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시오타 치하루 개인전
가나아트에서 열리는 시오타 치하루의 세 번째 개인전 《Return to Earth》
가나아트센터에서 일본 출신 설치미술가 시오타 치하루Shiota Chiharu, (b.1972)의 개인전 《Return to Earth》가 열린다. 이번 전시는 2020년 《Between Us》, 2022년 《In Memory》 이후 3년 만에 가나아트에서 다시 선보이는 시오타 치하루의 세 번째 개인전이다.


가나아트센터에서 일본 출신 설치미술가 시오타 치하루(Shiota Chiharu, b.1972)의 개인전 《Return to Earth》가 열린다. 이번 전시는 2020년 《Between Us》, 2022년 《In Memory》 이후 3년 만에 가나아트에서 다시 선보이는 시오타 치하루의 세 번째 개인전이다. 오사카 나카노시마 미술관에서 공개된 주요 신작을 한국에서 처음 소개하는 이 전시는 작가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삶과 죽음, 실존과 정체성의 문제를 다시 불러오면서도, 특히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비롯되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순환의 구조를 드러내고자 한다.
관계에서 기억으로

시오타 치하루가 가나아트에서 처음 선보인 개인전 《Between Us》(2020)는 낡은 의자와 붉은 실을 교차시킨 대형 설치로 관객을 압도했다. 실은 단순한 매개체가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관계의 끈이었다. 관람객이 그 붉은 실 사이를 거닐 때 우리는 서로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관계망 속에서 끊임없이 얽히고 흔들리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이 작업을 통해 인간 존재가 홀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얻는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인간은 서로의 기억을 통해 존재한다”라고 언급하며 관계를 실타래로 비유했다. 《Between Us》는 시오타 예술 세계의 핵심이 관계적 존재론에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 전시였다.

이후 2022년에 열린 《In Memory》에서 작가의 관심은 한층 더 깊은 내면적 차원으로 이동한다. 붉은 실 대신 흰 실이 전시장 전체를 채우고 그 안에는 배와 드레스 같은 사물들이 걸려 있었다. 이는 사라진 존재와 과거의 시간을 불러내는 매개체였다. 시오타는 “물건에는 기억이 붙어 있다. 사물은 우리보다 오래 살아남아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간다”고 적으며 기억을 단순히 개인의 뇌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공간 속에 잔존하는 에너지로 해석했다. 관람객은 실 사이를 통과하며 사물이 품은 기억을 불현듯 마주하고 잊힌 듯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중첩되는 경험을 한다. 《Between Us》가 현재의 관계를 통해 ‘나’를 인식하게 했다면, 《In Memory》는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며 존재의 연속성을 되묻는 전시였다.

다음의 고백은 시오타 치하루의 단순한 개인적 기록을 넘어 작품이 삶과 죽음이라는 근원적 질문으로 옮겨간 배경을 설명한다. 개인의 실존적 상처는 전시의 주제를 보편적 차원으로 확장하는 동력이 되었다.
“암은 끝을 암시하는 듯한 침묵과 함께 찾아왔다. 그리고 아이를 잃었다.
임신 6개월 차의 사산이었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와 밖으로 나갈 수도, 세상을 마주할 용기도 없었다.
나는 내 삶이 끝났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시오타 치하루
흙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구조
《Return to Earth》는 이러한 맥락을 잇되, 인간 실존을 더 근원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이번 전시의 핵심은 생명이 흙으로부터 비롯되어 결국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이다. 전시장 한가운데 자리한 전시 제목과 동명의 대형 설치작 <Return to Earth>(2025)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얽힌 검은 실이 흙더미와 맞닿으며 장엄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시오타는 “우리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단지 그 일부일 뿐”이라고 적었다. 작품 앞에 선 관람객은 자신이 거대한 순환 질서 속에서 아주 작은 한 조각일 뿐임을 직관적으로 체감한다. 죽음을 단절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 안에서 귀환하는 것이라는 사고의 전환이 이 전시에 담겨 있다.




작가의 신작들은 고통의 체험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Cell>(2024–2025) 연작은 유리와 철사로 구성된 세포 구조를 형상화한다. 유리는 깨지기 쉬우면서도 열과 압력에 의해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한다. 이 속성은 투병의 경험을 은유하며 연약함과 회복 가능성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작가는 “내 몸은 자연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일부임을 의식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또 다른 작품 <The Self in Others>(2024)는 해부학적 도판에서 출발해 단절된 신체 파편을 배치한 설치다. 육체가 해체되더라도 기억은 이어지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가 재구성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관람자는 파편화된 신체를 통해 오히려 인간 존재의 연속성과 확장을 떠올린다.

“세포가 스러진다. 또 다른 세포가 태어난다. 매 숨결마다 나는 변화한다.
내 몸은 자연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그 일부임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흙으로의 귀환이다. 신체로의 귀환. 의식으로의 귀환.
그리고 내가 언제나 자연의 일부였다는 조용한 깨달음으로의 귀환이다.”
시오타 치하루
순환이라는 보편적 질서
가나아트에서 열린 세 번의 시오타 치하루 전시를 꿰어 보면 작가의 사유가 어떻게 확장되고 심화되었는지 선명히 드러난다. 《Between Us》는 관계라는 사회적 차원에서 존재를 탐구했고, 《In Memory》는 시간과 기억이라는 내적 차원에 천착했으며, 《Return to Earth》는 이를 넘어선 자연 질서 속 순환으로 나아간다. 붉은 실은 사회적 긴장과 관계의 망을, 흰 실은 사물이 지닌 기억의 잔존을, 검은 실과 흙은 생명의 귀환을 은유한다. 작가는 “그저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 치유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덧붙이며 존재 그 자체가 이미 순환의 일부임을 일깨운다.


시오타의 작업은 관계와 기억을 거쳐 이제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보편적 질서에 도달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 경험의 승화를 넘어 동시대 미술이 제기해야 할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본 전시는 이 질문을 추상적 사유가 아닌 감각적 경험으로 치환하여 관람자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한다. 그 과정에서 예술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는 치유의 통로이자 삶을 다시 살아낼 용기를 부여하는 매개가 된다.

이번 전시는 죽음을 종결이 아니라 순환의 일부로 제시하며 관람객에게 존재를 향한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실과 흙이 만든 어둠의 밀도를 지나며 우리는 자연의 일부임을 새삼 자각하게 된다. “나는 단지 세상의 일부일 뿐”이라는 작가의 진술은 이번 전시가 관객에게 건네는 궁극의 깨달음이다. 그것은 상실의 고통을 넘어선 치유의 미학이자 예술이 존재해야 할 이유에 대한 가장 단순하면서도 깊은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