가 아니라, ‘역사적 몸’으로 작동하는 집단적 서사인 것이다.


작품은 테이트, 루이비통 재단, 영국 정부 미술 컬렉션 등에 소장되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심사위원단은 마티치에 대해 “친밀함의 감각을 통해 젠더, 인종, 계급을 관통하는 감각적 정치성을 보여준다”라고 평했다. 한편, 작가는 2000년 볼프강 틸만스가 수상한 이후 처음으로 지명된 사진작가이며, 그는 27세의 나이로 데미안 허스트에 이어 터너상 역대 두 번째로 어린 후보에 해당된다.
모하메드 사미
옥스퍼드셔 블레넘 궁전에서 열린 개인전 <After the Storm>은 모하메드 사미의 내면적 풍경을 대형 회화로 구현한 전시였다. 이라크 출신인 그는 전쟁과 망명, 기억과 상실을 주제로 텅 빈 실내, 가구, 배경을 그려낸다. 인물은 부재하지만,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화면에 스며들어 있다.


(오른쪽) Installation view Mohammed Sami, After the Storm, Blenheim Art Foundation, Blenheim Palace, Woodstock, 9 July–6 October, 2024. Photographer: Tom Lindboe
사미의 작업은 명확한 서사를 거부하고, 흐릿한 시점과 중첩된 색채로 감각적 불안을 호출한다. 그는 일상적인 재료를 활용해 화면 위에 모래, 스프레이 페인트 같은 질감을 얹으며, 감정적 잔상을 물성으로 번역한다. 그림의 프레이밍은 관람자의 시선을 일부러 어긋나게 하며, 불완전한 기억의 심상을 구성한다.

“그곳에 있음(thereness)”이라 부르는 감각은 작가의 회화를 지탱하는 핵심 개념이다. 한순간 어딘가로 소환되는 정서적 추억을 지칭한다. 심사위원단은 사미의 회화가 “무의식과 감각의 층위를 현대 회화의 언어로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제이디 차
제이디 차는 샤르자 비엔날레 16에서의 설치 작업 ‘Moonlit Confessions Across Deep Sea Echoes: Your Ancestors Are Whales’로 후보에 올랐다. 베니토 마요르 발레호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 작업은 바다, 조개껍데기, 고래, 황동 종(bells) 등 해양적 이미지와 한국 샤머니즘을 연결해 디아스포라 정체성과 영적 세계를 탐구한 것이다.


작업은 회화, 천, 조각, 사운드, 움직이는 조형물로 구성돼 있으며, 중심에는 650여 개의 황동 종으로 만든 샹들리에 형태의 구조물이 매달려 있다. 이는 ‘살풀이’ 같은 전통 무속의 안무를 연상시키며, 조상의 기억을 울리는 장치로 작동한다.
작가는 마고 할미와 삼신 할미 등 한국 설화와 여성 신화를 작품의 근간으로 삼으며, 샤머니즘적 사유를 통해 서구적 예술 관념에 균열을 낸다. 그리고 예술, 신화, 언어, 공동체 기억이 얽힌 하나의 통합된 형태를 취한다. 심사위원단은 이에 대해 “형식적·개념적 통합력이 뛰어나며, 다중 정체성과 영적 감각의 결합이 돋보인다”라고 평가했다.

터너상은 그 위상을 이어가는 동시에, 더 이상 예전처럼 동시대 전위예술의 최전선만을 대표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때로는 제도적 보수성 혹은 정치적 과잉 탓에 급진적인 작업이 오히려 배제된다는 지적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올해 후보들에게도 완전히 비켜간 문제는 아니다. 이들 역시 터너상이라는 제도적 틀 안에 포섭되며, 그 언어와 감각이 제도화되는 과정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명의 작가가 만들어낸 예술적 진정성은 유의미한 울림을 남긴다. 경계를 넘고, 기억을 말하고, 정체성을 재구성하며, 이 시대의 예술을 찾고 묻는 여정이다.
터너상의 미래가 어디로 나아갈지는 불확실하지만, 이 비판의 언저리에서 누가 수상의 영예를 안게 될지는 여전히 미술계의 뜨거운 화두다. 최종 후보자들의 전시는 올해 9월 27일부터 내년 2월 22일까지 브래드포드 문화도시(Bradford City of Culture)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브래드포드의 카트라이트 홀 아트 갤러리(Cartwright Hall Art Gallery)에서 개최된다. 수상자는 오는 12월 9일에 발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