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파이 오디오의 반문화적 실험, 데본 턴불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사운드를 향한 갈망은 여전하다. 턴테이블의 부흥이 이를 증명한다. 순수한 소리와 몰입형 청취 경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하이파이 문화가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오디오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 데본 턴불은 손으로 직접 조립한 대형 스피커와 진공관 앰프, 아날로그 시스템으로 전 세계 크리에이티브 신에서 이름을 알렸다. 사운드를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와 청취 문화를 제안하는 그는 동시대 하이파이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

하이파이 오디오의 반문화적 실험, 데본 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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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 하이파이 스피커 시스템으로 잘 알려진 브랜드 오하스의 창립자다. 미니멀한 디자인 철학과 아날로그 사운드에 대한 깊은 존중을 바탕으로 예술, 공학, 문화적 탐구를 결합한 작업을 통해 전 세계 오디오 애호가들과 크리에이티브 커뮤니티의 지지를 얻고 있다. 오랜 친구였던 버질 아블로가 생전에 그의 성공을 점치기도 했다. @devonojas
대학에서 오디오 엔지니어링을 공부했다. 음악에 관심을 둔 특별한 계기가 있나?

부모님의 영향으로 유년 시절부터 음악을 즐겨 들었다. 당시에는 음악보다 소리에 반응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하이파이 오디오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 앞으로 기어가서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레코드 수집과 DJ 활동을 시작했고, 1970년대 하플러 파워 앰프와 대형 3웨이 스피커를 중고로 구해 방에 두기도 했다. 그 무렵부터 스스로 사운드 시스템을 조율하고 청취 공간을 마련했던 셈이다. 사람들이 우리 집에 찾아와 종종 음악을 듣곤 했다. 인생의 대부분을 음악과 함께했기에 오디오 엔지니어링을 공부한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하지만 오디오나 사운드가 아닌 시각 예술 분야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매일같이 드나들던 레코드 숍에 가면 늘 파티 전단지와 티셔츠가 있었다. 음악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했지만 시각 예술과 패션도 그 못지않게 매력적인 세계였다. 2000년부터 그라피티를 그리다가 ‘오하스Ojas’라는 작은 스트리트웨어 브랜드를 시작했다. 2003년에 이르러서는 친구들과 함께 론칭한 패션 브랜드 ‘놈 데 게레Nom de Guerre’가 뉴욕 패션계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시각 예술 분야에서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쌓기 시작하면서 DJ와 녹음 활동은 그만두고 한동안 취미로 음악을 즐겼다. 하지만 브랜드를 운영하던 당시 도쿄에 자주 방문하면서 장인 정신이 깃든 하이파이 오디오 문화를 접했고 다시금 그 세계에 매료됐다. 전공 지식을 활용해 진공관 앰프 회로 설계를 공부하고 관련 서적을 샅샅이 뒤지며 DIY 오디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약 10년간 브랜드 운영과 DIY 오디오 제작을 병행하다가 현재는 오디오 브랜드 오하스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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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파이 오디오의 어떤 점에 매료됐나?

기술적으로 하이파이는 원음에 충실한 재생을 의미한다. 예전에 나는 주로 스테레오로 음악을 들었는데, 하이파이를 접한 후 과장이나 왜곡이 없는 특유의 사운드에 매료됐다. 하이파이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만, 내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악기 고유의 소리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다. 특히 기타나 더블베이스, 색소폰처럼 중음역대에 속한 악기가 아름답고 사실적으로 들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오늘날 대부분의 음악은 더 크게 들리도록 의도적으로 압축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는 클럽이나 자동차, 휴대폰 같은 환경에서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하이파이 시스템에서는 외려 부자연스럽게 들리는 경우가 많다. 물론 청음 경험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단 하나의 기준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내가 지향하는 하이파이 오디오는 웅장하면서도 몰입감이 깊고 동시에 부담을 주지 않는 편안한 사운드다. 시스템이 거칠거나 공격적으로 느껴진다면 자연히 청취를 꺼리게 된다. 가능한 한 그 앞에서 오래 머물고 계속해서 다시 찾게 되는 사운드 시스템을 구현하는 것이 목표다.

제품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오하스의 오디오는 브루탈리즘 조각처럼 거칠지만 동시에 미니멀한 인상을 준다.

내 작업 방식은 일반적인 오디오 제품 디자이너나 브랜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제품에 들어가는 일부 부품을 직접 디자인하고 오리지널 스피커, 앰프, 프리앰프 등을 제작한다. 그리고 원하는 소리를 구현하기 위해 특정 부품을 공급받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지만 추구하는 사운드를 실현하기 위한 일의 일부다. 내 작업에는 장식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오하스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이엔드 오디오 문화에서 종종 반문화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대다수의 하이엔드 제품은 하이글로시 래커나 이국적인 베니어 같은 고급 마감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그런 외형이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이엔드 제품에서 흔히 보이는 요소 중 상당수는 장식이거나 심지어는 허상에 가깝다. 나는 하이엔드 오디오 산업의 중심과는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다. 내가 제작하는 고효율 혼 로드 스피커나 트라이오드 진공관 앰프 같은 제품은 대량생산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이런 종류의 오디오를 만든다는 말만으로도 오디오 숍에서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최근에 들어서야 그나마 조금씩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내 작업이 예전처럼 급진적으로 여겨지진 않지만 여전히 마이너한 영역에 머물러 있다.

오디오 디자인 역사를 통틀어 작업에 영감을 준 특정 시대나 제품이 있나?

오디오 제품 디자인의 전성기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였다. 내 작업도 어떤 식으로든 그 시대의 미학과 기술을 참고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특허 기반의 음향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영감을 얻는 건 일본의 하이파이 문화다. 서양에서는 종종 오디오 파일을 소비주의적 취향으로 치부하지만 일본 하이파이 신은 그보다 훨씬 다층적이고 정교하다. 그들은 오디오 시스템을 단순히 제품으로 인식하지 않고, 각 부품과 커넥터가 가진 물리적 특성과 상호작용에 기반해 시스템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 구조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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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오디오 브랜드 NNNN과 오하스가 함께 개발한 ON4. 방콕 시윌라이 라디컬 클럽에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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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NNN과 오하스가 함께 만든 ON2. 브루클린 퍼블릭 레코즈를 위해 개발했다.
엔지니어이자 디자이너로서 제작자와 어떻게 협력하는지 궁금하다.

대부분의 작업은 브루클린에 있는 개인 스튜디오에서 진행한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의 부품 중 일부는 공급 업체에서 제작하지만, 그 비중이 크지는 않다. 내 작업의 더 넓은 기반은 장인과의 협업에 있다. 장인의 기술과 지적 재산은 다른 방식으로는 대체하거나 복제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다. 변압기 권선기, 드라이버 제조자, 아날로그(진공관) 회로 설계자 등이 그 예다. 나는 결코 다른 사람의 작업을 모방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회로나 부품을 내 작업에 활용하고 싶다면 반드시 그 원제작자와 협업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제품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유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오디오 애호가들이 집에서 직접 조립할 수 있도록 개발한 DIY 스피커가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 오디오는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예술이자 공예이며 취미다. 이 역시 일본 하이파이 문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하이파이의 세계에서 더 많은 돈을 써야만 최고급 품질을 얻을 수 있다는 통념을 깨트리고자 했다. 제품을 처음 출시한 때는 팬데믹 시기였다. DIY 키트를 판매한 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조립할 수 있는 줌 세션을 개최했는데, 그렇게까지 반응이 클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러던 중 버질 아블로가 자신의 웹사이트 카나리 옐로Canary Yellow에 오하스 아트북과 DIY 스피커 키트를 함께 소개하자 오하스가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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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사카 파티나 호텔에 마련한 리스닝 룸 by 오하스.
오하스 오디오는 전 세계 슈프림 매장과 에이스 호텔 뉴욕, 다양한 리스닝 바와 공연장, 유명 음악 프로듀서의 스튜디오에서 사용한다. 각 공간의 특색에 맞게 오디오를 커스터마이징해 디자인한다고 들었다.

오디오 디자인에 앞서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어떤 종류의 음악을 재생할 것인지, 인원을 얼마나 수용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사운드 시스템을 통해 어떤 느낌을 받고 싶은지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리스닝 룸을 만들고 싶다며 작업을 의뢰하지만 사실 그 개념은 사람마다 꽤 다르다. 누군가는 사적인 공간에서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길 원하고, 누군가는 클럽처럼 활기찬 분위기를 원한다. 이렇듯 지향점에 따라 오디오와 사운드 디자인은 완전히 달라진다.

시각 중심의 문화가 지배적인 오늘날 사운드는 배경에 머물 때가 많다. 2023년 리슨 갤러리Lisson Gallery에서 선보인 〈하이파이 드림 리스닝 룸 No.1 HiFi Dream Listening Room No. 1〉 전시는 오직 소리에 집중하게 한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전시 공간은 리스닝 룸을 콘셉트로 구성했다. 갤러리 한쪽 벽에 스피커를, 가운데에 턴테이블과 앰프를 두고 그 맞은편에는 방문객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을 마련했다. 무엇보다 사찰이나 신사처럼 고요하고 집중하기 좋은 환경을 구현하려 노력했다. 두 달간 열린 전시에서는 재즈 레이블 블루 노트와의 세션, 브라이언 이노의 앰비언트 음악, 테이프에 직접 녹음해 사운드 시스템으로 재생한 라이브 퍼포먼스 등 다양한 사운드 경험이 이어졌다. 하이파이 마니아는 물론 갤러리를 찾은 다양한 관객이 함께 모여 소리에 몰입하는 자리였다. 나는 대중을 겨냥해 콘셉트를 만들어내는 아티스트와는 거리가 멀다. 인정이나 명성을 바라고 이 일을 해온 것도 아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그 경험을 나누었다. 거의 20년 가까이 시간과 비용을 들이며 작업했지만 그동안 어떤 보상도 받은 적이 없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나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오하스의 방식이 더 많은 이들에게 가닿게 되어 기뻤다. 그저 소리와 음악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를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최근에는 하이파이 커뮤니티 활동에 방점을 두고 있다. 커뮤니티는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가?

오디오 장비를 직접 만드는 일은 내 삶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다. 그리고 이 즐거움을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그런 점에서 이 문화가 사라지지 않도록 지켜내는 일이 나에게는 무척 중요하다. 하이엔드 오디오나 DIY 오디오는 전성기에 비하면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귀한 문화가 다음 세대에도 이어질 수 있도록 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바야흐로 스트리밍 플랫폼 시대다. 동시대에 사운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스트리밍 플랫폼, 블루투스 스피커, 무선 이어폰은 우리 삶에서 음악을 그 어느 때보다 널리 확산시켰다. 우리는 끊임없이 음악을 듣는다. 하지만 그 경험은 다분히 수동적이다. 운전, 운동, 집안일, 저녁 식사 등 일상의 많은 순간에 무의식적으로 음악을 재생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듣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른다. 청각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는 가장 중요한 감각 중 하나인데도 말이다. 하이파이의 부흥이 시각, 촉각, 미각, 후각 못지않게 청각의 가치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66호(2025.08)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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