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건축을 기억하는 법 〈힐튼서울 자서전〉

1983년 완공 이후 40년, 힐튼서울의 탄생부터 해체까지를 기록하는 전시

한국 현대건축의 대표작 힐튼서울을 조명하는 전시 〈힐튼서울 자서전〉이 9월 25일부터 회현동 피크닉에서 열리고 있다.

사라지는 건축을 기억하는 법 〈힐튼서울 자서전〉

남산 자락에는 서울의 시간을 품은 건축들이 있다. 근현대 도시의 형성과 함께 성장하며, 이곳의 기억을 간직해온 장소들. 그 중심에 힐튼서울이 있었다. 1983년 완공 이후 40년 동안 서울역과 남산을 잇는 언덕에서 도시의 풍경을 지켜왔지만, 팬데믹으로 인한 영업 부진과 양동지구 재개발 계획 속에 2022년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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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튼서울 자서전>이 열리고 있는 회현동 피크닉의 파사드. 이미지 제공: 피크닉

지금은 철거가 진행 중인 건물과 인접한 회현동 피크닉에서 마지막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다. 힐튼서울의 생애를 회고하는 전시 〈힐튼서울 자서전〉은 건축의 탄생부터 해체,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되짚는다. 공동체와 긴밀히 맞닿아 있던 장소의 역사를 다시 바라본다.


건축의 생애를 말하는 방식

1983년 남산과 서울역 사이, 도시의 중심에서 태어난 힐튼서울은 건축가 김종성의 설계에 대우그룹과 힐튼 인터내셔널의 협력이 더해져 완성됐다. 국제도시로 도약하던 서울의 시대적 욕망이 반영된 건축이었다. 높이 18m에 이르는 아트리움과 남산을 감싸듯 구성한 외관, 견고한 대리석과 목재의 내장재는 당시 서울이 꿈꾸던 ‘세계 속의 도시’를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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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전시장 입구. 이미지 제공: 피크닉

1980년대 중반 IMF·세계은행 연차총회, 아시안게임, 서울올림픽 등 국제 행사의 주요 회의와 연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레스토랑 오랑제리(Orangerie), 일폰테(Il Ponte), 시즌즈(Seasons)는 서구적 식문화를 소개하며 새로운 도시 문화를 이끌었다. 전시는 40여 년 동안 축적된 힐튼서울의 기억을 회고록처럼 서술하며, 숙박시설을 넘어 하나의 시대를 상징했던 공간의 목소리를 대신 전한다.

사라짐을 기록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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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그룹 테크캡슐이 영상으로 기록한 힐튼서울 철거 현장. 이미지 제공: 피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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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우는 힐튼서울 철거 현장에서 나온 자재를 재구성해 새로운 조형물을 완성했다. 이미지 제공: 피크닉

〈힐튼서울 자서전〉은 건축의 외형보다 그것이 사람과 맺은 관계에 주목한다. 건축은 지어진 순간으로 완결되지 않는다. 사용되고 기억될 때 비로소 생애를 갖는다. 첫 장 ‘사라짐, 2025’에서는 철거 현장을 기록한 사진과 영상, 회수된 자재, 3D 스캔 등 디지털 자료가 사라진 건축의 잔상을 불러낸다. 무너지는 장면은 상실의 서사가 아니라, 그동안 쌓여 있던 시간과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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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포착한 힐튼서울의 순간들. 이미지 제공: 피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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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튼서울 아카이브 속 장면들. 무수한 도면과 디테일을 통해 김종성 건축가의 치밀한 설계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미지 제공: 피크닉

이어지는 ‘기억과 기록, 1977–2022’는 힐튼서울의 설계부터 운영, 철거 직전까지의 시간을 아카이브로 엮는다. 최초의 설계 도면, 관계자 서신, 운영 시기의 사진과 문서, 그리고 해체 직전 최용준이 담은 장면들이 한 건축의 탄생과 종언을 교차해 보여준다. 여기에 노송희, 백윤석, 그래픽캐뷰러리 등 동시대 작가들이 기록을 다시 해석하며, 힐튼서울의 생애는 하나의 유기적 서사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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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캐뷰러리(곽민구, 이슬아)는 힐튼서울 1430호에 머물며 사라질 공간의 기억과 정서를 그래픽과 회화로 기록했다. 이미지 제공: 피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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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기억과 기록, 1977-2022’ 백윤석. 이미지 제공: 피크닉

전문가뿐 아니라 호텔을 운영하던 직원, 오랫동안 공간을 이용해 온 시민의 목소리도 함께 담겼다. 건축을 ‘사용하고 기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공간의 역사 속에 새겨진다. 사라지는 건축을 애도하며, 남겨진 흔적이 어떻게 공동의 기억으로 이어지는지 성찰하게 한다.

기억으로 남은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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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2025, 그 후’ 이미지 제공: 피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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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2025, 그 후’ 이미지 제공: 피크닉

전시 준비 과정에서 진행된 여섯 차례의 포럼은 힐튼서울의 또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자리였다. 피크닉과 CAC, 한국건축아카이브(KAA)가 공동으로 기획한 이 포럼은 ‘보존과 개발’의 이분법을 넘어, 현대건축의 생애를 새롭게 바라보고자 했다. 도쿄의 나카긴 캡슐타워, 몬트리올 엑스포 한국관처럼 이미 철거된 건축이 디지털 데이터나 예술적 재구성을 통해 다른 차원에서 보존되는 가능성도 논의했다. 참여자들의 생각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영상 작업으로 이어졌고, 테크캡슐의 3D 스캔은 사라진 힐튼서울이 디지털 공간에서 또 다른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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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부터 매년 연말 그랜드 아트리움에 설치되었던 크리스마스 자선열차. 피크닉 테라스로 옮겨와 작별 인사를 전한다. 이미지 제공: 피크닉

마지막 장 ‘굿바이 힐튼’에서는 철거 현장에서 수거된 대리석과 브론즈, 오크 등 실제 자재가 전시장 안에서 새롭게 배치된다. 한때 연말의 상징이었던 크리스마스 자선열차도 3년 만에 복원되어 다시 달린다. 피크닉은 사전에 진행한 오픈콜을 통해 시민들의 사연을 모아 함께 전시했다. 호텔에서의 결혼식, 첫 해외식 경험, 아이와 함께 본 겨울의 풍경 같은 개인의 기억들이 그 안에 겹겹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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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굿바이 힐튼’ 이미지 제공: 피크

이제 힐튼서울이 있던 자리는 ‘이오타 서울 원(IOTA Seoul I)’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복합 개발을 앞두고 있다. 피크닉의 전시는 단지 회상에 머물지 않는다. 한 건축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도시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라진 건축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할 것인지 묻는다. 전시는 2026년 1월 4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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