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나인
기억을 수호하는 디자인 반란군
2025 서울디자인페스티벌(SDF)의 아트 디렉터를 맡은 레벨나인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아카이브의 가치를 전하는 창작 집단이다.

아카이브archive의 어원은 그리스어 아르케이온arkheîon으로 도시국가의 최고 행정관 아르콘archon이 머물던 관저 겸 집무실을 뜻했다. 공공 행정 문서를 보관했던 이곳은 그래서 ‘지배자의 집’이란 의미도 겸했다. 이는 정보의 범람 속에 역설적으로 말소되어가는 기억의 가치와 권위를 되뇌게 만든다. 레벨나인은 이 같은 기억의 가치를 전하는 크리에이티브 그룹이다. 국내 아카이브 신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이들은 올해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아트 디렉터를 맡았다.

관습에 반기를 든 뮤즈들

경영학도가 설립한 디자인 회사라는 점에서 레벨나인은 출발부터 흥미롭습니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나요?
김선혁(이하 선혁) 사실 대학생 시절 내내 학과 공부보단 연극 동아리 활동에 더 빠져 있었어요. 졸업할 때쯤에는 새로운 형식의 무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컸죠. 그런 생각으로 진학한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디지털 아카이브를 전공했습니다. 석사과정을 마친 뒤 몇 가지 아카이브 관련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고, 기획과 디자인을 함께 논의할 파트너를 찾던 중 대학원 동기인 오은 시인으로부터 김정욱 디렉터를 소개받았어요.
김정욱(이하 정욱) 그때 저는 다음(현 카카오)에서 코디네이터로 근무하고 있었어요. 주요 업무가 인터뷰를 하고 로우 데이터raw data를 정리해 팀원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죠. 주로 리서치 기반의 프로젝트였는데 거기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김선혁 대표이사와 함께 한 프로젝트는 리서치를 넘어 시각화까지 이뤄지는 것이라 흥미로웠어요. 그렇게 몇 차례 합을 맞추며 레벨나인까지 만들게 된 것이죠.
레벨나인을 스스로 ‘문화 예술 리소스 큐레이션 컴퍼니’라고 부르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선혁 인터뷰에서 몇 번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은데, 솔직히 우리가 하는 일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여전히 모르겠어요. 대외적으로 설명할 말이 필요했던 것뿐이죠. 당시 우리에게 들어온 일이 대부분 디지털 아카이브나 디지털 소스와 관련된 일이다 보니 ‘문화·예술 리소스 큐레이션 컴퍼니’가 그나마 가장 적절한 표현 같았습니다. 아카이브의 재료는 다양합니다. 사진일 때도 있고, 미술관 소장품일 때도 있죠. 인터뷰 텍스트가 되기도 하고요. 뮤지션 보아 20주년을 기념하는 ‘My BoA Player’에선 음원이 리소스였습니다. 클라이언트의 요구는 대부분 이 리소스를 활용해 그 안에 담긴 가치를 끌어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인지도가 높아졌지만, 그때만 해도 레벨나인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그런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죠?
정욱 초기에는 비용에 상관없이 우리가 역제안하곤 했어요. 대표적으로 2015 타이포잔치의 아카이빙 앱 ‘동-서-남-북 도시 나침반’이 있습니다. 참여 작가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좀 다른 경험을 설계해보겠다고 적극적으로 어필했어요.
선혁 90여 팀의 작가 이력을 아카이빙해 보여주는 애플리케이션이었습니다. 보통 비엔날레에서 완결된 작품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지, 작가의 학교나 이력을 드러내 보일 생각은 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이것이 오히려 새로운 정보 경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프로젝트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분들이 작업을 의뢰하면서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레벨나인은 별도의 마케팅 파트가 없어요. 그래서 포트폴리오가 최고의 영업이라고 이야기하죠.
‘레벨나인’이라는 사명에 담긴 뜻도 알려주세요.
선혁 팀을 시작할 때 롤 모델을 찾지 못했어요. 따를 만한 선례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죠. 그때 우리가 하는 일이 기존 문법과 완전히 결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관습을 깨고 도전한다는 의미의 레벨(rebel, 반란군)이라는 단어를 이름에 사용했습니다. 나인은 9명의 뮤즈에서 따왔습니다. 뮤즈의 어머니인 므네모시네가 기억의 여신이라는 것도 아카이브 프로젝트에 특화된 우리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정욱 실제로 전문가가 9명 정도 모였을 때 프로젝트가 완성되더군요.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 사운드 전문가…. 9개 분야의 전문가만 모이면 못 할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레벨나인의 일하는 방식


그럼 혹시 현재 레벨나인의 조직 구성도 9개로 나누어지나요?
정욱 팀원이 22명 정도 되는데 분류 방식에 따라 얼추 9개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선혁 팀원들의 전공을 죽 살펴본 적이 있어요. 경영학, 한국 예술학, 예술학, 디자인학, 경제학, 디자인 경영, 인터랙션 디자인, 시각 디자인, 산업 디자인, 실내 건축, 건축공학, 예술공학, 전기공학, 컴퓨터공학, 정보 융합…. 정말 배경이 겹치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군요.(웃음) 솔직히 우리는 다학제 그룹을 목표로 한 적은 없어요. 이런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다학제적 그룹이 된 것이죠.
확실히 일본의 팀랩이나 디스트릭트 같은 여타 다학제 그룹과는 성향이나 방향성이 다른 것 같아요.
선혁 그런 팀들은 시각적 경험과 공간 몰입에 특화되었지, 우리처럼 다량의 자료를 다루지는 않죠. 물론 시각 요소는 우리에게도 중요하지만요.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성격이 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직의 색깔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레벨나인의 목적은 자료를 읽게 만들고, 감각하게 하고, 생각할 거리를 주는 쪽에 가깝습니다. 멀리서 보면 디지털 디자인이라고 뭉뚱그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갈래가 더 세분화될 것 같아요. 아마 10년쯤 지나면 더 달라 보이겠죠. 우리는 절대 팀랩이나 디스트릭트처럼 될 순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한편으로 그들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웃음)


확실히 일본의 팀랩이나 디스트릭트 같은 여타 다학제 그룹과는 성향이나 방향성이 다른 것 같아요.
선혁 그런 팀들은 시각적 경험과 공간 몰입에 특화되었지, 우리처럼 다량의 자료를 다루지는 않죠. 물론 시각 요소는 우리에게도 중요하지만요.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성격이 다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직의 색깔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레벨나인의 목적은 자료를 읽게 만들고, 감각하게 하고, 생각할 거리를 주는 쪽에 가깝습니다. 멀리서 보면 디지털 디자인이라고 뭉뚱그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갈래가 더 세분화될 것 같아요. 아마 10년쯤 지나면 더 달라 보이겠죠. 우리는 절대 팀랩이나 디스트릭트처럼 될 순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한편으로 그들이 부러울 때도 있습니다.(웃음)
평면 작업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도 레벨나인의 특징 같습니다.
선혁 김정욱 디렉터와 제 성향이 적절히 조합된 결과라고 생각해요. 저는 애초에 디지털을 다루고 싶어 레벨나인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거든요. 연극에 대한 꿈이 있었던 만큼 전시든, 전시관이든 늘 무대 같은 어떤 것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이런 성향 때문에 디지털을 다룰 때도 ‘왜 프로젝터나 스크린에서 끝나야 하지?’, ‘오브제를 움직이게 만들 순 없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웹사이트든 영상이든 절대 평면에 머무르게 하고 싶지 않죠.
정욱 학부에서 영상 영화와 예술학을 공부하면서 매료된 것이 다큐멘터리였어요. 카메라를 들고 무언가를 오랫동안 관찰한 뒤 그것을 편집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흥미롭더군요. 지금 하는 작업의 방법론에도 같은 기저가 깔려 있어요. 조형이나 인터랙션도 많이 고민하지만 가장 기본은 서사를 찾아가는 과정 같습니다. 그 서사를 위해 다양한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죠.
보통은 기획자가 스토리텔링에, 디자이너는 시각성에 천착하잖아요. 레벨나인은 정반대군요.
선혁 그래서 프로젝트마다 디렉터십을 발동하는 분야가 정해져 있지 않아요. 기획, 공간 디자인, 디지털 경험의 전문가가 뒤섞여서 의견을 주고받죠.
하지만 여러 분야를 유기적으로 연결해야 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요.
정욱 초반에는 확실히 좀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비교적 최근부터 프레임워크 설계에 각별히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프로젝트 킥오프에 관한 테스트를 많이 했어요. 어떻게 하면 이 시간에 팀원들을 더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을지, 킥오프가 프로젝트의 다음 단계를 이끄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선혁 프로젝트 중간중간 계속해서 의견을 주고받는 단계를 의도적으로 설정해두기도 했어요. 내부에선 이것을 프리 프로덕션 단계라고 불러요. 물론 처음부터 이런 것을 설계했던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흐르고 조직이 갖춰지면서 점차 이런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은 킥오프가 레벨나인의 마일스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각자 어떤 역할을 어디까지 할 것인지 매우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눠요. 정리가 되지 않으면 정리가 될 때까지 몇 번이라도 다시 같은 자리를 마련합니다.

디지털 회사들이 보편적으로 일하는 방식 같아 보이진 않네요.
선혁 맞아요. 이것을 디지털 프로덕션의 파이프라인이라고 부릅니다. SI(System Integration) 기업에선 보통 기획, 스토리보드, 디자인, 개발이 선형적으로 이뤄지는데 그런 방식으로는 재미있는 것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팀원들은 아우성치죠. 이럴 때 김정욱 디렉터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킥오프 때 김 디렉터는 포스트잇에 이 프로젝트에서 불안한 요소, 도전하고 싶은 요소를 각자 적게 해요. 그리고 PM이 이것을 랩업하죠.
정욱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때도 있어요. 당장 해당 프로젝트에 적용해보기도 하고, 잘 간직했다가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기도 하죠.
선혁 본격적인 프로덕션 단계 전에는 프로젝트가 언제든지 엎어질 수 있다는 사실도 팀원들에게 주지시킵니다. 기획, 디자인, 프로토타이핑이 무한 반복되는데 이 과정을 크리에이티브 사이클이라고 불러요. 이것을 조직 문화로 정착시키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정욱 대신 실제 프로덕션 단계에 이르면 단 하루도 단계가 거꾸로 가선 안 됩니다.(웃음) 아마 다른 팀에서 보기 힘든 레벨나인만의 업무 방식일 것 같군요.
디자인, 기술 그리고 아카이브

그런 생각을 종국에 발현시키는 것은 디자인이잖아요. 그만큼 김정욱 디렉터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김정욱 디렉터의 관점과 디자인 철학은 무엇인가요?
정욱 레벨나인이 만드는 결과물이 대부분 사용성을 갖춘 만큼 사용자의 경험과 편의성을 많이 고민합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 박물관에 설치하는 미디어라고 하면 어느 정도 높이에 설치할지, 화면의 기울기는 어느 정도 각도가 좋을지, 인터페이스는 어떤 방식으로 배치해야 아이들이 길을 잃지 않고 원하는 목적지에 잘 도달할지 생각하죠. 물론 시각적인 부분도 중요합니다. 이 그래픽이 프로젝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지, 와우 포인트가 있는지 살핍니다. UX 관점에서 타이포그래피의 위계, 가독성, 심미성도 두루 고려하고요.
게임성을 가미한 디자인도 종종 선보이고 있어요. 몇 해 전부터 그래픽 디자인 신 일부에선 이처럼 게임 문법을 차용한 결과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고민하고 있어요.
정욱 프로젝트마다 필연적으로 게임 요소를 반영할 때도 있고, 의도적으로 차용할 때도 있어요. 예를 들어 몇 년 전에 〈닷과 대쉬의 모험〉이라는 VR 전시를 연 적이 있는데 모든 인터페이스가 VR 세계 안에서 이뤄지는 만큼 게임 요소를 그대로 반영할 수밖에 없었죠. 반면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개관을 기념해 열린 최민 컬렉션 기획전에선 의도적인 차용이 있었어요. 개관전이다 보니 전시장을 찾는 이들의 성향이나 연령대를 가늠하기 어려웠어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콘텐츠를 즐겼으면 좋겠다는 미술관의 요청도 있었고요. 가장 쉽게 관심을 끌 수 있는 것이 게임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 가장 관심 있게 다루는 기술이 있나요?
정욱 아무래도 AI겠죠. 하루가 멀다 하고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매일같이 스크리닝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하는 일의 상당수가 AI와 연결되는 것 같아요. 주제적으로든 도구적으로든 말이에요.
선혁 결국 AI가 자료와 자료를 읽는 독자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할 것 같아요. 레벨나인도 지금 모 박물관과 이 부분을 탐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검색을 비롯해 여러 면에서 AI가 아카이브의 경험 방식 자체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가게 될 것입니다. 필터나 메뉴, 태그로 이뤄지던 아카이브 경험과는 완전히 다르죠.


정욱 2023년 피크닉에서 진행한 전시에서 처음 AI를 활용한 작업을 대중에게 선보였어요. 당시 크게 유행한 MBTI류의 유형 분석 작업이었죠. 이전까지 유사한 플랫폼에선 별도로 개발한 알고리즘을 통해 분석이 이뤄졌는데 우리는 오픈AI의 API를 적용해봤어요. 이후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우리가 묻는 대로’라는 미디어 작품을 선보인 적이 있는데 그때도 AI가 작품 설명과 전시 전반에 대한 관객의 질문에 답하도록 만들었죠.
선혁 피크닉 전시 때 AI를 활용한 이유는 몇 가지 정해진 패턴에서 답을 내놓는 기존 방식이 흥미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대부분 나만의 관계맺음에 반응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요즘 박물관의 아카이브 자료를 탐색해가는 UX 미디어를 기획하고 있는데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 선생님이 ‘아카이브 기술이 디지털 시대의 독법을 만들어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 게 기억에 남았어요. e북이나 웹사이트의 정보 취득 방식은 여전히 책에 대한 경험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AI 같은 새로운 기술이 아카이브 자료를 읽는 방식 자체를 새롭게 설계할 수 있어요.


레벨나인의 최대 강점은 아카이브를 잘 큐레이션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어떻게 그처럼 방대한 자료를 다루는지도 궁금해요.
정욱 자료의 종류는 매번 다르지만 모든 아카이브는 필수 메타데이터와 기술 메타데이터로 수렴되는 것 같아요. 결국 정보의 항목을 잘 분류하는 게 효과적인 방법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터페이스의 특징을 도출할 때도 있고요. 재작년에 진행한 ‘아디다스 XR 헤리티지’ 프로젝트가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사용한 도구는 비전 프로였는데 아디다스의 유산을 기록한 수많은 사진을 어떻게 인터페이스화할지 고민했습니다. 결국 이 자료들을 성격별로 재분류했고 여러 테스트를 통해 기기를 착용했을 때 각 이미지가 사용자에게 다가오는 인터페이스를 구상했어요.
선혁 경기문화재단의 사이버 도서관 팀과 진행한 ‘기억의 도서관’이라는 작업도 있습니다. ‘경기’라는 명칭이 생긴지 100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는데 클라이언트는 지역에 관련된 방대한 e북을 소장하고 있었어요. 최초의 요청은 이 e북을 전시하는 것이었지만 과연 관람객이 이 자료를 얼마나 읽을지 의문이 들더군요. 그래서 회의 시간에 반쯤 농담으로 e북을 직접 보여주는 대신 경기도에 관한 1000개의 이야기를 모으고 이 이야기를 e북과 연결 짓자고 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 뒤에 실제로 경기문화재단이 사학자들과 함께 1000개의 이야기를 모아 온 거예요. 이 이야기들을 카드로 만들면서 e북과의 연결성을 찾았습니다. 이처럼 정보의 재구조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카이브 자료를 다룬다는 특징 때문인지 확실히 특정 해를 기념하는 기업 프로젝트가 많은 것 같아요.
선혁 구글 코리아 20주년 기념 전시도 있었죠. 지난 20년간 구글이 한국 사회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보여준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공을 들인 것은 동선에 대한 경험이었어요. 야외 전시였기 때문에 제약이 많았지만, 업적을 나열하는 패널형 전시는 피하고 싶었습니다. 생일 파티에서 ‘생일’에 의미를 두는 것은 결국 당사자와 가족입니다. 초대된 사람은 ‘파티’여야 해요. 사람들이 즐기고 몰입할 수 있는 요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최근에는 구글과 AI 프로덕트에 관한 전시를 진행했는데 그때 저는 소프트웨어 자체를 데모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그것이 바꿔낼 일상이 중요한 것이죠. 그래서 행사 현장에선 제미나이의 레시피로 만든 칵테일을 서빙하거나, 위스크의 합성 기술을 활용한 포토 부스 등을 구성했어요. 프로덕트는 밑에 깔고 그것이 만들어갈 미래의 일상을 보여준 것이죠.
아카이브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선혁 핵심은 관점입니다. 관점이 없다면 그것은 그냥 자료 더미일 뿐입니다. 아카이브를 보존하고 생산하고 축적하는 것과 아카이브를 경험하고 활용하는 것은 완전히 문법이 달라요. AI를 접목한 〈라이프〉지의 아카이브 플랫폼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 ‘〈라이프〉지니까 이렇게 아카이빙 자료를 보여주는구나’ 하고 수긍하게 됩니다. 여담으로 매거진 아카이브 프로젝트에서 가장 단순한 방식이 표지를 모아 보여주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런 건 아카이브를 활용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게시한 것에 불과하죠.
정욱 요즘에는 데이터의 지속 가능성에 관해서도 자주 생각합니다. 보통 CMS라고 부르는 시스템은 대부분 웹사이트용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다른 매체로 경험하게 하려면 아카이브를 위한 CMS도 공들여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최근 아카이브 프로젝트에서는 아예 아카이브 시스템까지 구축하려고 해요. 어디서든, 어떤 방식으로든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체계를 만들고 있는데 그 때문이라도 AI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는 것 같아요.


클라이언트 구글 코리아 사진 최요한
폴리네시아인의 길찾기
레벨나인은 평면적인 UI가 아닌 동적인 경험 자체를 설계합니다. 이때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정욱 아카이브 자료 자체와 사용자 경험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게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아카이브를 보유한 입장에선 사람들이 자료 하나하나를 눈여겨보고 이해하기를 원하죠. 하지만 정보가 많고 복잡도가 높아질수록 사용자 경험과 연결하기가 어려워져요. 두 목적 사이에 밸런스를 맞춰야 하는데 고정된 솔루션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매번 최선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판단해야 하죠.
상충하는 목적 사이에서 하나를 포기하는 건가요?
정욱 그럴 때도 있어요. 어떤 프로젝트는 사용성보다 프로젝트의 본래 목적성과 콘셉트가 더 중요하다고 하면 편의성을 일부 포기하기도 하는 것이죠.
선혁 혹은 그 반대일 때도 있어요. 아카이브의 오너십을 가진 분들은 이 자료를 공개하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해요. 자료의 가치를 너무 잘 알아서 생기는 오류입니다. 현실적으로 대중은 그렇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죠. 결국 사용자와 콘텐츠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 저희 역할입니다.
올해 서울디자인페스티벌(SDF) 아트 디렉터로 선정되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프로젝트를 전개해 나갈지 궁금합니다.
선혁 SDF가 올해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디자인 신의 진화와 변화에 관한 이야기도 전시장 내에 적극 반영할 예정이라고 전해 들었고요. 새로운 원년이라는 행사의 취지를 시각화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변화 자체를 표상하기보단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를 그려내고 싶었습니다. 급변하는 시대에 디자인계가 묘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요. 망망대해에서 길을 찾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폴리네시아인들은 수천 개의 섬을 돌아다니면서 자신만의 항법을 터득했다고 해요. 파도의 너울이나 새의 움직임 따위를 보고 길을 찾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각자의 방식으로 길을 찾는 디자이너의 모습을 담고 싶었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밝히긴 어렵지만 이것이 11월에 전시장 구석구석에서도 표현될 것 같아요.


정욱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니까 문득 떠올랐는데, 레벨나인이 whatreallymatter(wrm)와 함께 3년 동안 서베이 전시를 진행한 적이 있어요. 그때 wrm 고민경 기획자와 함께 살핀 자료 중 상당수가 월간 〈디자인〉의 과거 기사였죠. 그런데 재미있었던 것은 기사를 모아보니 묘한 기시감이 들더군요. 예컨대 컴퓨터가 막 도입되기 시작했을 때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느낀 위기감을 다룬 기사가 있어요. 그런데 이게 오늘날 AI 시대를 앞둔 디자이너의 심경과 너무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그런 것에서 오는 묘한 안도감 같은 게 있습니다.(웃음)
선혁 아주 놀랄 일은 아니구나 싶은 것이죠. 결국 과거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같아요. 언제나 돌파구는 있고, 우리는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을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