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덴마크 디자인의 현주소
덴마크는 명실상부 디자인 강국이다. 단순하면서도 인간 중심적인 덴마크의 디자인 철학은 하나의 스타일을 넘어 지속 가능한 라이프스타일을 향한 태도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6월 스리데이즈오브디자인3daysofdesign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덴마크 크리에이티브 신의 다양한 면면을 살펴봤다.

덴마크 디자인 클래식의 수호자
4대를 이어가는 덴마크 국민 소파, 아일레르센Eilersen
덴마크 가구 디자인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기능주의와 미니멀리즘, 장인 정신에 입각해 오래 사용해도 질리지 않는 디자인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수공업 중심 사회였던 덴마크는 실제로 농촌과 도시에서 오래 쓸 수 있는 실용적인 가구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기능과 내구성을 중시한 디자인이 발전했다. ‘덴마크 국민 소파’라는 수식이 따라붙는 아일레르센도 이 시기에 등장한 브랜드다. 흥미롭게도 시작은 마차였다.

창립자 닐스 아일레르센Niels Eilersen은 1895년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견고한 마차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20세기 초 산업화가 도래하자 마차 제작 노하우를 바탕으로 자동차 차체용 목재 프레임을 만들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가구 산업에 뛰어들었다. 아일레르센이 본격적으로 가구 브랜드로 정체성을 확립한 건 1950~1960년대다. 덴마크가 세계 디자인 시장에서 주목받던 시기 프리츠한센, 칼한센앤선 등과 함께 기능주의와 북유럽 미니멀리즘 디자인이 전 세계에 퍼져나갔다. 아일레르센은 이 흐름 속에서 일룸 비켈쇠Illum Wikkelsø 등 유명 디자이너와 협업해 디자인의 영역을 넓혔다.


아일레르센의 소파는 과장된 형태나 트렌디한 장식을 배제하고 구조에 집중한 것이 특징이다. ‘가볍고 견고하며 다루기 쉬운’ 마차에서 출발한 디자인 철학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덕분이다. 1979년 3세대 옌스 율 아일레르센Jens Juul Eilersen이 디자인한 소파 ‘스트라토스Stratos’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함축한 제품으로 덴마크를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호응을 얻었다.

프리미엄 가구 브랜드로 이름을 떨친 아일레르센은 2000년대에 이르러 생산 기반을 중국과 슬로바키아로 확장해 새로운 도약을 꾀했다. 아일레르센은 올해 창립 130주년을 맞았다. 덴마크 디자인사의 흐름 속에서 언제나 사용자 중심의 미학을 추구하며 오래도록 쓸 수 있는 가구를 묵묵히 만들어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브랜드다. eilersen.eu
덴마크 디자인의 신성
권위에서 벗어난 디자인 공동체, 아워 소사이어티
2022년 덴마크 오르후스에서 시작된 아워 소사이어티는 종래의 관습에 의문을 품었다. ‘왜 디자인 브랜드는 늘 누군가의 이름으로 대표될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이들은 제품보다 사고방식을, 브랜드보다 공동체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디자이너 개인의 권위나 스타일에 기대지 않고 디자인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아워 소사이어티는 열린 창작 공동체를 지향한다. 명확한 위계 없이 디자이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가, 제조업자, 소비자 등 다양한 창작 주체가 참여해 브랜드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함께 만들어나간다. 즉 아워 소사이어티에게 브랜드는 디자인을 매개로 사회적 실천과 윤리적 태도를 모색하는 창구에 가깝다. 전통적 디자인 관행에 도전하며 실험적이고 자율적인 디자인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그럼에도 브랜드를 지탱하는 디자인 철학은 확고하다. ‘정직하고 영향력 있는 디자인(Honest, Impactful Design)’. 아워 소사이어티의 모토는 구조적 미학과도 관련이 있다. 나사나 조인트, 접합부 등을 숨기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디자인의 내러티브를 시각적으로 해석하겠다는 뜻이다. 대표적으로 덴마크 디자이너 카스페르 퀴스테르Kasper Kyster와 협업한 ‘리-워크Re-Work’ 시리즈에서 그 지향점을 엿볼 수 있다. 알루미늄을 접어 만든 평면 구조의 벤치, 테이블, 스툴로 이루어진 이 컬렉션은 접이식 부품을 오직 나사로 고정한 투명한 디자인으로 아워 소사이어티가 추구하는 구조적 미학을 보여준다.

‘닷츠 체어Dots Chair’도 그 연장선에 있다. 프랑스 디자이너 카미유 비알레 Camille Viallet와 테오 르클레르크 Theo Leclercq가 완성한 이 의자는 알루미늄 시트와 등받이를 13개의 노출된 나사로 조립해 단순하고 정직한 형태를 구현했다. 덴마크 디자인이 그간 절제된 조형미와 장인 정신에 무게를 뒀다면, 아워 소사이어티는 브루탈리즘과 미니멀리즘을 어느 정도 계승하면서도 제작의 흔적과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며 정직함을 하나의 미학으로 승화시킨다. 이는 완벽하게 마감한 오브제보다 조립 방식과 소재의 본성을 감추지 않은 결과물에서 디자인의 윤리를 읽어내려는 시도다.


이렇듯 기존 흐름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아워 소사이어티는 덴마크 디자인의 미래를 이끌 차세대 주체로 주목받고 있다. 다국적 디자이너와의 협업, 전시와 유통의 유연한 구조, 산업적 효율성과 지속 가능성을 겸비한 설계 방식은 글로벌 디자인 생태계에서도 유의미한 움직임을 만들고 있다. oursociety.dk
덴마크 창의성의 글로벌 허브, 크리에이티브 덴마크
크리에이티브 덴마크는 덴마크 창의 산업과 국제 이해관계자 간의 협력을 장려하는 공공-민간 파트너십 기반의 비영리단체다. 이들의 미션은 명확하다. 덴마크의 창의성을 전 세계에 공유하고 장인 정신, 책임감, 혁신이라는 세 가지 핵심 가치를 바탕으로 덴마크 창의 산업의 글로벌 허브 역할을 하는 것. 크리에이티브 덴마크 마이켄 칼하베Majken Kalhave 대표를 만나 이들이 정의하는 덴마크식 창의성에 대해 물었다.
Interview

“창의성은 함께할 때 가장 강력하게 작동한다.”
크리에이티브 덴마크가 정의하는 창의성은?
덴마크의 창의성은 단순한 미학을 넘어 목적을 지닌 태도에 가깝다. 인간 중심적 사고를 바탕으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기존 규범에 도전하며 사회적 필요에 반응하는 솔루션을 통해 실질적인 삶의 개선을 이끈다. 소재를 새롭게 바라보고 시스템을 재설계하며 사람들을 연결하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전 과정에서 덴마크의 창의성은 변화를 이끌어낸다. 이는 돌봄, 품질, 협업이라는 핵심 가치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사고방식이다.
현재 집중하고 있는 분야나 프로젝트는?
우리는 지금 이 시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창의성의 변혁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다. 창의성이 지속 가능성, 삶의 질, 경제적 회복 탄력성을 어떻게 촉진할 수 있는지를 조명함으로써 디자인의 실질적 영향력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목표는 서울리빙디자인페어, 스리데이즈오브디자인, 밀라노 디자인 위크 등 국제 무대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 복합적인 문제는 고립된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국경을 넘는 협업이 필수적이다. 창의성은 함께할 때 가장 강력하게 작동한다.

덴마크의 창의 산업을 국제 무대에 소개하는 구체적인 방식이 궁금하다.
국제 디자인 페어나 전시에 참여해 덴마크 디자인의 혁신성과 독창성을 소개하고 글로벌 파트너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덴마크 디자인을 선보이거나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전시를 지원하는 등 전 세계가 직면한 과제와 덴마크의 창의성을 연결하는 경험을 공동으로 기획하는 일에 주력한다. 이 모든 과정은 국경을 넘어 다리를 놓는 일이다. 전략적 파트너십과 협업을 통해 덴마크의 창의성이 긍정적 변화를 이끄는 동력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올해 스리데이즈오브디자인에서 선보인 전시의 콘셉트는?
올해는 덴마크 산업 연합(Danish Industry)과 협력해 〈디자인 독Design Dock〉이라는 전시를 선보였다. 코펜하겐의 상징적 장소인 뉘하운Nyhavn의 보트를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닌 대화를 위한 장소로 탈바꿈시켜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왜 만드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덴마크 디자인의 깊이와 방향성을 보여주려 했다. 전시에 참여한 다양한 브랜드와 함께 디자인이 어떻게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를 탐색하는 여정이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덴마크 디자인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다. 스스로를 성찰하고 기존 모델을 끊임없이 재고하며 혁신을 시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진정한 창의성은 인간과 지구, 그리고 미래를 위한 ‘돌봄’에 있다. 이는 목적 있는 디자인, 재료와 제작 방식에 대한 의식적인 선택, 외형이 아닌 본질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덴마크 산업 연합, 디자인 덴마크와 함께 이러한 사고방식을 담은 간행물 〈덴마크 인테리어 디자인-미래를 만들다(Danish Interior Design–Crafting the Future)〉를 발간했다. 이 책에서는 덴마크 디자이너들이 순환성, 장인 정신, 새로운 소재를 어떻게 통합하는지 소개한다.
앞으로의 목표는?
디자인을 비롯한 산업 전반에서 창의적 솔루션의 가치를 간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지속 가능성을 매력적인 선택지로 만들고, 삶과 비즈니스를 동시에 향상시키는 해법을 통해 창의성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체감하길 바란다. 덴마크 디자인 센터와 덴마크 산업 연합이 공동 저술한 〈디자인 딜리버스Design Delivers〉 리포트는 디자인이 수익성을 포함한 다양한 측면에서 가치를 창출한다는 실질적 데이터를 제시한다. 앞으로 몇 년간 이 메시지를 전 세계로 더욱 널리 확산시키며 창의성이 지속 가능한 성장의 핵심 동력임을 입증해나가고자 한다.
한국과의 협력 가능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아시아, 특히 한국은 디자인 혁신과 문화적 영향력의 중심지다. 우리는 상호 학습과 협력의 가능성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2년 연속 참가한 경험에서 비추어보건대 지속 가능한 디자인, 디지털 경험, 라이프스타일 혁신 분야에서 특히 협력 기회가 많다. 덴마크와 한국은 모두 품질, 장인 정신, 인간 중심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긴다. 양국의 창의적 에너지를 연결한다면 심미적이면서도 의미 있고 오늘날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솔루션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