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감각을 조율하는 리스닝 공간

최근 아날로그 사운드와 몰입형 청취 문화가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고 있다. 수동적 음악 감상을 넘어 깊이 있는 청취와 감각적 몰입을 유도하는 소규모 공간이 속속 생겨나는 중이다. 일상에서 듣는 경험을 재구성하는 다양한 리스닝 공간을 소개한다.

일상의 감각을 조율하는 리스닝 공간

재즈와 위스키가 흐르는 바, 리스닝 바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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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시부야의 한적한 골목에 1960~1970년대 일본 재즈와 빈티지 위스키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문을 열었다. 리스닝 바 토濤가 그 주인공이다. 시작은 단순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제대로 듣고 좋은 술을 곁들여 자연스럽게 교류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음악 애호가이자 큐레이터인 운영자와 공간 디자이너, 사운드 엔지니어가 합심해 완성한 이곳은 118㎡에 달하는 작은 규모임에도 밀도 높은 경험을 선사한다. 인테리어를 담당한 토라푸 아키텍츠Torafu Architects는 건축 구조의 맥락을 존중하면서 세 가지 청취 유형에 따라 공간을 구획했다. DJ 부스를 둘러싸듯 배치한 VIP석, 낮은 소파와 의자로 구성한 중앙 라운지석, 차분한 분위기의 카운터석이다. VIP석은 DJ와 가장 가까운 몰입형 좌석으로 연주자의 손끝과 턴테이블의 회전까지 오롯이 감상할 수 있다. 중앙 라운지는 편안한 청취 자세를 유도하고, 은은한 골드 커튼과 백라이트를 내장한 화강암 바의 카운터석은 편한 대화를 이끈다. 사운드 시스템은 뉴욕 브루클린 기반의 브랜드 오하스와 일본 사운드 디자이너 러브 워크스 사운드Luv Works Sound, 화이트라이트Whitelight가 협력해 설계했다. 오직 이 공간을 위해 맞춤 제작한 스피커는 파워소프트Powersoft사의 앰프와 프로세서를 통해 정밀하게 조정한 결과, 공간 어디서나 고른 사운드를 전한다. 턴테이블의 구성 또한 눈여겨봐야 한다. 총 3대의 턴테이블을 운용하는데 아날로그 사운드를 극대화하기 위해 각각의 톤암과 카트리지를 세심하게 세팅했다. 음악 컬렉션은 운영자가 직접 수집한 1960~1970년대 일본 재즈 오리지널 음반들로 구성했다. 대중적이고 익숙한 멜로디보다는 실험적이고 즉흥적인 소규모 레이블의 희귀 음반이 주를 이룬다.

기획 COMBO
공간 디자인 토라푸 아키텍츠
사운드 시스템 오하스(메인 스피커), 러브 워크스 사운드(턴테이블, 사운드 시스템 전반), 화이트라이트(서브우드), 타구치(리어 스피커), 파워소프트(앰프 및 프로세서)
주소 비공개. 인스타그램(@toh_listening_bar) DM을 통한 사전 예약제로만 운영한다.


브루클린 창작 생태계가 만든 사운드 캠퍼스, 퍼블릭 레코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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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에 위치한 오래된 ASPCA(미국동물학대복지협회) 본관 건물이 2019년 사운드 중심의 문화 공간으로 새롭게 탄생했다. 퍼블릭 레코즈Public Records는 이름 그대로 공공의 레코드를 표방하지만, 이는 음반이나 아카이브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들은 음악과 디자인, 환대와 생태, 그리고 공동체를 핵심 키워드로 다채로운 활동을 펼치는 컬렉티브이자 문화 플랫폼이다. 퍼블릭 레코즈는 하나의 건물이 아닌 5개의 독립 공간으로 이루어진 ‘도시 속 캠퍼스’다. 비건 레스토랑 ‘아트리움’, 라이브 공연장 ‘더 사운드 룸’, 카페 겸 레코드 숍 ‘카페 퍼블릭’, 리스닝 라운지 ‘업스테이얼즈Upstairs’, 야외 식물원 겸 이벤트 공간 ‘너서리Nursery’까지 각기 다른 성격의 공간을 관통하는 철학은 명확하다. ‘문화는 소리를 통해 탐구하고, 환대는 공동체를 연결하며, 지구와 그 생명체는 존중받는다’는 것. 퍼블릭 레코즈를 음악 공연장 그 이상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음악 큐레이션도 전통적인 클럽과는 차별화된다. 유명 DJ뿐 아니라 신진 아티스트가 중심이 되어 실험적 앰비언트, 재즈, 포크, 테크노 등 다양한 장르와 스펙트럼을 넘나드는 공연을 펼친다. 특히 더 사운드 룸은 쿼드러포닉 사운드 시스템을 갖춘 몰입형 공간으로, 오직 200명만 수용할 수 있는 소규모가 깊은 청취 경험을 이끈다. 디자인 측면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공동 창립자 중 한 명인 디자이너 셰인 데이비스Shane Davis가 인하우스 팀 ‘퍼블릭 서비스’를 이끌며 조직 전반의 디자인을 담당하는데 플라스틱 프리, 로컬 자재 활용, 자재 재사용을 원칙으로 삼는다. 음악은 언제나 정치의 또 다른 언어다. 사운드를 매개로 공동체와 생태계의 회복을 지향하는 퍼블릭 레코즈의 행보를 더욱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기획 셰인 데이비스, 프랜시스 해리스Francis Harris, 에릭 반더왈Erik VanderWal
디자인 퍼블릭 서비스
오디오 디자인 오하스
주소 233 Butler Street, Gowanus, Brooklyn, New York, USA
웹사이트 publicrecords.nyc


사려 깊은 청취 문화의 매개자, 언컴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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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 of UNKOMPRESS by AlexaBendek 4899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에 둥지를 튼 리스닝 바 ‘언컴프레스Unkompress’는 폭넓은 음악 큐레이션으로 베를린이 단지 테크노만의 도시는 아님을 역설한다. 이들의 방향성은 뚜렷하다. 장르별 선곡에 집중하며 현대 댄스 음악의 뿌리를 추적하는 데 비전을 두고 있다. 재즈, 소울, 퓨전, 다운템포, 신스 등의 장르를 메인으로 테크노의 출발점이 된 도시에서 그 음악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음악을 큐레이션할 때 원칙으로 삼는 기준은 하나다. ‘알고리즘이 아닌 사람이 선택한 음악’. 언컴프레스의 모든 사운드는 독특한 오디오 체인을 통해 울려 퍼진다. 맨쿠소의 로프트를 연상시키는 클립쉬 혼 스피커, 맞춤 제작한 일본산 300B SET 진공관 앰프, 레쇠르 일렉트로닉스Resør Electronics의 클래스 A 로터리 믹스까지 모든 장비는 서로 연결될 때 시너지를 발휘한다.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는 오디오 디자인은 공간과도 긴밀히 관계를 맺는다. 스튜디오 HU가 디자인한 목재 가구는 사운드 시스템을 미니멀한 구조 안에 담아내며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언컴프레스에게 중요한 가치는 사운드가 매개하는 존재와 이야기, 연결이다. 이들은 사운드를 그저 배경음이 아니라 사람과 아이디어, 순간을 연결하는 실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철학은 메뉴에도 그대로 반영했다. 내추럴 와인, 메스칼, 스페셜티 커피 등 생산자의 손을 거친 음료를 제공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식음 문화를 지향한다.

기획·디자인 케빈 로드리게스Kevin Rodriguez
사운드 시스템 클립쉬, 레쇠르 일렉트로닉스
가구 디자인 스튜디오 HU
주소 Fichtestrasse 23, Berlin, Germany
웹사이트 unkompress.berlin


오감을 자극하는 리스닝 공간, 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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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밀라노 이졸라 지구에 오픈한 신개념 하이파이 바 & 다이닝 ‘모고MOGO’가 음악, 디자인, 미식이 교차하는 새로운 문화 플랫폼으로 주목받고 있다. 1950년대 일본 킷사텐 문화를 모티브로 옛 브루어리 건물을 동시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했다. 모고라는 이름은 ‘함께’, ‘연결’을 의미하는 남아프리카 소토어 ‘MMOGO’에서 유래한 것으로 사람과 사람, 감각과 감각, 시간과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한다는 의미가 담겼다. 전통적인 바나 다이닝 구조에서 벗어나 360도의 원형 바를 공간 중심에 배치해 어느 방향에서나 바텐더의 퍼포먼스를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공간 디자인을 맡은 밀라노 기반의 건축 스튜디오 조르자 롱고니 스튜디오는 산업적 미니멀리즘을 바탕으로 재료 본연의 질감이 드러나는 천연 소재와 수공예적 디테일을 더해 균형 잡힌 공간을 완성했다. 아티스트 안드레아 마르코 코르비노Andrea Marco Corvino가 맞춤 제작한 태피스트리 설치 작업은 미식 공간과 리스닝 바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간의 성격을 드러내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모고의 핵심은 다름 아닌 소리다. 베를린의 오디오 브랜드 H.A.N.D. 하이파이가 제작한 수제 하이엔드 오디오 시스템은 절제된 디자인으로 공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면서도 섬세한 음향으로 배경음악 이상의 청각 경험을 선사한다. 여기에 미슐랭 스타 셰프 도쿠요시 요지Tokuyoshi Yoji와 시모네 몬타나로Simone Montanaro가 이끄는 다이닝 키친은 오감을 일깨우는 또 하나의 장치다. 모고는 듣는 행위가 청각을 넘어 시각, 미각, 촉각과 공존하며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공간 디자인 조르자 롱고니 스튜디오
오디오 디자인 H.A.N.D. 하이파이
사운드 큐레이션 Polifonic, BSR
주소 Via Bernina 1C, Isola, Milan, Italy
사진 Vittorio La Fata
웹사이트 mogomilano.com

아티스트가 주인공인 무대, 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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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아티스트 컬렉티브 위사WeSA가 기획한 사운드 중심의 예술 공간, 틸라Thila. 문을 연 지 1년 남짓 됐지만 이곳에서 공연한 아티스트들은 ‘인생 최고의 공연 중 하나’였다고 입을 모은다. 좋은 청각적 경험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음악가들이 자신의 음악을 최대한 구현할 수 있도록 설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할 곳은 틸라 그라운드와 지하 공간. 틸라 그라운드는 건축 설계 단계부터 사운드를 중심으로 계획했다. 위사를 이끄는 가재발 디렉터는 베를린과 도쿄에서 방문한 클럽에서 영감을 얻었고, 설계 과정에서 음향 전문가와 수차례 미팅을 거쳐 공간을 완성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건 벽면 디자인이다. 내부 공간이 줄어드는 단점을 감수하고 벽면에 두꺼운 내장재를 삽입해 완벽한 사운드를 구현했다. 음향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벽면이 서로 마주 보는 각도를 세밀하게 조정하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벽 뒤쪽에는 사운드의 흐름을 위한 다양한 장치를 숨겨두었으며, 어느 위치에서든 최적의 사운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위성 스피커를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관객을 위한 구성도 흥미롭다. 보다 생생한 사운드를 원한다면 계단 좌석을, 연주자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면 바닥의 방석을, 편안함을 추구한다면 의자를 선택할 수 있다. 사운드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싶은 관객을 위해 구석진 곳에 빈백도 마련했다.


건축 삶것건축사사무소
사운드 디자인 가재발(위사)
주소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9길 2
웹사이트 @thila.seoul

감각의 층위를 더하는 방식, 리스닝위드프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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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층적 감각의 교차를 실험하는 리스닝 바이자 사운드 중심의 기획 플랫폼이다. 지난해 12월 DJ 겸 프로듀서 라디오피어Radiofear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허재영이 운영하는 전시 공간 ‘워킹위드프렌드Working With Friend’의 사운드를 큐레이션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 발단이었다. 프로젝트는 음악과 전시, 커피와 술이 어우러지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진화했다. 고즈넉한 한남동 북쪽에 자리 잡은 공간은 1층과 2층을 각각 리스닝 바와 전시 공간으로 운영한다. 층으로 구분된 듯 보이지만 두 공간의 유기적 협업에 방점을 두고 있다. 1층에서 고성능 오디오 시스템을 기반으로 향과 음료, 음악을 결합해 입체적 청각 경험을 선사한다면, 2층에서는 이들이 기획한 전시가 열린다. 모든 전시의 사운드를 직접 큐레이션하는 것이 특징이다. 단지 시각적 결과물에 그럴듯하게 어울리는 소리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기획 초기 단계부터 참여해 주제, 디스플레이, 작가의 표현 방식 등 전시의 구성 요소 전반을 깊이 관찰하고 이를 사운드로 번역해내는 방식이다. 기존 음악을 큐레이션할 때도 있지만 필요한 경우엔 새로운 음원을 창작하기도 한다. 플레이리스트 구성을 넘어 사운드 설계에 가까운 접근을 취한다고. 때로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이 DJ가 되어 직접 음악을 틀기도 하는데 이 또한 리스닝위드프렌즈에서만 가능한 차별화된 경험이다.

기획 허재영, 라디오피어
주소 서울시 용산구 한남대로 162
웹사이트 wwf.kr


청취 감각 재조율하기, 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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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도, 빈티지 오디오 파일 카페도 아니다.” 틸트Tilt는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한다. 다양한 성격의 청취 공간이 늘고 있는 지금,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음악 공간을 지향하겠다는 의미다. 지난 20여 년간 사운드 엔지니어로 활동하며 독립 레이블을 운영해온 김창희 디렉터는 음악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했다. 그 바람을 담아 구현한 곳이 바로 틸트다. 홍대입구역 인근 건물 지하에 들어선 틸트는 은밀한 아지트를 연상시킨다. 회색 콘크리트 벽에 각이 선 가구는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틸트가 지향하는 현대성과 맞닿아 있다. 현대 음악 전반에 최적화된 시스템을 갖춘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틸트에 탑재한 정밀 오디오 신호 관리 시스템과 몰입형 사운드 시스템은 빈티지 오디오나 클래식 기기에서 놓치기 쉬운 주파수 영역까지 빈틈없이 재현해낸다. 전위적인 노이즈 사운드부터 앰비언트나 베이스가 강한 음악까지, 폭넓은 장르가 원음 그대로 편향성 없는 울림을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공간은 사운드를 경험하는 시퀀스에 따라 포닉 덱, 포닉 터널, 포닉 홀로 구성했다. 진입부인 포닉 덱은 정밀한 스테레오 리스닝 환경에서 소리에 대한 몰입을 유도한다. 포닉 터널에 다다르면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는 소리를 통해 감각이 자연스럽게 열린다. 시퀀스의 클라이맥스인 포닉 홀에서는 음향과 공간이 만드는 질서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공연장이나 카페처럼 좌석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은 몸이 반응하는 자리에서 자유롭게 사운드를 경험할 수 있다.

기획·운영 김창희(총괄 디렉터), 김윤정(공간 & 바 큐레이터), 박창환(헤드 큐레이터)
공간 디자인 푸하하하프렌즈
가구 디자인 다주로
그래픽 디자인 오와이이
사운드 시스템 Geithain, Triple Onda, Dolby Atmos, Omni Sky, Silent Beat
주소 서울시 마포구 연희로1길 10 지하 1층
웹사이트 tiltxfnst.com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66호(2025.08)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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