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수장고의 새로운 문법, V&A East Storehouse

보관이 전시가 되는 순간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는 기존 뮤지엄의 질서를 뒤집는다. 25만 점의 오브젝트와 방대한 자료를 감추지 않고 공개하며, 수집·보존·연구를 전시와 동등한 층위로 끌어올린 혁신적 모델이다.

열린 수장고의 새로운 문법, V&A East Storehouse

뮤지엄의 전시 공간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소장품 대부분은 어둡고 닫힌 수장고에 머물며, 그 존재는 주로 감춰져 있다. 지난 5월 런던 동부에 위치한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파크에 문을 연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V&A East Storehouse)는 이러한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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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R_V&A East Storehouse ©Hufton+C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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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R_V&A East Storehouse ©Hufton+Crow

이곳은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의 방대한 수장고를 대중에게 활짝 열어젖힌 공간이다. 25만 점의 오브젝트와 35만 권의 서적, 1,000개에 달하는 아카이브가 보관된 건물의 핵심은 보관 그 자체를 전시로 전환하는 뮤지엄 모델이다. 이곳에서 ‘전시된 소수와 숨겨진 다수’이라는 뮤지엄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람객은 소장 중인 상태를 고스란히 경험하고, 물건들은 수장고 안에서 새로운 시각적·개념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는 투명성과 접근성을 넘어, 박물관의 본질적 기능인 수집·보존·연구를 전시라는 외피와 동일한 층위로 끌어올리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는 박물관 운영의 백스테이지를 프런트 스테이지로 전환시키는 혁신성으로 또 다른 비전을 꿈꾼다.

열린 수장고의 건축적 문법

이 같은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건축적 전환에 있다. 설계를 맡은 DS+R(Diller Scofidio + Renfro)은 2012 런던 올림픽 방송센터로 쓰였던 대형 산업적 건축물인 히어 이스트(Here East)를 개조했다. 외부 파사드는 거의 그대로 두고, 내부를 과감히 비워내 새로운 위계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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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R_V&A East Storehouse_©Hufton+C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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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부는 ‘웨스턴 컬렉션 홀(Weston Collections Hall)’이라는 20m 높이의 보이드로 열린다. 이 공간은 전통적 수장고의 어두우면서도 폐쇄적인 이미지를 탈피해, 빛과 시야를 관통할 수 있는 개방적 구조다. 소장품을 받치는 수많은 선반들은 단순히 보관을 위한 선반을 넘어 전시 장치로 기능하며, 유리 바닥과 메시 데크는 관람객이 위, 아래, 사방으로 소장품을 바라보게 한다. 관람객은 공간의 중앙 플랫폼에서 사방을 둘러보고, 다리를 건너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외곽 수장고 곳곳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이동 동선 자체는 관람 경험이자 건축적 내러티브다. 산업적인 외피와 내부의 극적인 보이드가 만나며, 건물은 단순한 재생 건축을 넘어 수장의 전시를 구현하는 새로운 박물관 건축의 유형을 제시한다.

과잉과 응시 사이, 집단적 풍경과 개인의 시선

이곳의 가장 혁신적인 제도 중 하나는 온라인으로 원하는 오브젝트 및 작품을 예약하고,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서비스 ‘Order an Object’다. 고대 이집트 신발부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카우프만 오피스, 멤피스 그룹 가구, 한복, 일본 다도구까지 그 범위는 전 지구적이다. 이 서비스의 의의는 기존 뮤지엄의 관람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점이다. 관람자는 더 이상 큐레이터가 선별한 전시만을 수동적으로 관람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능동적으로 소장품을 선택하고, 대면할 수 있다. 웹사이트에서 원하는 작품을 검색하고 예약하면, 전문 스태프가 그 작품을 꺼내 자세히 살펴볼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동시에 열리는 100여 개의 미니 전시는 ‘Collecting Stories’, ‘Sourcebook for Design’, ‘The Working Museum’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통해 수집과 보존, 연구와 창의적 재해석의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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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R_V&A East Storehouse_©Hufton+Crow

무엇보다도 이곳의 진정한 매력은 수장품의 양적 압도감에만 있지 않다. 스토어하우스는 관람의 리듬을 조절하며, 곳곳에서 관람객에게 멈춤과 응시의 순간을 요구한다. 피카소가 발레 뤼스를 위해 제작한 폭 11미터의 무대막 르 트랑 블루(Le Train Bleu)는 대표적 사례다. 방대한 수장 전시의 맥락 속에서도 이 작품은 별도의 섹션에서 차분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놓이며, 관람객이 한 점의 작업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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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1924 front stage cloth for the Ballets Russes’ production, Le Train Bleu, designed by Pablo Picasso at V&A East Storehouse. © David Parry, PA Media Assign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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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R_V&A East Storehouse_©Hufton+Crow

이러한 응시의 지점은 다른 곳에서도 반복된다. 예컨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1930년대 카우프만 오피스는 미국 근대 건축사의 한 장면을 통째로 옮겨온 듯 재현돼 관람자를 근대 디자인의 공간적 질서 속에 머물게 한다. 이외에 1926년 마가레테 슈퇴틀리호츠키가 설계한 프랑크푸르트 키친(Frankfurt Kitchen) 역시 근대 주거문화와 성 역할 변화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사례로, 단순한 부엌이 아니라 사회적 전환의 압축된 공간으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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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R_V&A East Storehouse_©Hufton+C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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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come area at V&A East Storehouse. © Kemka Ajoku for V&A

스토어하우스에는 특정 지역이나 공동체를 기록하기 위한 프로젝트성 전시도 마련돼 있다. 이는 개별 오브젝트가 아니라 장소와 맥락을 기억하는 방식을 보여주며, 관람객을 자료와 아카이브 너머의 사회적 풍경으로 이끈다.

지역의 기억에서 세계의 울림으로

스토어하우스의 주된 전시 전략 중 하나는 글로벌 컬렉션과 로컬의 기억을 병치하며, 서로 다른 층위의 이야기들을 교차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해크니 출신 디자이너 로빈 린치가 지역 청년들과 함께 디자인한 직원 유니폼, 19세기 말 스트랫퍼드 음악홀의 프로그램, 해크니 소녀가 남긴 17세기 자수 견본 같은 전시는 지역적 삶의 흔적을 소환한다. 이는 프랑스, 인도, 한국, 일본, 미국을 망라하는 세계적 소장품과 나란히 놓이며, 뮤지엄이 세계의 중심을 향해 확장하면서도 특정 지역과 공동체의 서사를 놓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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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view of the David Bowie Centre at V&A East Storehouse. © David Parry, PA Media Assign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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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view of the David Bowie Centre. © David Parry, PA Media Assignments

이러한 흐름 속에서 최근 스토어하우스 내부에 개관한 데이비드 보위 센터(David Bowie Centre)는 지역성과 세계적 아카이브가 만나는 결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런던 브릭스턴 출신이자 세계적인 문화 아이콘인 보위의 아카이브 9만여 점이 이곳에 영구 보금자리를 두게 되면서 누구나 무료로, 사전 예약을 통해 원하는 오브젝트를 직접 열람할 수 있다. 미공개 뮤지컬 더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의 자료, 지기 스타더스트(Ziggy Stardust) 시기의 기타, 알렉산더 맥퀸과 협업한 1997년 생일 공연 의상, 자필 가사와 스케치 등 보위의 아카이브는 단순한 음악사의 기록을 넘어 디자인, 패션, 대중문화 전반의 지형을 다시 읽게 한다.

공개된 수장고 그리고 뮤지엄의 미래

16세기 유럽의 귀족과 학자들이 진귀한 물건을 모아 만든 호기심 캐비닛(Wunderkammer)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지적 욕망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의 권력자와 학문 공동체에 국한된 사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는 이 오래된 모델을 선택하고 이를 전복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호기심 캐비닛으로 재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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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R_V&A East Storehouse_©Hufton+C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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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R_V&A East Storehouse_©Hufton+Crow

수장고에 잠겨 있던 수많은 대상이 대중에게 공개되는 순간, 수장품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다수가 아니라, 관람객과 직접 관계 맺는 존재가 되며, 뮤지엄은 지식의 보고를 넘어 사회적 상상력과 창의적 실험의 장으로 확장된다. 이는 곧 뮤지엄이 과거를 보존하는 기관을 넘어, 동시대와 미래의 문화적 가능성을 발현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시와 소장을 가르는 오래된 이분법을 재고하는 일이다. 기존의 뮤지엄은 전시장에 놓인 일부의 오브젝트를 통해 뮤지엄의 얼굴을 구성해왔고, 나머지 다수는 수장고에 머물러 있었다. 전시는 보이는 소수, 소장은 숨겨진 다수라는 구조가 관람 경험을 규정해온 셈이다. 스토어하우스는 이 불균형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해체한다. 보관은 전시의 이면이 아닌 해석의 주체가 되고, 전시는 소장을 부각시키는 또 하나의 장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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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R_V&A East Storehouse_©Hufton+Crow_18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는 이 질문들에 대한 완결된 답을 내놓기 보다, 그 자체로 질문을 위한 무대를 제공한다. 중요한 것은 이 사례를 통해 우리가 어떤 질문을 이어가고, 또 다른 방식으로 실천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뮤지엄은 단일한 답을 제시하는 기관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을 생성하고 갱신하는 장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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