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이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제1회 코펜하겐 건축 비엔날레

가속 시대, 건축이 제안하는 감속의 실천

전 세계 건설 산업이 초래한 환경 위기 속에서, 제1회 코펜하겐 건축 비엔날레가 ‘느림’과 ‘성찰’을 화두로 등장했다. 빠른 생산 중심의 기존 비엔날레와 달리, 건축이 기후·자원·사회 문제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를 근본적으로 되묻는 새로운 담론의 장이다.

느림이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제1회 코펜하겐 건축 비엔날레

건설 산업이 전 세계 CO₂ 배출의 37%, 생물 다양성 손실의 30%, 폐기물의 30%를 책임지고 있는 현실 앞에서, 덴마크 코펜하겐에 새로운 건축 담론의 장이 문을 열었다. 지난 9월 18일부터 10월 19일까지 한 달간 열린 제1회 코펜하겐 건축 비엔날레(Copenhagen Architecture Biennial)는 빠른 생산과 경쟁 중심의 비엔날레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향점을 선언하며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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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코펜하겐 건축 비엔날레 오프닝 현장 사진 Maja Flink ⓒCopenhagen Architecture Forum

코펜하겐 건축 포럼(Copenhagen Architecture Forum, 이하 CAFx)이 주관한 이번 비엔날레는 이전의 연례 페스티벌 형식에서 벗어나 건축 탐구를 위한 보다 확장된 플랫폼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CAFx의 CEO이자 2023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덴마크관 큐레이터를 맡았던 조세핀 미쇼(Josephine Michau)가 방향타를 잡았다. 그가 강조한 두 개의 키워드는 ‘느림’과 ‘성찰’이다. “기후 변화, 생물 다양성 감소, 사회 분절, 자원 희소성이라는 복합 위기 앞에서 건축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라는 절박한 질문을 향한 응답에서 출범한 비엔날레는 건축 생산의 전제 자체를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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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날레 감독, 조세핀 미쇼 사진 Sabina Hodovic

‘슬로 다운(Slow Down)’이라는 주제는 현대 생활의 급속한 속도와 그것이 건축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재고하도록 초대했다. 전례 없는 인구 증가, 에너지 사용, 자원 소비로 특징지어지는 대가속(Great Acceleration) 시대에 직면한 지금, 비엔날레는 건축이 어떻게 ‘대감속(Great Deceleration)’에 기여할 수 있는지 탐구할 것을 제안한다. 지속가능성과 장수성, 그리고 우리 주변 환경과의 신중한 관계 맺기를 촉진하는 공간을 상상하는 것이 그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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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코펜하겐 건축 비엔날레 오프닝 현장 사진 Maja Flink ⓒCopenhagen Architecture Forum

비엔날레는 9월 18일, 상징적인 토르발센 미술관(Thorvaldsens Museum)에서 막을 올렸다. 250개 이상의 프로그램 속에서 덴마크를 대표하는 건축사무소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어뎁트(Adept)는 ‘빠른 도시/느린 건축(Fast City/Slow Architecture)’ 이벤트를, 렌데이저(Lendager)는 ‘리빙 랩(Living Lab)’ 이벤트를 선보였다. 또한 아틀리에 보우-와우(Atelier Bow-Wow), 렘 콜하스(Rem Koolhaas) 등 국제적 건축가들의 전시와 함께, 잉슈에 첸(Ying-Hsueh Chen)의 소닉 아키텍처, 일본 철학자 사이토 코헤이(Kohei Saito)의 이벤트도 마련됐다. 평소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는 건물 내부를 방문할 수 있는 오픈 하우스 코펜하겐(Open House Copenhagen) 프로그램도 관람객들을 맞았다.

느림의 실천을 보여주는 두 개의 파빌리온

올해 초 공개 공모를 통해 선정된 두 개의 슬로 파빌리온이 코펜하겐 문화지구에 위치한 쇠렌 키에르케고르 광장(Søren Kierkegaard Plads)과 가멜 스트란(Gammel Strand)에 설치됐다. ‘반 어게인(Barn Again)’과 ‘인사이드 아웃, 다운사이드 업(Inside Out, Downside Up)’은 재료 재사용을 혁신적으로 재해석하고, 건설 산업의 감속이 어떻게 미학적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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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 Svilans & THISS STUDIO 사진 Maja Flink ⓒCopenhagen Architecture Forum

가멜 스트란에 설치된 ‘반 어게인’은 건축 디자이너 톰 스빌란스(Tom Svilans), 영국 기반의 THISS 스튜디오, 엔지니어링 회사 볼링거+그로만(Bollinger+Grohmann), 덴마크 목공 업체 빈터 A/S(Winther A/S)의 협업 프로젝트다. 이들은 사용하지 않던 구조물에서 회수한 목재를 사용해 전통적인 노르웨이 곡물창고를 재해석했다. 수작업과 기계 가공 기법을 겹겹이 쌓아 올리며, 도시 속에서 잠시 멈춰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면서, 정밀하고 표현력 있는 설계를 통해 오래된 재료의 생애 주기를 연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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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aatto Morsbøl 사진 Maja Flink ⓒCopenhagen Architecture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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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렌 키에르케고르 광장의 ‘인사이드 아웃, 다운사이드 업’은 신진 듀오 슬라토 모르스뵐(Slaatto Morsbøl)이 발견하고 재사용한 요소들을 감각적 참여와 사색을 유도하는 파빌리온으로 변형시킨 작업이다. 반으로 자른 환기 파이프, 노출된 구멍 뚫린 벽돌, 재생 목재, 갈대 지붕이 촉각적 구조를 형성하며 전통적인 재료 위계를 뒤집었다. 단순한 제스처와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현대 건설의 속도와 추상성에 대한 물리적이고 정서적인 대위법으로서 느림을 되찾았다.

두 모듈형 파빌리온은 공공 프로그램의 거점으로 기능하며 지속가능성과 순환 설계의 원칙을 구현했다. 이는 리발루(Revalu), 드레이어스 재단(Dreyers Foundation), 부로 해폴드(Buro Happold)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재활용, 재생 가능, 재사용 가능한 재료로 건설돼, 제로 웨이스트와 장기적 생태 영향에 대한 비엔날레의 약속을 반영했다. 재사용 자재만을 활용하고 과잉 생산을 피하며, 행사 후에는 완전히 해체돼 다시 재사용된다는 점에서 ‘흔적을 남기지 않는(Leave No Trace) 생산’이라는 대안적 건축 모델을 실제로 시연했다.

국경을 넘는 초학제적 탐구 전시

파빌리온 외에도 비엔날레 기간 내내 ‘슬로 다운(Slow Down)’이라는 제목의 그룹 전시가 덴마크와 스웨덴의 지리적 경계를 잇는 두 장소에서 열렸다. 코펜하겐의 할름토르베트 27번지(Halmtorvet 27)와 말뫼의 폼/디자인 센터(Form/Design Center)에서 진행된 전시는 예술과 건축의 교차점에서 빠른 속도의 현 상태에 도전하는 초학제적 기여를 선보이며,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른 미래에 대한 열망을 물리적 형태로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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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ow Down〉Exhibition 사진 Maja Flink ⓒCopenhagen Architecture Forum

전시는 속도에 지나치게 묶여 있는 문화적 상상력을 위한 새로운 서사와 개념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충격과 급증, 마찰과 광란, 피로와 소용돌이 같은 개념들을 재검토하며, 관람객들은 다크 매터 랩스(Dark Matter Labs), 스튜디오 타이드랜드(Studio Tideland)와 엠마 리스회이(Emma Rishøj), 센트랄라(CENTRALA) 등의 참여자들이 테마를 다루는 작업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다.

새로운 입법을 향한 전문가 포럼

이틀간 진행된 전문가 심포지엄 ‘어셈블!(Assemble!)’은 오늘날 건설 부문의 구조적 도전과제, 그리고 미래로 스며들 수 있는 새로운 기회의 틈새를 탐구했다. 심포지엄은 건축가, 도시 계획가, 정책결정자 및 기타 이해관계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더 느리고 지속 가능한 건축 실천을 구현하기 위한 전략을 논의하고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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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enhagen Architecture Forum

SCAPE의 창립자 케이트 오르프(Kate Orff), 다크 매터 랩스의 창립자 인디 조하르(Indy Johar), 렌데이저의 창립자 안데르스 렌데이저(Anders Lendager) 등의 연사들이 새로운 입법을 제안하고, 미래지향적 아이디어들이 이미 건설됐거나 계획된 프로젝트에서 어떻게 형태를 갖추고 있는지 논의하고 소개했다. 프로그램에는 쇠렌 필만(필만 아키텍츠), 단 스투베르고르(Cobe), 리케 율 그램(Schønherr) 등이 참여하는 패널 토론과 모범 사례 연구도 포함됐다.

행사 이후를 전제하는 플랫폼, 비엔날레

CAFx는 단순히 행사를 여는 조직이 아니다. 건축이 만들어낸 전 지구적 문제들을 실제 작동하는 해결책으로 바꾸려는 공공 플랫폼이다. 이들은 ‘행사로 끝내지 않기’를 핵심 원칙으로 삼는다. 비엔날레에서 제안된 아이디어들을 법과 정책으로 발전시켜 지속적으로 실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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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enhagen Architecture Forum

또한, 비엔날레는 코펜하겐이라는 도시의 도시적·사회적 조직에 깊이 뿌리내린 운영을 지향한다. 전 세계가 당면한 문제들을 로컬 렌즈, 즉 코펜하겐의 커뮤니티와 문화, 재료를 통해 다시 해석해 현장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덴마크의 수평적 위계와 로컬 접점의 용이성이라는 행정적 특성은 제안이 실질적인 제도로 연결될 수 있는 경로를 확보하는 실행 가속 장치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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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enhagen Architecture Forum

CAFx는 건축을 문화적 힘으로 보고, 시민부터 정책 결정자, 금융·법률 전문가, 심리학·사회학·인류학 연구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건축 논의와 실천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구조를 만들었다. 아이디어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법과 제도 설계까지 연결해 변화를 돕는 구체적인 제안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조세핀 미쇼는 명확한 목표를 제시했다. 건설 산업을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작동하도록 바꾸는 것. 제1회 코펜하겐 건축 비엔날레는 이 거대한 변화의 시작점에서, 사회와 환경을 만드는 건축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며, 말이 아닌 실제로 작동하는 틀을 만들겠다는 선언과 함께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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