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보리진 예술가 ‘와라바 웨더올’, 호주현대미술관에서의 첫 개인전
전시 <그림자와 실체(Shadow and Substance)>
호주 원주민 예술가로 주목받고 있는 와라바 웨더올이 호주현대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오랫동안 억눌려온 원주민의 역사와 그런 현실에서도 공동체의 정체성과 저항의 흔적을 작품으로 담아낸다.

와라바 웨더올(Warraba Weatherall)은 카밀라로이(Kamilaroi) 출신 예술가이자 연구자로 현재 주목받고 있는 호주 원주민 예술가이다. 거리 예술가로서의 초기 경력을 바탕으로 거리의 메시지를 제도 안으로 들여오면서 지난 10여 년간 호주에서 활동했지만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름 아닌 호주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Australia, 이하 MCA)에서의 첫 단독 미술관 전시. MCA가 2025년의 첫 기획전시로 웨더올을 소개한 것은 굉장히 의미 있으면서도 파격적이었기에 그의 전시 소식은 호주 미술계에 큰 화제가 되었다.
전시명 <그림자와 실체(Shadow and Substance)>에서 ‘그림자’는 오랫동안 억눌려온 원주민의 역사와 그에 대한 공식 기록의 공백을, ‘실체’는 그러한 그림자 속에서도 이어져 온 공동체의 정체성과 저항의 흔적을 상징한다. 웨더올은 이번 전시를 통해 역사는 단지 기록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록 바깥에서 살아 숨 쉬고 전승되어 온 감각, 기억, 상흔에도 기반한다는 점을 일깨우면서 식민주의 이후의 유산과 제도를 탐색한다. MCA의 큐레이터 메건 롭슨(Megan Robson)이 기획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최신 작품과 함께 공공 및 개인 소장품의 대여작으로 구성되었으며 설치, 조각, 영상 작품들을 통해 미술관 컬렉션과 아카이브에 담긴 내러티브를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MCA의 1층 전시장은 그동안 감춰졌던 실체들이 드러나는 공간으로 재구성되었다. 특히 관람객은 전시장 입구에서부터 하나의 시각적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미술관에 무엇이 보관되고 무엇이 기록되지 않았는가?’라는, 전시를 관통하는 질문에 대해 웨더올의 작업이 응답처럼 이어진다. 전시의 전반적인 설치 또한 단순한 관람을 넘어서 관객의 신체 감각과 반응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높고 어두운 공간, 유골 상자를 연상시키는 전시 가구, 그리고 주기적으로 울리는 낮은 진동의 사운드로 인해 전시장은 마치 묵상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는 단순히 정보와 이미지를 전달하는 전시가 아니라 관람객에게 책임과 질문을 던지며 감각적인 경험을 유도하는 전시로 이어진다. 무엇보다도 관람객에게는 작가가 직접 제작한 무료 오디오 가이드를 비롯하여 다양한 관련 영상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웨더올의 대표작 <Trace (2025)>는 회전 운동을 반복하는 대형 구조물로 구성된 설치 작업으로 외형적으로는 놀이 기구나 과학 실험 장비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원주민들의 인류학적 기록과 유골 사진, 식민지적 분류체계의 문서가 파편처럼 삽입되어 있다. 웨더올은 자신의 가족과 관련된 해부학적 기록을 찾아내 이 작업을 구상했다.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 주(州) 북서쪽 브루아리나(Brewarrina)에 살던 그의 조상들은 과거 그 지역에 방문했던 미국 생물학자이자 우생학자 찰스 대븐포트(Charles Davenport, 1866-1944)에 의해 연구 대상으로 분류되었고 이때 수집된 자료들은 가족의 동의 없이 발표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웨더올은 식민주의 시대에 과학과 인류학이 어떻게 제국주의적 시선으로 원주민의 삶을 수집하고 분류했는지를 문제시한다. 과거의 문서로 만들어진 기록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작동하는 인식의 틀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주요 작업인 <Dialectic (2025)>은 각종 아카이브에서 수집한 필름과 오디오 자료를 조합하여 구성한 것으로 과거의 식민 문서가 어떻게 번역, 편집, 전달되었는지를 시청각적 언어로 풀어낸 영상이다. 이 영상에서 작가는 인종적 고정관념과 편견이 담긴 역사적 자료들이 교육 기관에 의해 어떻게 정당화되었는지 문제를 제기한다. 한편, 영상 속에서는 문서로 만들어지지 않은 원주민 공동체의 전통적인 구술 방식이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이는 전시 전체의 주제 의식과도 직결된다. 문서로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하는 기억, 그리고 제도권에서 배제되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언어와 문화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동으로 만든 30개의 기념 명판으로 구성된 설치 작품 <To know and possess (2021–2025)>는 웨더올이 지난 10여 년간 공공 및 개인 컬렉션에서 찾은 카밀라로이 역사에 관한 연구를 이어온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호주 및 세계 각지의 박물관, 개인 컬렉션, 대학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원주민의 자료와 유물이 어떻게 반출되었는지 보여준다.


‘장송곡’을 뜻하는 <Dirge (2023)>는 죽음과 기억, 그리고 정보가 어떻게 번역되고 전달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폴리폰Polyphon 형태의 대형 설치작품에서 웨더올은 호주 박물관에서 발견한 식민지 시대의 토지권 문서를 점자로 번역해 악보로 활용했다.
*금속 디스크에 박힌 패턴을 이용해 자동으로 음악을 재생하는 장치


대형 조각 <InstitutionaLies (2017/2025)>는 감옥 제도가 호주 원주민 사회에 미친 영향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며 구금된 원주민의 문제를 중심으로 구조적 불의와 감시 정책, 식민주의적 뿌리를 성찰한다. 지구본을 둘러싼 철사 구조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감옥의 억압적인 권력 구조를 형상화하며 감시와 통제의 메커니즘이 어떻게 제도화되고 인종 차별의 도구로 작동해 왔는지를 드러낸다. 웨더올은 감옥을 식민 권력과 사회적 통제를 상징하는 구조물로 재해석함으로써 원주민 인권 침해와 제도적 폭력의 지속성을 강하게 고발한다.

<그림자와 실체(Shadow and Substance)>는 호주 원주민 예술가의 개인전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식민주의 시대 이후 예술이 어떻게 기억을 소환하고 제도를 재구성하며 감춰진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지를 묻는 중요한 사례다. 이는 호주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식민주의 유산을 재고하는 흐름 속에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시도로 여겨진다. 와라바 웨더올은 이번 전시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지식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삭제되고 왜곡되었는지를 드러내면서 예술을 통해 새로운 관점으로의 복원을 시도했다. 그는 자신의 예술이 호주 원주민 공동체에 국한되지 않고 제국과 주변부 사이에서 역사를 경험해 온 많은 사회에 울림을 주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와라바 웨더올의 첫 개인전 <그림자와 실체(Shadow and Substance)>는 오는 9월 21일까지 진행된다.
Infomation
<그림자와 실체(Shadow and Substance)>
기간 2025.03.21 – 09.21
장소 호주현대미술관 MCA
전시 기획 메건 롭슨 Megan Rob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