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으로 발현한 도시의 고유성, 프랑크 밀로 파리 디자인 위크 디렉터
한 해 중 글로벌 디자인 축제 캘린더가 가장 풍요로운 9월, 파리 디자인 위크는 디자인 애호가의 발걸음을 사로잡는 주요한 목적지로 자리매김했다. 이토록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디렉터 프랑크 밀로가 그 비결을 전해왔다.

같은 물건이라도 그것이 놓이는 장소에 따라 존재감이 극명히 달라지기 마련. 배경의 힘은 그토록 압도적이다. 파리 디자인 위크는 그 가치를 예리하게 통찰하며 도시 곳곳의 랜드마크를 십분 활용한다. 디자인을 통해 도시의 고유한 미학을 알리는 영리한 전략은 예술과 디자인의 허브로서 파리의 위상을 이어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한 해 중 글로벌 디자인 축제 캘린더가 가장 풍요로운 9월, 파리가 디자인 애호가의 발걸음을 사로잡는 주요한 목적지로 자리매김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페스티벌 시작부터 함께해온 디렉터 프랑크 밀로와의 대화를 통해 파리 디자인 위크가 이토록 독보적인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비결을 알아보았다.

파리 디자인 위크를 시작한 동기가 궁금하다.
제1회 파리 디자인 위크는 2010년에 열렸다. 글로벌 디자인 페스티벌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는 진작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뒤를 이어 세계 각지에서 디자인 위크가 우후죽순 등장하던 시기였다. 모두가 글로벌 이벤트의 중요성에 공감하고 있었기에 먼저 발을 내딛지 않으면 주도권을 뺏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사피SAFI는 이미 메종 & 오브제라는 강력한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디자인 위크의 개최 시기를 일치시키고 공동의 지향점 아래 상호 보완적인 콘텐츠를 선보인다면 디자인 신에서 파리의 명성을 높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미 앞서가고 있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가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겠다.
기획 초기에는 그랬지만 곧 한계에 부딪혔다. 도시마다 분명한 정체성이 있기에 무조건 벤치마킹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파리 디자인 위크의 동력은 파리 자체, 그리고 디자인 커뮤니티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을 일찍이 깨달은 덕택이다.

여타 도시와 구분되는 파리만의 독특한 디자인 풍경은?
디자이너, 장인, 갤러리, 디자인 하우스, 교육기관이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파리는 디자인과 공예 분야에서 수준 높은 교육과정을 갖추고 있고, 이는 도시의 디자인 생태계에 무한한 활기를 불어넣는 동력이 된다. 박물관을 위시한 문화 기관과 무수한 건축적 자산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축제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훌륭한 틀을 제공한다. 양자가 만나 창의적인 시너지를 증폭시킨다.
해마다 참가자 라인업이 풍성해지고 있다. 효율적인 동선 구성을 위해 도시를 4개의 디자인 지구로 나누었다고.
참가자의 폭이 넓어지는 건 역설적이게도 디지털 환경의 급격한 확장과 관련이 있다. 디지털 매체와 소셜 네트워크는 디자인 신에도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직접 작품을 선보이고 판매처를 물색하는 건 예삿일이 되었다. 이렇듯 디지털 환경은 시장의 문턱을 낮추고 디자인 공급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켰다.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디자인 위크의 약진에도 이바지했다. 정보의 과부화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양질의 무대가 한층 중요해진 것이다. 우리는 참가자를 위한 무대를 마련하기 위해 도시 내 디자인 중심지의 지리적 변화를 면밀히 살핀다. 생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s-Prés나 개선문 광장 주변 지역인 에투알L’Étoile처럼 이미 네트워크가 잘 정비된 지역은 여전히 필수 거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최근 몇 년 사이 마레Marais 지구가 디자인 스폿으로 급부상했다. 팔레 루아얄Palais Royal과 플라스 데 빅투아르 Place des Victoires 역시 신흥 명소로 자리 잡았다. 이렇듯 매년 신규 스폿과 구역이 디자인 중심지로 떠오르며 행사에 역동성을 더하고 있다.

디자인 위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시 차원의 도움을 받기도 하나?
물론이다. 시와 정부의 전폭적인 도움 없이 현재의 지위는 불가능했을 테다. 파리시는 디자이너들이 작품을 선보이고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물리적 기반을 마련해준다. 도시 내 유서 깊고 역사적인 장소를 전시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덕분이다. 그뿐 아니라 거리 곳곳에 광고를 게재하고, 관광청 웹사이트 같은 공식 채널을 통해 행사를 적극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것도 시 차원의 적극적인 조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올해 파리 디자인 위크의 주제는 ‘재생(Regeneration)’이다. 무슨 의미를 담고 있나?
디자인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시대와 환경에 맞춰 유연하게 변모하는 것이 디자인의 본질이다. 인공지능이나 3D 프린팅 같은 기술 혁신은 디자인 산업계에 거대한 전환점을 제시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앞으로는 신진 디자이너들이 중추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본다. 올해 파리 디자인 위크의 주제는 단순히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것에서 나아가, 변화하는 디자인 지형을 조망하고 예측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전문 활동 경력 5년 미만의 디자이너만을 위한 오픈 콜 ‘파리 디자인 위크 팩토리’를 개최하는 것도 미래 세대를 육성하기 위해서인가?
그렇다. 졸업 프로젝트부터 해외 시장 진출까지, 우리는 지난 15년간 학생들을 다방면으로 지원해왔다. 글로벌 디자인 커뮤니티가 유망한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매해 파리를 찾는 것은 이 같은 노력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 작년에는 25개국 130명의 디자이너들이 파리 디자인 위크 팩토리에 참여했다. 오픈 콜의 절차는 늘 같다. 3월부터 5월까지 지원자 신청서를 받고, 이후 행사 주제와의 일관성과 품질을 기준으로 큐레이터가 직접 작품을 선정한다. 올해는 앞선 행사의 참가자였던 장 바티스트 아노탱Jean Baptiste Anotin과 티보 위게Thibault Huguet에게 큐레이션을 맡겼다.
작년 파리 디자인 위크 팩토리에는 한국 디자이너들이 참가해 주목받았고, 지난 1월 메종 & 오브제의 ‘라이징 탤런트 어워드’에서는 한국의 창의 신을 조명하기도 했다.
지난해 한국 디자이너들의 발표는 성공적이었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오는 12월에 주요 창의 도시를 대표하는 6명의 디자이너가 고안한 6개의 쇼케이스를 선보인다. 서울에서는 양태오 디자이너가 참여한다. 그는 라이징 탤런트 어워즈 코리아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한국의 디자인 신과의 연결 고리를 더욱 견고히 다질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파리 디자인 위크가 올해 15주년을 맞는다. 도시의 대표적인 기념물이 디자인을 만나 어떻게 재해석될지 궁금하다.
도시 내 상징적 기념물과 조화를 이루는 설치 작품에 집중하려고 한다. 프랑스 혁명과 자유의 상징인 바스티유 광장의 ‘7월 기념비’는 섬유 조각가 오드 프랑주Aude Franjou의 손을 거쳐 새롭게 변모할 예정이다. 프랑스 국립 고문서 보관소에서는 〈르몽드〉 신문과 크리에이티브 스튜디오 5·5의 대규모 설치 작품을 전시한다. 콩코르드 광장에 위치한 오텔 드 라 마린Hôtel de la Marine에는 갤러리스트 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제레미 프라디에조노Jeremy PradierJeauneau를 초청했다. 박물관을 무대로 펼쳐질 그의 창작 세계로 청중을 초대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도시 내 백화점, 갤러리, 박물관, 학교에서 선보일 350여 개의 설치전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니 기대해도 좋다.
궁극의 비전과 목표가 궁금하다.
파리를 방문한 이들에게 전에 없던 경험을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 무역 박람회인 메종 & 오브제와의 긴밀한 연계가 필수다. 전문가들은 박람회를 찾아 원하는 정보를 습득하고 최신 유통 경향을 파악하며 혁신적인 사업 활로를 모색할 수 있다. 이곳에서 신중하게 큐레이션된 프로그램을 체험함으로써 도시 방문에 실질적인 의미를 더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최종 목표다. 우리의 활동 주기는 1월부터 12월까지가 아니라,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다. 여름휴가가 마무리될 즈음 디자인, 패션, 아트로 이어지는 창의 시즌의 포문을 여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다. 여름의 끝자락, 파티처럼 즐기는 디자인 축제에서 예상치 못한 경험과 감동을 하기를 원한다면 파리 디자인 위크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