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장성호 감독: 스크린 위에 새로운 세상을 구현하다

장성호 감독·모팩스튜디오 대표

장성호 감독이 기획, 제작, 연출한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킹 오브 킹스>는 북미 시장에서 6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벌어들이며 한국 영화 사상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 큰 성공의 바탕에는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장성호 감독의 명확한 방향성이 있었다.

[Creator+] 장성호 감독: 스크린 위에 새로운 세상을 구현하다

editor’s note

한국 영화는 오래전부터 세계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예술성과 대중성까지 사로잡은 감독들과 그들의 영화는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마니아층을 형성했고, 뛰어난 실력을 갖춘 스태프들이 할리우드와 유럽에 진출하며 다양한 영화에 참여했죠. 얼마 전엔 오를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받는 쾌거까지 이뤘습니다. 이러한 성공에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에서 눈에 띄는 성과가 없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한국은 세계 애니메이션의 공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꽤 많은 해외 애니메이션 작업이 한국에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순수 국내 자본으로 제작한 한국 애니메이션은 나오기 힘들었고, 나와도 큰 흥행을 한 적이 없죠. 그런데 이 벽을 뚫은 작품이 등장했습니다. 장성호 감독이 연출한 <킹 오브 킹스(The King of Kings)>입니다. 북미 시장의 높은 평가와 인기에 힘입어 한국 시장에서도 130만 명이 넘는 관객 수를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죠. 애니메이션이 어느 때보다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는 지금, 장성호 감독을 만나 왜 애니메이션이어야 했는지, 작업은 어떻게 했는지를 들어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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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시장에서 6천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낸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 <킹 오브 킹스>의 기획, 제작, 연출을 맡은 장성호 감독

PLUS 1. 2천 년을 넘게 사랑받은 이야기의 힘

한국 누적 관객 수 130만 명을 바라보고 있어요. 이 역시 놀라운 성과인데요. 한국 시장에서도 성공할 거라 예상하셨나요?

처음부터 북미 시장을 타깃으로 기획해서 한국 시장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미국에서 반응이 괜찮다는 사실이 언론으로 보도되고 알려지면서 한국 관객들도 관심을 가진 것 같아요.

북미 시장은 영화인에게는 꿈인 곳이잖아요. 그렇게 큰 시장에서 성공할 거란 확신이 있으셨나요?

얼마만큼 성공할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실패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시장조사를 많이 해서 근거가 되는 데이터가 있었거든요.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북미 시장의 기독교 콘텐츠 시장 규모가 엄청 크고, 과거 기독교를 주제로 한 영화가 실패한 사례도 없더군요. 게다가 미국에서 열린 배급 시사(*극장주를 대상으로 하는 시사회)에서도 반응이 매우 좋았어요. 그때, 성공하겠다는 직감이 들었죠. 원래 극장 주 반응이 진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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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오브 킹스(The King of Kings)> 스틸컷
 몇천 년 전부터 내려와 전 세계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성경을 다룬다는 점이 부담스럽진 않으셨어요? 

모두가 아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든 영화와 장편 애니메이션은 없었어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아이가 봐도 재미있게 만들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였죠. 게다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장면은 아이가 보기에 어둡고 무섭잖아요. 제 할리우드 지인들이 그 장면을 어린이가 볼 수 있는 수위로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려운 도전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희 영화의 목표는 ‘아이들은 물론 비신자도 어렵지 않은 성경 이야기’를 만드는 게 되었습니다.

이야기와 컷을 재구성할 때도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 같아요.

같은 이야기도 누가,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지는 것처럼,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끝까지 흥미롭게 보게 만드는 방법에 대해 엄청 고민했죠. 그리고 95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예수 탄생부터 부활까지 담으려면 핵심만 골라서 잘 전달해야 했고요.

핵심이라면요?

우리 영화에서는 예수의 사랑이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를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등장인물인 윌터(찰스 디킨스의 아들)와 관객이 함께 그 사랑을 체험하고 느끼도록 만들려고 했죠.

영화는 액자식 구성을 통해 찰스 디킨스와 윌터를 예수가 살던 2천 년 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이죠.

아빠가 아들에게 신앙심을 갖고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 자체가 지극한 사랑의 표현 중 하나라고 생각했어요. 낭독회에 열정적이었던 찰스 디킨스가 자기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할 땐 얼마나 진심이었을까요? 그리고 아이들도 그 이야기에 푹 빠져 마치 자기가 그 세상에 들어간 것처럼 느꼈을 거고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타임워프처럼 찰스 디킨스와 월터를 그 시대로 들어가게 하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그리고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인 예수가 월터와 교감이 있다면 흥미롭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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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오브 킹스(The King of Kings)> 스틸컷
찰스 디킨스와 윌터의 사랑, 즉 부자간의 이해가 영화 스토리의 또 다른 중심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액자식 구성은 서브플롯도 제대로 작동해야 해요. 예수의 이야기로 신과 인간의 관계 회복을, 찰스 디킨스와 윌터의 이야기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회복을 다뤄 두 이야기의 맥락이 연결되도록 했어요. 덕분에 서브플롯이 겉돌지 않게 되었죠.

감독님이 <킹 오브 킹스>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은 어느 씬(scene)이었나요?

월터가 예수와 교감하는 모든 장면이요. 마구간에서 예수가 탄생하는 씬,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씬을 보면 월터와 예수가 서로 시선을 나눠요. 제일 신경 쓴 장면은 일명 ‘세례받는 씬’이라고 부르는, 영화 후반부에 예수가 물에 빠진 월터를 구하는 장면이었어요.

PLUS 2.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의 균형을 맞춘 프리 프로덕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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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플러스와 인터뷰 중인 장성호 감독
애니메이션에선 캐릭터의 생김새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의 생김새만으로 성격, 배경, 감정, 이야기가 다 전달되니까요.

캐릭터 디자인과 아트워크 작업에만 5년 정도 걸렸어요. 디즈니스럽게 디자인하되 아류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죠.

의외네요. 디즈니와 달라야 하는 게 아니라 그 스타일을 차용했다는 점이요.

많은 관객은 지난 90년 동안 디즈니가 구축한 그림체에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껴요. 생각해 보면, 디즈니도 엄청난 연구와 실험을 통해서 사람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룩(Look)을 만든 거거든요. 그걸 최대한 활용하자고 생각했죠.

영화 배경에 따라 캐릭터의 생김새가 다르더라고요.

찰스 디킨스가 활동하는 19세기 런던은 배경과 캐릭터를 보기 편안하게 디자인했고, 예수가 등장하는 2천 년 전 예루살렘의 인물들은 목각인형처럼 딱딱하고 각지게 디자인했습니다. 예수의 직업이 목수였다는 사실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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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오브 킹스(The King of Kings)> 스틸컷
신적인 존재를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구현하는 것 역시 어려웠을 것 같아요.

맞아요. 함부로 묘사하기 어려운 인물이죠. 저희가 집중한 건, 분위기였어요. 누구라도 다 품어 줄 것 같은 포용력과 함께 당당함도 느껴지는 인상이었으면 했어요. 특히 눈빛이 중요했죠. 예수가 관객을 바라볼 때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인상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킹 오브 킹스>에서 새로운 촬영 기법을 사용했다고도 들었어요.

애니메이션이지만 실사 영화처럼 조명을 치고 촬영하고 편집했어요. 실사 영화 촬영감독(김우형 촬영감독)이 실제로 촬영했고요. 시대에 따라 렌즈도 다르게 사용했어요. 19세기 런던 시대는 표준 렌즈를 사용해서 심도가 깊어요. 반대로 성경 이야기가 전개되는 예루살렘 시대는 아나모픽 렌즈로 촬영해서 예수에게 집중할 수 있게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배경은 포커스가 나가도록 심도를 얕게 설정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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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에게 초점을 맞추고 주변은 심도를 얕게 하여 주목도를 높인 걸 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도 실제 카메라로 촬영할 수 있는 거군요.

언리얼 게임을 제작하는 환경을 구축해서 실사 영화처럼 실시간으로 촬영할 수 있게 조명, 카메라 등을 세팅해서 작업했죠. 특히 LED 액정에 컨트롤러를 붙인 버추얼 카메라를 개발해서 촬영 감독이 직접 카메라를 조정하면서 촬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버추얼 프로덕션 환경은 저희가 국내에선 최초이고, 세계적으론 디즈니를 이어 두 번째라고 알고 있어요. 장편 애니메이션으로는 <킹 오브 킹스>가 최초이고요.

버추얼 촬영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재촬영이 무한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감독이 원하는 장면을 다 찍어볼 수 있어요. 또, 바로 편집해서 완성된 장면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죠. 아무리 베테랑 감독이라고 해도 영화 현장에선 확신할 수 없거든요. 과연 이 장면이 내가 그린대로 나올 것인가, 컷과 씬들이 잘 연결될 것인가 등등. 어떻게 보면 버추얼 촬영은 감독에게 자기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기법이죠.

영화 캐스팅도 화제였어요. 해외는 물론 국내까지 내로라하는 배우들에게 목소리 연기를 디렉팅하면서 중요하게 요청한 내용이 있으셨나요?

애니메이션이지만 실사 영화처럼 연출하고 편집했기 때문에 연기에서도 애니메이션적인 과장을 최대한 자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배우들에게 억양이 세지 않게 생활 연기하듯이 해달라고 부탁했죠. 미국에선 연기에 대한 반응이 매우 좋았어요. 예수 역을 맡은 오스카 아이작(Óscar Isaac)이 현대적인 언어를 사용하거든요. 성경을 읽어보면 아실 거예요. 마치 우리나라 사극처럼 고어를 사용하고 뉘앙스가 고풍스럽거든요. 하지만 <킹 오브 킹스>는 아이들과 비신자들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사의 단어들은 현대적으로 바꿨죠.

애니메이션에서는 시대 배경을 구현하는 것도 중요한데요. 문제는 영화에 등장하는 장소(19세기 런던과 2000년 전의 예루살렘)를 직접 답사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2000년 전 예루살렘 같은 경우는 종교화를 참고하는 등 신경을 많이 써서 실제로 성지 순례를 가본 사람들이 어디인지 알아볼 정도로, 사실적으로 구현했죠. 그리고 성서 고고학을 전공한 임미영 박사에게 환경뿐만 아니라 소품, 의상, 장신구 하나까지 다 확인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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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오브 킹스(The King of Kings)> 스틸컷
개인적으로 자연 묘사가 인상적이었어요. 하늘의 구름, 노을의 색감, 태풍이 치는 갈릴리 호수 등 실제 같아서 더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어요. 또, 아름다웠고요.

환경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게다가 30년 넘게 영화 시각효과를 했던 경험이 있으니, 자연을 사실적으로 구현하는 건 충분히 잘할 수 있으니까요.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한 거죠.

PLUS 3. 영화 특수효과 1세대가 되다

어린아이와 비신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고, 실사 영화와 애니메이션 사이의 중간 지점을 찾고, 과거와 현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하고… 감독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킹 오브 킹스>의 제작 과정의 대부분은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영화 예고편을 450편 넘게 만든 것이 큰 공부가 되었어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만 편집해서 표현한 경험이 쌓였다고 할까요? 게다가 즉각적인 관객 반응과 피드백을 확인해 볼 수 있었으니까요.

원래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영화, 그것도 시각효과(VFX) 분야를 하시게 되셨나요?

어릴 때부터 영화랑 애니메이션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아서 방향을 시각 디자인으로 바꿨죠. 그 뒤에 컴퓨터 그래픽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계로 온 것 같아요. 당시에는 광고 분야에 많이 진출했는데 저는 커머셜보단 ‘이야기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전달할 것인가?’, ‘이야기를 전달하는데, 시각 요소가 어떻게 활용되는가?’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그래서 영화계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후 300여 편이 넘는 영화와 드라마에 참여하셨는데요. 실제로 구현할 수 없는 세계를 만드시면서 지키신 철학이 있으셨나요?

과시하거나 오버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제가 VFX 작업하면서 들었던 제일 기분 좋은 칭찬이 ‘뭐가 CG예요?’라는 질문이었어요. 관객들이 어디에 CG를 사용했는지 모르는 것. 그게 잘한 CG라고 생각해요. 시각효과라는 영역이 세상에 없는 걸 만드는 작업이다 보니까 작품에서 티를 내고 싶거든요.

예전 인터뷰 기사에서 ‘감독님은 오퍼레이터가 아니라 슈퍼바이저다.’라고 평한 문장이 기억에 남았어요. 영화를 만드는 수많은 스태프 중 한 명이면서도 동시에 주체적인 창작자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참여하면서 최고 레벨의 스태프들과 일하면 완성도의 90%는 보장받는다는 걸 배웠어요. 왜냐하면 이들은 전체적인 맥락을 잘 파악하거든요. 촬영, 조명, 편집, 음향, 배우 등 월등한 수준에 이른 사람들은 감독보다 그 영화를 더 이해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감독이 놓치는 부분 혹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채워주며 완성도를 높여주죠.

음… 그렇다면 감독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스태프가 채우지 못한, 감독만이 할 수 있는 10% 영역이 있어요. 저는 그것이 일관성이라고 생각해요.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어느 관점으로 가야 하는가?’를 잊지 않고 스태프에게 전달하고 극을 이끌어가는 사람. 쉽게 설명하면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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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플러스와 인터뷰 중인 장성호 감독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과 부딪치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런 경우엔 어떻게 하셨나요?

그런 경우 많죠. 하하. 조율할 수 있을 때까진 하지만, 안되는 경우엔 어쩔 수 없죠. 결국, 영화란 감독의 이야기인데요. 감독이 요구하는 대로 해야죠.

디자이너와 창작자는 맥락을 잘 파악해야 해요. 그래야 클라이언트가 진짜로 원하는 방향을 찾아서 작업할 수 있거든요.

디자인도 클라이언트와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서 감독님의 방법을 여쭤보고 싶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디자이너인 크리스 뱅글(BMW 수석 디자이너)는 “디자이너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100% 수용하고 만족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최고의 수준이어야 한다.”라고 했어요. 이 말을 다시 해석하면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수용했다는 핑계로 낮은 수준의 결과물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는 뜻이죠. 이 말을 들었을 때, 머리를 띵하고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저도 과거에 수많은 클라이언트를 경험해 봤지만,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통 우리는 클라이언트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만 보게 되는 경우가 많죠. 예를 들어 클라이언트가 2시를 가리킨다면 실제로는 그가 원하는 건 4시일 수 있어요. 자기가 원하는 방향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디자이너와 창작자는 맥락을 잘 파악해야 해요. 그래야 클라이언트가 진짜로 원하는 방향을 찾아서 작업할 수 있거든요.

PLUS 4. 기술을 무기로 하는 창작자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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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호 감독이 세운 VFX 전문, 모팩스튜디오는 여전히 국내외 영화와 드라마의 VFX를 담당하고 있다.
30여 년 동안 슈퍼바이저이자 창작자로서 깨달은 바가 있다면요?

저는 집단지성을 믿는 편이에요. 영화, 문학, 음악 다양한 분야에서 당대 흥행하고 대중이 사랑했던 작품에는 마스터피스가 되는 이유를 충분히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개인 간의 수준과 안목은 편차가 크지만, 집단 지성은 작동하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종종 전문가의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대중에게 선택받은 작품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그 작품들이 훌륭했다는 걸 알게 돼요. 그렇기에 ‘내가 전문가니까 더 잘 안다.’라는 태도와 생각은 오만일 수 있어요.

종종 자만심에 그릇된 판단을 하는 경우가 많죠.

본인의 역량이 뛰어날수록 다른 것도 수용할 줄 아는 유연함과 포용력이 필요해요. 그래야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어요. 특정 스킬에만 익숙한 사람은 그게 깨지는 순간, 결과물의 수준까지 틀어지거든요. 그러니 취향의 차이와 수준의 차이를 헷갈리면 안 됩니다. 하지만 취향이 다른 걸 마치 수준이 떨어지는 걸로 평가하는 경우가 있죠.

창작자에게 특히 필요한 태도인 것 같아요.

분야에 상관없이 아티스트라면 메타인지를 잘 해야 합니다. 자기에게 관대하고 남에겐 엄격한 사람은 발전할 수 없어요. 반대로 남에게 관대하고 자기 자신에겐 혹독할 정도로 엄격해야 해요. 조금이라도 표절이 의심되면 아무리 좋았어도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하고, 주변에서 엄청난 칭찬을 해도 절대 흔들리면 안 돼요. 그 성과가 오롯이 자기만의 것인 줄 착각하고 안주하는 순간, 자기 복제를 하고 성장을 멈추게 돼요.

이미 높은 곳까지 도달했음에도 끊임없이 도전하여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탐구하시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모든 아티스트는 기술을 기반으로 자기만의 예술을 하죠. 연주자라면 악기를 다루는 능력과 기술을 갖춰야 하고, 스포츠 선수도 엄청난 연습을 해서 자기만의 기술을 가지고 경기에 나가죠. 저에게는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기술이 제 무기였기에 계속 공부하고 새로운 기술이 있으면 적용하려고 했어요. 아티스트라면 자기 분야의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단, 기술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점. 아셨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기술의 발전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빠릅니다.

열심히 잘 따라가야 해요. 멈추는 순간 도태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모팩스튜디오)도 새로운 기술을, R&D를 하고 있어요. 최근에는 AI를 접목한 파이프라인을 연구개발하고 있습니다. 아마 곧 적용해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너무 빠른 발전 속도에 두려움을 느끼는 창작자들도 있어요.

보통 기술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창작자, 디자이너들은 툴을 바꾸는 걸 어려워합니다. 물론 익숙한 툴이 더 좋죠. 하지만 두려워하지 말고, 필요하면 어떠한 툴이든지 도구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AI도 유용한 도구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전문가라면 이 도구를 더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하고요. 본인 역량과 감각이 얼마나 좋으냐에 따라 툴의 효율과 확장성을 더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특히 AI처럼 일반인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가 나오게 되는 시대에는 전문가는 더 월등한 결과를 훨씬 빠르고, 효율적으로 낼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AI를 더 크리에이티브한 정보로 학습시켜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PLUS LIST

장성호 감독에게 영향을 준 영화 3

– 데이비드 린치, <엘리펀트 맨(The Elephant Man)>(1980)

“중학교 때 이 영화를 보고 영화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스탠리 큐브릭,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2001: A Space Odyssey)>(1968)

영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한 영화예요.

– 구로사와 아키라, <7인의 사무라이(Seven Samurai.)>(1954)

제가 지향하고 추구할 영화의 방향성을 확인한 영화였어요. 좋아하는 리스트를 뽑으라면 수백 편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술영화를 사랑하지만, 제가 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에요. 그보다 스토리와 플롯 기반의 영화를 더 잘할 수 있고, 발전시키면 더 해낼 수 있어요.

TIPPING POINT

인터뷰를 마치면서 스쳐 지나가는 말로 애니메이션 장르가 쉽지 않은데, 왜 도전했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장성호 감독은 그런 편견을 깨야 한다고 답했죠. 오랜 시간 영화계에 있으면서 사극은 안 된다, 좀비물은 한국에서 불가능하다는 등 불문율에 대해서 많이 들었지만, 결국 그를 깨는 작품이 등장하고 더 다양하게 발전한 걸 봤다면서요. 그런 의미에서 <킹 오브 킹스>는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은 성공하기 어렵다’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작품이자, 앞으로의 한국 애니메이션 다양성의 시초가 될 작품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쩌면 <킹 오브 킹스>의 성공은 철저한 기획보다 장성호 감독의 유연하고 긍정적인 도전 정신으로 이뤄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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