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타이포잔치 2023

“따옴표를 자주 쓰지 말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엄연한 문장부호의 하나지만 따옴표는 종종 글을 울퉁불퉁하게 만드는 시각 공해 취급을 받곤 한다. 꼭 필요한 때에만 아껴 써야 눈길을 끌 수 있다는 따옴표. 그렇다면 ‘꼭 필요하지는 않은’ 모든 문자와 소리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 지난 9월 19일부터 10월 14일까지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올해 타이포잔치의 제목은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다. 테레사 학경 차의 〈딕테〉에서 인용한 구절로, 곧 들려올 소리를 암시하고 읽힌 문자의 흔적을 내포한다. ‘타이포그래피와 소리’를 주제로 한 올해의 비엔날레에서는 타이포그래피의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중앙 홀 전경. 스크린을 활용한 영상과 인터랙션 작업을 설치했다.
에릭 티머시 칼슨의 ‘ETC × 본 이베어: 10년간의 예술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팅’. 지난 10년간 본 이베어 밴드의 예술 감독으로 활동한 에릭 티머시 칼슨의 방대한 작업 결과물을 하나의 작품으로 전시했다.

‘타이포그래피와 소리’는 작년 9월에 열린 〈타이포잔치 사이사이 2022-2023〉(이하 〈사이사이〉)로부터 촉발된 주제다. 이번 타이포잔치의 트레일러와 같았던 〈사이사이〉에서는 3일간 이어진 워크숍과 공연을 통해 문자를 둘러싸고 있는 소리의 면면을 소개한 바 있다. 올해의 타이포잔치는 〈사이사이〉가 던진 소리에 대한 질문에 더욱 깊이 천착한 결과물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예술가들이 문자와 소리, 시각과 청각을 연결하며 다양한 실험과 실천을 촉발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지난 행사에 비해 참여 작가 수가 줄어든 대신, 작가들의 활동 분야의 폭이 넓어졌다. 디자이너 등 시각 예술가뿐만 아니라 시인과 안무가, 성우도 이번 전시에 함께한 것. 이번 행사에 참여한 작가가 53명에 달하지만, 전시는 이례적으로 세부 섹션 없이 구성했다. 전시 파트를 인위적으로 나누는 대신 전시장을 적극 활용한 점도 눈에 띄었다. 여러 조각처럼 파편화되어 있는 것이 문화역서울284 전시 공간의 특징. 이를 고려해 개별 공간마다 작품의 매력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설치를 고심했다. 전시를 기획한 박연주 예술 감독은 “섹션 구분이 없는 전시 구성은 이번 비엔날레의 핵심적인 주제와도 연결된다”라고 설명했다. 전시 구성에서부터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고정적이고 선형적인 이해로부터 벗어나 여러 목소리가 뒤섞인 담론의 장을 형성하고자 의도한 것이다.

타이포잔치 2023: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예술 감독 박연주
큐레이터 신해옥, 여해진, 전유니
포스터 디자인 프론트도어

올해 타이포잔치가 던진 화두, ‘틈새’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선형적 이해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으로, 올해 타이포잔치는 ‘틈새’라는 화두를 던졌다. 이번 전시에서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라는 방대한 두 세계 사이의 가려진 틈새에 주목한 작업들이 눈에 띄었다. 대표적으로 예술 컬렉티브 ‘새로운 질서 그 후’는 ‘이미지 듣기’를 통해 대체 텍스트의 확대를 제안했다. 대체 텍스트는 시각장애인이 웹상의 이미지를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지만, 비장애인은 그 역할이나 필요성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이 작품은 시각 이외의 감각으로 웹을 경험하는 사용자의 존재를 상기시키며 오늘날 웹이 모두에게 평등한 공간인지 의문을 던졌다. 퍼포먼스를 담은 ‘ㅈㅈㅈ제롬 엘리스’의 영상 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언어 장애와 소리, 시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가는 영상 작품인 ‘트랜스 크립티드’를 선보였는데, 이 영상에서 자신을 ‘자랑스러운 말더듬이(proud stutterer)’로 소개한다. 말더듬이로 살아가는 작가는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세태에 저항하는 태도를 취했다. 한편 이동언의 ‘의미 형성에 필요하지 않은 어떤 습관적 발성’은 말과 말 사이에 생기는 ‘여백’과 ‘비언어적 소리’에 관한 시각적 실험이다. 작가는 글이 말로 변환될 때 사라지는 줄만 알았던 문장부호가 말과 말 사이에 남아 여백을 만든다는 점에 주목했다. 작품 속에는 나이팅게일의 노랫말을 듣는 시인의 모습이 등장한다. 의미가 없는 ‘비언어적 소리’ 자체에 주목해 소리가 다른 감각을 어떻게 자극하는지 살피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장면. 말과 글의 틈새에 가려졌던 것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다종다양한 시도가 정적인 타이포그래피에 활기를 더했다. 〈언어와 상징권력〉의 저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언어가 단순히 개인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권력을 지닌다고 말했다. 우리가 ‘올바른 언어’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 끊임없는 차별과 교정을 통해 탄생한 인공적 결과물이라는 것. 이번 전시는 정체성과 권력의 맥락에서 언어를 살피는 작업도 다수 있었다. 슬라브와 타타르는 10개의 카펫으로 이뤄진 연작 ‘사랑의 편지’ 중 다섯 작품을 소개했다. 20세기 문자 개혁 이후 국가가 나서 특정 문자를 강요하는 ‘알파벳 정치’를 펼쳤던 러시아와 튀르키예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었다. 모국어를 외국 문자로 읽고 써야 했던 문자 개혁 희생자들의 트라우마적 경험을 카펫 위에 수놓은 것이다. 또한 2010년 이래로 이어져온 프로젝트인 ‘머티 인도 고전 총서’는 북 디자인이 언어의 다양성과 접근성을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는지 보여준 귀한 사례였다. 머티 인도 고전 총서는 인도 고전 문헌에 영어 번역을 더해 2개 국어로 출판하는 도서 시리즈다. 여러 언어의 차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며 독해의 동시성을 찾고자 하는 시도를 지면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한편 조각가 조혜진은 한국에 사는 이주민들의 손 글씨를 수집해 만든 폰트 ‘이주하는 서체’를 공개했다. 설문지를 통해 이주민 참여자가 한국 생활에서 가장 많이 쓰고 듣는 말, 좋아하는 단어와 문장을 모았다. 설문 조사로 모은 것은 단순히 손 글씨를 넘어 글자 안에 녹아 있는 이주민들의 삶과 경험이다. 작가는 이주민들과의 인터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단어 ‘바다’를 설치 작품으로 치환한 ‘다섯 개의 바다’를 함께 전시했다. 흙으로 만든 글자 위에 남은 무수한 손자국을 아로새겨 이주민들이 떠올린 글씨 너머의 바다를 상상하게끔 했다.

헤르디마스 앙가라의 ‘라숙’은 줌을 통해 전시장으로 전송되는 실시간 공연 형식으로 소개했다. ‘데스크톱 퍼포먼스’라 불리는 이 작품은 현대인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디지털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켜 ‘능동적인 사용자 경험’이라는 생각의 변화를 유도한다.
이수지의 ‘콤포지션 01’ 외 9점. 활자와 그래픽을 손으로 구현하는 이수지는 손으로 ‘쓸 수 없는’ 활자의 특성에 주목한다.
조혜진의 ‘이주하는 서체’는 한국에 사는 이주민들의 손 글씨를 수집해 만든 폰트다. 함께 설치한 다섯 개의 바다〉에는 이주민들과의 인터뷰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단어 ‘바다’에 관한 인상이 담겨 있다.
양위차오의 ‘칠판 스크리보폰’은 쓰기 동작과 구전 해설, 칠판의 표현이 합쳐진 독특한 형식의 공연이다. 말의 의미를 배제하고 그 표면에 해당하는 소리나 문자로 이야기를 전달했다. 칠판에 남겨진 메시지를 관객 스스로 유추하도록 하며 각자만의 상상을 유도했다.
슬라브와 타타르의 ‘사랑의 편지’는 문자 개혁이 남긴 트라우마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이번 전시에는 10개의 카펫으로 이뤄진 연작 중 다섯 작품을 공개했다.

그간 언어의 세계로부터 소외되었던 것들을 조명하는 작업이 전시의 한 축을 담당했다면, 전시장의 다른 한편에서는 문자와 소리를 재료 삼아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시도가 펼쳐졌다. 대만에서 활동하는 작가 양위차오는 구전 해설과 쓰기 동작이 합쳐진 독특한 작업을 보여줬다. 작가는 대만과 한국의 민담을 엮은 구술 즉흥 공연을 선보이되, 한국인은 물론 중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관객조차 작가의 말뜻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도록 기이한 발성과 어조를 사용했다. 말 대신 가락과 장단, 즉흥연주를 통해 소리를 섬세하게 전달하고, 관객은 그 소리 안에 내포된 감정과 느낌에 기대어 제각기 상상의 나래를 펼치도록 유도했다. 작가의 구술 공연은 칠판에 적힌 문자 형태로 치환해 전시 공간에 설치했다. 전시장에 울려 퍼지는 작가의 목소리와 칠판에 남아 있는 분필의 흔적이 어우러져 기묘한 공감각적 경험을 전한다. 한편 그래픽 디자인 듀오 신신으로 활동하는 신동혁은 말과 음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글자 ‘신양장표음’을 제작했다. 한글 제자 원리와 오선지에 음을 기록하는 방식을 결합한 형태로, 한글인 동시에 음표로도 기능하는 새로운 개념의 활자체다. 관람객이 전시장에 설치된 컴퓨터 자판을 치며 글자를 연주해보며 소리와 문자의 동시성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외에도 문장부호 ‘엠 대시(—)’에 대한 오마주를 표현한 아스트리트 제메의 ‘대시를 긋는 형상들’, 악상 기호를 도형 요소로 시각화한 야노 게이지의 ‘악보와 도형: 일본 동요 변주곡’을 비롯해 익숙한 문자 요소로 새로운 공감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작품을 다수 공개했다.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에서 전시했던 소피 두알라의 ‘검은 토끼를 따라’는 문화역서울284의 전시 공간에 맞게 재구성해 전시했다.
언어의 형성과 용해 과정을 탐구한 요쎄 필의 작품 ‘ㄴㅐ새ㅇ가ㄱ으ㄹ마ㅅ보ㄹㅅㅜ가어ㅂㅅ어.’

일부 전시 작품은 공연과 워크숍, 강연으로 확장되어 관람객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기도 했다. 타이포그래피의 생소한 변주를 자연스럽게 체화하도록 유도한 영리한 기획이었다. 타이포잔치와 계간 〈그래픽〉이 공동 기획해 출판한 〈그래픽〉 50호도 눈길을 끌었다. ‘타이포그래피와 소리’를 주제로 한 이번 호에는 전시에 미처 선보이지 못한 여러 작가의 작품이 수록돼 눈길을 끈다. 글자와 지면의 한계를 뛰어넘은 올해의 타이포잔치는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담론 생성에 힘을 보태고자 하는 비엔날레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싶었다”는 박연주 예술 감독의 말처럼 타이포그래피를 개념적으로, 또 매체적으로 확장하는 데 총력을 다했다. 이번 비엔날레가 뿌린 씨앗이 타이포그래피라는 토양에서 어떤 형태로 발아할지 지켜봄 직하다. typojanchi.org/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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