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디자인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은 지난 20년간 디자인을 사회 변혁의 언어로 삼는 실천적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스펙터클 너머 의미를 찾는,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
북유럽 디자인 하면 흔히 절제된 미니멀리즘을 떠올린다. 하지만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이 보여주는 디자인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이는 오랜 세월 여러 제국의 지배와 소련 체제를 거치며 제한된 자원 속에서도 스스로 길을 만들어야 했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적 성취보다 실질적 해결과 생존이 우선시됐던 문화적 토대는 지금도 에스토니아 디자인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그렇기에 탈린의 디자인은 삶의 현실과 사회의 균열 속에서 질문을 던지는 태도에 가깝다.
역사적 산업 단지를 재생한 복합 문화 공간 크룰리 쿼터에서 열린 전시. 그래픽, 패션, 인테리어 등 다양한 분야의 제품과 콘텐츠를 한자리에 모았다.
그런 정신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무대가 바로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이다. 2006년 ‘디자인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이 축제는 처음에는 지역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담론을 나누는 소규모 행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디자인을 통해 사회와 도시를 연결하려는 실험적 시도를 이어가며 디자인을 사회 변혁의 언어로 삼는 실천적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전통적인 북유럽의 조형미보다 도시 재생, 포용성, 지속 가능성 등 현실의 문제를 디자인 담론으로 끌어올리며 그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구축했다.
인테리어 및 조경 디자인 분야의 트렌드를 살피는 〈인테리어 플러스(Interior+)〉전.에스토니아의 지속 가능한 패션 브랜드가 참여한 DOM 패션쇼. 환경 문제와 패션 윤리를 에스토니아 고유의 미감으로 해석한 패션 컬렉션을 선보였다.
다시, 모두를 위한 디자인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의 주제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다. 2010년에 이미 한 차례 다룬 이 주제를 다시 꺼내 든 것은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절실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급격한 고령화와 사회구조의 변화 속에서 포용적 디자인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지난 9월 29일부터 10월 5일까지 열린 행사에서는 전시와 콘퍼런스를 비롯한 다양한 이벤트가 도시 전역에서 펼쳐졌다. 장소성과 맥락을 중시하는 접근은 페스티벌의 중요한 정체성을 만드는데, 올해는 역사적 산업 단지를 재생한 복합 문화 공간인 크룰리 쿼터Krulli Quarter를 전시 장소로 삼았다. 100년이 넘은 금속 공장을 개조한 공간에서 전시와 패션쇼, 강연 등의 프로그램이 잇따라 열리며 독특한 풍경을 자아냈다.
크룰리 쿼터 전경.
지역과 글로벌 담론이 교차하는 장
올해 페스티벌에서 특히 눈길을 끈 프로그램은 국제 콘퍼런스다. ‘모두를 위한 디자인: 다양성을 기념하고 평등을 실현하다’를 부제로 내건 이 포럼에서는 산업 디자이너 패트리샤 무어Patricia Moore, 디자이너이자 연구자 라마 기라워Rama Gheerawo, 건축가 캐머런 싱클레어Cameron Sinclair 등 세계적 전문가들이 참여해 포용적 디자인의 실제 사례와 사회적 의미를 공유했다. 미국, 노르웨이, 이탈리아, 덴마크, 폴란드 등 다양한 국가의 전문가들이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과 가능성을 다층적으로 탐구하는 자리였다.
국제 디자인 콘퍼런스에서 패트리샤 무어는 포용적 디자인을 주제로 강연했다.
패션과 전시 분야에서도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지속 가능한 패션 브랜드 리트 아우스Reet Aus의 업사이클링 패션쇼를 시작으로 에스토니아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환경 문제와 패션 윤리를 창의적으로 해석한 패션 컬렉션을 선보이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밖에도 페차쿠차 프로그램에서는 싱가포르, 스리랑카 등 비유럽권 연사들이 각국의 디자인 경험을 소개하며 유럽 중심의 시각을 넘어서는 국제적 담론을 만들어냈다.
크룰리 쿼터 단지 내 클럽 실렌시오에서 열린 설치 전시. 산업 공간의 쇠퇴한 분위기 속에서 조명과 사운드를 통해 독특한 시각적·청각적 체험을 선사했다.
클럽 실렌시오Klub Silencio의 조명 설치 전시와 크룰리 채플에서 열린 퍼포먼스는 공간 자체를 작품의 일부로 재구성해 장소성과 맥락을 강조한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만의 인상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이 행사는 교육과 참여 프로그램도 폭넓게 운영했다. 디자인 스쿨 에어리어Design Schools Area에는 에스토니아, 폴란드, 헝가리의 디자인 스쿨과 글로벌 신진 디자이너 플랫폼 ‘아트 스레드Arts Thread’가 참여해 젊은 창작자들의 포트폴리오를 선보였고, 어린이를 위한 ‘키즈존KidZone’, 조경가와 함께하는 자전거 투어, 핸드백 장인 앤서니 루치아노Anthony Luciano의 워크숍, 핀란드의 산업 디자이너 이르외 쿠카푸로Yrjö Kukkapuro를 비롯해 국제 디자이너들의 제품을 경매를 통해 선보인 디자인 옥션 등 세대와 관심사를 아우르는 프로그램이 다채롭게 이어졌다.
에스토니아 및 국제 디자이너들의 독특한 제품을 경매를 통해 선보인 디자인 옥션.
여느 디자인 페어만큼 화려한 스펙터클은 없었지만,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은 디자인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진정성 있게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장이었다. 포용성과 지속 가능성, 창의성을 바탕으로 디자인의 사회적 역할을 보여준 이 페스티벌이 앞으로도 대안적 디자인 페어로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기를 기대해본다.
Interview
일로나 구르야노바 Ilona Gurjanova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 총괄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그간 페스티벌은 어떻게 발전했나?
처음 행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1~3일간 열리는 소박한 행사에 불과했다. 지역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몇몇 강연을 여는 정도였다. 당시 에스토니아에는 디자인 전시 자체가 드물어 전시할 작품도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하나가 높은 완성도와 정교한 큐레이션을 갖추고 있었다. 처음부터 국제적 성격을 지닌 것도 이 페스티벌의 특징이다. 독일, 프랑스 등 인근 국가에서 온 손님을 맞이했고, 이에 대한 관심은 해마다 증가했다. 입소문을 통해 전 세계 디자이너, 큐레이터, 연사들이 참여를 원하기 시작했다. 국제적 시각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갈망하던 지역 디자인 애호가들에게 자극이 되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페스티벌은 이제 일주일간 이어지는 활기찬 디자인 축제로 성장했고, 에스토니아를 세계와 연결하는 창구 역할을 하게 됐다.
디자이너와 창작자에게 작품을 선보이고 판매하는 디자인 마켓.
‘모두를 위한 디자인’을 주제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올해의 주제는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절실히 필요로 하는 가치와 깊이 맞닿아 있다. 특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드는 지금, 디자인은 배제보다 포용을 실현해야 한다. 접근성은 특정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다리가 부러지거나 휠체어를 이용하게 되는 등 누구든 일시적 또는 영구적인 장애를 경험할 수 있다. 더구나 전쟁으로 인해 젊은 세대에서도 장애를 갖게 되는 이들이 늘면서 포용적 디자인의 필요성이 더욱 시급해졌다. 사실 이 주제는 2010년에 처음 도입했지만, 당시에는 너무 앞서갔던 탓인지 세미나 참석자가 7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2011년에는 ‘모두를 위한 도시–탈린을 위한 도시(Cities for All–Tallinn for All)’라는 실천적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도시의 접근성을 직접 조사하고 지도화하는 작업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대중교통 정보 시스템 개선으로 이어졌고, 유럽 디자인 매니지먼트 어워드(European Design Management Award)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 이 주제가 진정으로 주목받게 된 것을 보며 뿌듯함을 느낀다.
디자인과 자연, 지속가능성, 감각적 경험이 만나는 지점을 탐구한 참여형 전시.
주요 행사 장소인 크룰리 쿼터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의 핵심은 언제나 ‘장소’에 있다. 우리는 늘 역사적이고 진정성 있는 공간, 특히 아직 완전히 복원되지 않은 공간을 선호한다. 지난 20년간 타운 월Town Wall, 노블레스너Noblessner, 로테르만니Rotermanni 등 100년이 넘은 산업 유산 공간에서 행사를 개최했다. 그런 점에서 크룰리 쿼터는 완벽한 장소였다. 지난 3년간 주요 행사 공간으로 사용했지만, 이제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그 시절은 막을 내리게 됐다. 그만큼 또 다른 ‘날것의 진정성’을 지닌 공간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다행히 최근 유망한 새 장소를 발견했는데, 바로 오래된 카카오 창고다. 그곳이 우리가 찾던 정신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만의 차별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수많은 디자인 페스티벌을 방문하면서 느낀 점은 대부분의 행사가 미학적 측면, 즉 ‘아름다운 형태’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은 그 이상을 지향한다. 일례로 싱가포르에서 열린 〈Unnatural Design〉 전시는 기존의 디자인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한 시도로 큰 영감을 주었다. 우리의 목표는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고, 디자인이 단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작동 방식’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좋은 디자인은 삶을 더 살기 좋고, 즐겁고, 포용적으로 만든다. 더 나아가, 좋은 디자인은 ‘생존’을 가능하게 한다. 접근성, 지속 가능성, 회복 탄력성 같은 요소들이 결국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리더십 워크숍 프로그램의 연사로 나선 라마 기라워.리더십 워크숍 프로그램 전경.
특히 올해는 세계 각국에서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국제적 참여는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의 핵심 비전이다. 에스토니아처럼 작은 나라가 세계 무대에서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이런 교류가 필수적이다. 페스티벌 초창기부터 우리는 해외 디자이너를 초청하는 동시에 해외 디자인 행사에 직접 참여해왔다. 이런 경험이 매년 페스티벌의 주제를 형성하고, 영감을 주는 연사와 전시를 초대하는 밑거름이 된다. 현재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은 3개의 국제 디자인 단체 회원으로 활동하며 이를 통해 글로벌 네트워크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내년에는 싱가포르의 〈메이드 인 싱가포르Made in Singapore〉 전시와 영국의 〈웰 메이드Well Made〉 전시에 참여할 계획이다. 이러한 협업은 디자인을 통해 문화 간의 대화를 이어가려는 우리의 의지를 보여준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
가장 큰 과제는 열정을 유지하는 일이다. 탈린 디자인 페스티벌은 상업적인 행사가 아니기 때문에 재정적 균형을 이루는 게 늘 어려운 숙제다. 그럼에도 열정과 힘이 닿는 한 계속 나아가고자 한다. 다루고 싶은 주제가 너무나 많다. 우리가 사는 방식, 일하는 방식, 연결하는 방식을 바꾸는 이야기 말이다. 페스티벌은 디자이너와 창작자에게 작품을 선보이고 판매하는 플랫폼 역할도 계속할 계획이다. 내년 주제는 ‘제품 디자인의 미래’로, 새로운 기술과 사회 변화 속에서 디자인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해야 하는지 탐색하는 대담한 논의의 장이 될 것이다.
사진을 좋아하지 않아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카메라 브랜드, 후지필름. 후지필름 코리아가 서울 이태원에 글로벌 사진 문화 플랫폼 ‘하우스 오브 포토그래피(House of Photography)’ 를 공식 오픈했다. 청담동에 위치한 후지필름의 브랜드 경험 공간 ‘파티클(Particle)’ 에 이어 후지필름이 제안하는 두 번째 문화 플랫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