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 오웬즈, 사랑과 저항의 신전을 짓다

파리 팔레 갈리에라에서 열린 회고전 <템플 오브 러브 Temple of Love>

2025년 여름, 파리의 팔레 갈리에라(Palais Galliera)에서는 디자이너 릭 오웬즈Rick Owens를 조명하는 회고전 <템플 오브 러브 Temple of Love>가 열리고 있다. 패션이라는 주제를 넘어 총체적 예술의 무대를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30여 년에 걸친 그의 창작 여정을 관통하며 옷이라는 매개를 통한 인간의 연약함, 사회적 긴장, 그리고 사랑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릭 오웬즈, 사랑과 저항의 신전을 짓다

검은 실루엣의 신화

1961년 캘리포니아 포터빌에서 태어난 릭 오웬즈는 1992년 LA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를 시작한다. 고딕적 기운, 페티시적 소재, 탈구된 실루엣, 그리고 무엇보다 ‘검정’에 대한 집착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그를 관통하는 미학의 핵심이다. 폐 군용 담요, 낡은 티셔츠, 군용 가방 등 재생 가능한 소재로 구조화된 실루엣을 만드는 그의 방식은 자원의 부족을 창의성으로 전환하는 윤리적 표현이기도 했다. “내가 만든 옷은 나의 자서전이다. 그것은 내가 동경하는 조용한 우아함과 내가 저지른 폐허들 그리고 내가 품었던 유약한 이상과 그 몰락까지 담고 있다.” 전시 서문에 등장하는 오웬즈의 자필 선언은 오늘날 패션이 나아가야 할 감정적 정직성과 미학적 급진성에 대한 제안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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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utier Deblonde – Palais Galliera – Paris Musées

전시 공간의 재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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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utier Deblonde – Palais Galliera – Paris Musé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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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utier Deblonde – Palais Galliera – Paris Musées

‘템플 오브 러브’는 팔레 갈리에라라는 건물과 공간 그 자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했다. 르네상스풍의 건물 외관에는 오웬즈가 직접 디자인한 반짝이는 직물로 감싼 대형 조각품을 배치해 마치 현대적 성소처럼 탈바꿈시켰고, 박물관 정원에는 브루탈리즘 양식의 시멘트 조각 30점을 전시했다. 이는 그가 2005년부터 아내 미셸 라미(Michèle Lamy)와 함께 제작해온 가구 컬렉션과도 맥락을 공유한다. 햇빛이 직접 전시 공간을 내리쬐는 전시장 내부는 작품 보호를 위해 커튼을 쳤던 이전과 매우 다르다. 빛은 옷을 바래게 하지만 오웬즈는 빛에 바랜 옷은 삶의 마모와 닮아 있다며 이마저도 창작의 일부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기획은 팔레 갈리에라의 미렌 아르살루즈(Miren Arzalluz) 관장과 현대 패션 컬렉션(1947년 이후)을 총괄하는 알렉상드르 삼손(Alexandre Samson)이 맡았다. 그러나 총연출은 오웬즈 자신이 맡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는 팔레 갈리에라를 전시장이 아닌 기억의 궤적이 깃든 사적인 공공 공간으로 정의했다.

남성과 여성, 그 사이의 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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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utier Deblonde – Palais Galliera – Paris Musées

전시는 총 7개의 테마 공간으로 구성되며 각각은 오웬즈가 구축해온 미학적 세계의 드러낸다. 그중 ‘성의 역설(Paradoxe des sexes)’ 섹션은 그가 여성성과 남성성을 어떻게 해체하고 조립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주요 장이다. 여성을 향한 숭배적 시선과 남성을 향한 비판적 성찰은 그가 창조한 실루엣 안에서 공존한다. 섬세하고 유려한 드레이핑의 여성복과, 거칠고 공격적인 남성복은 단순히 젠더의 구분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물리적으로 흔들어댄다. “나는 여성에게 경외심을 품고 있고, 남성에게는 (내 자신을 포함해) 가혹하다.” 는 말처럼 그의 옷은 단지 입는 몸을 감싸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젠더 서사를 날카롭게 꿰뚫는 질문이다.

죽음, 육체, 퍼포먼스

릭 오웬즈는 2010년대 중반부터 인간의 육체 자체를 메시지로 활용해왔다. 2014년 S/S 컬렉션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퍼포머들이 몸으로 리듬을 만드는 스테핑(stepping)을 선보였고, 2015년에는 남성 누드를 노출하며 성적 시선을 전복했다. 2016년에는 여성들이 서로를 지탱하는 장면을 통해 모성, 연대, 난민 문제까지 암시하는 컬렉션을 발표했다. 그의 무대는 더 이상 ‘쇼’가 아니라 ‘행동’이었다. 이러한 실험은 단지 파격이나 충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사회의 불평등 구조에 대한 도발이었는데, 그는 이를 ‘우리의 허망함을 기억하는 미학적 훈련’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패션은 늘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외침이었다.

분노에서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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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utier Deblonde – Palais Galliera – Paris Musées

2016년 미국 대선 이후, 오웬즈는 작업에서 점점 더 정치적 색채를 강화한다. 동시대의 배타적 흐름과 기후 위기를 목도하며 그는 패션이라는 언어를 저항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옷은 더욱 거대하고 조각적 형태로, 실루엣은 거의 건축적 형상에 도달한다. 그러나 최근 몇 시즌에서 그는 다시 부드러움으로 회귀하고 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이탈리아 베니스 해변에 머물며 제작한 컬렉션들은 색감이 더 밝고, 구성은 보다 시적이다. 2020년, 그의 컬렉션에는 멕시코 출신 어머니와의 기억, 사망한 동료 아티스트에 대한 애도, 그리고 단절된 세계에 대한 연민이 고요하게 녹아들었다. “나는 이제 분노보다 온기를, 힘보다 존엄을 말하고 싶다”는 설명은 이번 전시의 제목 ‘Temple of Love’가 그 변화의 연장선이란 걸 암시하게 해준다.

침실이라는 성소

전시의 클라이맥스는 단연 ‘침실의 방’이다. 이는 릭 오웬즈와 미셸 라미가 LA 라스 팔마스 애비뉴에서 사용하던 실제 침실을 재현한 공간이다. 그가 직접 디자인한 침대와 책장, 의식적인 낮잠 시간, 무성 영화에 고전 음악을 덧입혀 감상하는 아침 루틴 등 그들의 삶 자체가 하나의 리추얼이자 설치 작품처럼 구성되어 있다. 그들이 파리로 이주하며 가져온 것들은 바로 이 책들이 유일하다. 이 행위는 단지 물건의 이동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의 전승을 의미한다. 전시를 관람하다 이 공간에 도달하면 그가 얼마나 자기 삶 전체를 패션이라는 프레임 속에 고스란히 흘려 보냈는지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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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utier Deblonde – Palais Galliera – Paris Musées

릭 오웬즈는 단지 ‘검정 옷을 잘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기존 미적 기준에 포섭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대안의 공간을 제시해온 예술가다. 관습과 제도, 차별과 침묵, 정상과 이상이라는 틀을 끊임없이 흔들며 ‘우리는 모두 이상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는 우리가 매일 입는 옷이란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감정을 담아낼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패션은 어디까지 예술이 될 수 있는가도 생각하게 해준다.

Information
Rick Owens 회고전 <Temple of Love>
기간 | 2025.06.28 – 2026.01.04
주소 | 파리, 팔레 갈리에라 Palais Galliera, Musée de la Mode de la Ville de Paris
(10 avenue Pierre Ier de Serbie, 75016 Paris)
기획(디렉팅) | 릭 오웬즈
전시 디자인 | 미렌 아르살루즈, 알렉상드르 삼손
웹사이트 |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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