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이 직조한 새로운 세계

사람과 장소, 감각과 기술이 얽히면 서로의 세계가 직조된다. 한 지역의 시도가 또 다른 지역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관계를 맺고, 확장하고, 서로에게 닿는 실천으로 기능한다. 월간 〈디자인〉은 전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이들을 주목했다.

로컬이 직조한 새로운 세계

기록으로 남기는 도시의 기억, 인디아 스트리트 레터링

디자이너들은 길을 그냥 걷지 못한다. 길이란 시각 언어와 영감의 보고이기 때문이다. 간판의 글자, 벽의 낙서, 바닥의 표식까지 모든 것이 디자인의 단서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그것을 사진으로 남기고, 수집하고, 기록한다.

인도의 타입 디자이너 푸자 삭세나Pooja Saxena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10년 전부터 인도의 도시 공간에 살아 있는 타이포그래피 문화를 기록하는 ‘인디아 스트리트 레터링India Street Lettering’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한 인도 전역의 공공 레터링을 정밀하게 촬영하고, 주석을 달고, 위치 정보를 태깅하는 일이다. 플렉스 인쇄 간판이 도시를 뒤덮는 상황에서, 문자 형태의 유연성과 변형 가능성을 보여주는 살아 있는 교과서인 손으로 그린 페인팅, 모자이크·네온·목재·꽃과 잎사귀까지 다양한 기록을 모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아카이브를 정리하며 발견한 디자인적 패턴과 주제를 중심으로, 삭세나는 이를 작은 독립 출판물 형태로 엮기도 한다. 바로 ‘인디아 스트리트 레터링 진’ 시리즈다. 만화경을 돌릴 때마다 새로운 패턴이 나타나듯, 이 진zine들은 인도 거리의 서체와 스타일, 그리고 사용 관습에서 나타나는 예상치 못한 질서를 포착한다. 2023년 이후 두 시리즈를 발간했는데, 첫 번째는 ‘타일’을 활용한 거리 간판을, 두 번째는 러크나우Lucknow, 하이데라바드Hyderabad, 콜카타Kolkata 등지의 영화관 간판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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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 스트리트 레터링 진.

최근에는 이 프로젝트를 묶은 책도 출간했다. 인도 12개 도시의 공공 레터링 이미지를 비롯해 지역 문자들의 특징과 스타일을 분석한 에세이, 거리에서 실제로 레터링을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지도, 간판 화가와 목공예가 등 현장에서 작품을 만드는 이들의 인터뷰도 수록했다. 삭세나의 프로젝트는 사라져가는 수공예적 글자 문화와 현대 인도 도시의 시각 언어를 연결하며, 로컬 타이포그래피의 생태계를 복원하는 시도로 기능하고 있다.

웹사이트 indiastreetlettering.com

책으로 지역을 짓다, 장크트갈렌 출판협동조합

“인간이 창조한 모든 세계 가운데 책의 세계가 가장 강력하다.” 이 문장을 모토로 삼아 책을 통해 지역을 가장 강력한 곳으로 만드는 출판사가 있다. 장크트갈렌 출판협동조합(VGS, Verlagsgenossenschaft St.Gallen)이다. 북 디자이너 요스트 호훌리Jost Hochuli를 중심으로 1979년에 설립한 이 협동조합은 스위스 동부 도시 장크트갈렌을 기반으로 지역의 문화, 역사, 일상에서 출발한 책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지역’이라는 한정된 주제로 얼마나 다양한 세계를 만들 수 있을까 싶지만, 지금까지 200여 권의 책을 출판했다. 주제는 실로 다채롭다. 어떤 책은 장크트갈렌의 새 깃털이라는 자연물을 과학적·문화적 관점에서 탐구했고, 또 다른 책은 장크트갈렌 지역의 종(鐘) 문화와 설치 프로젝트를 다루며 도시의 사운드와 구조, 문화를 시각화했다. 이주민이 조국에서 가져온 채소와 씨앗이 스위스 정원 문화에 스며드는 과정을 사진과 글로 기록한 포토북은 씨앗 종이로 제작한 표지를 사용해 지속 가능한 디자인의 사례를 보여주었다. 또 팬데믹 이후 지역의 공허함과 정적을 흑백 사진과 여백으로 표현한 책이 있다.

보다 전통적인 지역 기록물도 있다. 공공 목욕 시설의 역사, 시민 공동체 제도, 어린이 축제의 200년사, 1904년에 문을 연 레스토랑 바라텔라Baratella의 건축과 식당의 변천사 등 거시적으로, 또 때로는 미시적으로 지역의 시간과 장소를 세밀하게 담아낸다.

디자인 자체에 초점을 맞춘 책도 많다. 장크트갈렌의 책 문화와 북 디자인 전통을 조명한 연구서, A부터 Z까지 망라한 타이포그래피 미니 사전, 제본가 프란츠 차이어Franz Zeier의 철학과 작업을 다룬 책 등이다. 이렇게 만든 책들은 유럽 디자인 어워드 등에서 다수의 상을 받았다. 이 출판사는 장크트갈렌을 단순한 지역 도시가 아니라 ‘책으로 지은 도시’, 즉 책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가장 강력한 도시로 만들어가고 있다.

웹사이트 vgs-sg.ch

건축에 담는 로컬의 이야기, 아틀리에 오이의 더 공

캄보디아는 최근 대한민국 뉴스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해외 국가 중 하나다. 온라인 취업 사기, 강제 노동 등 어두운 이야기들이다. 캄보디아는 왜 범죄의 온상이 되었을까? 그 배경에는 1975년부터 4년간 이 땅을 지배했던 크메르 루즈 체제의 잔혹한 실험이 자리한다. 크메르 루즈 정권은 도시를 비우고, 학교를 닫고, 지식인과 예술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국가는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고, 사회 기반은 여전히 무너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위스의 사진가이자 예술가 하네스 슈미트Hannes Schmid가 캄보디아로 향했다. 그는 ‘교육과 문화는 파괴된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는 리듬’이라는 신념을 품고 2014년 캄보디아 농촌에 교육 캠퍼스 스마일링 게코Smiling Gecko를 세웠다. 처음에는 아이들을 먹이고 재울 공간을 만들었고, 이후에는 농업·목공·조리 등 실용 교육을 통해 자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슈미트는 곧 깨달았다. 문화와 예술이 사라진 데서 비롯된 ‘정신의 단절’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스위스 건축 스튜디오 아틀리에 오이Atelier Oï에 연락해 ‘우리가 다시 노래하고 연주할 수 있는 집을 지어달라’고 했고 그렇게 ‘더 공The Gong’이란 건물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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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공은 캄보디아 전통악기인 ‘공’을 모티프로 만들었다.

캄보디아 전통 의식에서 사용하는 원형 악기 ‘공gong’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 공간은 ‘소리의 울림’을 건축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아틀리에 오이는 “공이 상징하는 것을 건축으로 옮기고 싶었다”며, 이를 ‘스토리텍처storytecture’, 즉 무형의 이야기를 유형의 건축으로 바꾸는 작업이라 설명했다. “공에서 퍼져나가는 진동을 건축으로 구현한다면?”이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중심에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리듬을 구조와 동선으로 표현했다.

건물 중앙에는 하늘을 향해 열린 원형 천창과 빗물을 모으는 임플루비움이 있고, 그 주위를 강당과 스튜디오, 카페가 감싸며 동심원 형태로 배치되었다. 비가 내리면 지붕을 타고 흐르는 물이 중앙으로 떨어져 작은 폭포처럼 공간을 울린다. 외벽은 구멍을 낸 벽돌로 쌓아 자연 환기를 유도하고, 벽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빛이 끊임없이 건물의 표정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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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공에서 아이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잃어버린 문화를 되찾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에서 아이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간다. 이렇듯 더 공은 침묵으로 잃어버린 공동체의 목소리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이자, 로컬이 스스로의 리듬을 되찾는 하나의 시작점으로 기능하고 있다.

웹사이트 atelier-oi.ch

색으로 연결한 세계, 스프레드의 디퍼런드 월드

스프레드는 디자이너 야마다 하루나와 고바야시 히로카즈가 이끄는 도쿄의 크리에이티브 유닛이다. 색을 단순한 시각적 요소가 아니라 감각과 감정을 자극하고 사고를 확장하는 매개로 보고 이를 활용한 작업을 주로 선보인다. 조경의 장기적 사고방식과 그래픽 디자인의 시각 언어를 결합해 환경과 생명, 시간과 기억을 색으로 시각화하는 것이 스프레드의 작업 방식이다. 일례로 대표작 〈라이프 스트라이프Life Stripe〉는 하루 24시간의 일상을 21가지 색으로 기록해 각자의 삶을 색의 리듬으로 표현한 프로젝트다.

이런 스프레드가 ‘로컬’을 확장된 개념으로 탐구한 작업이 2022년의 ‘디퍼런트 월드Different Worlds’다. 겉보기엔 추상적인 색면 회화 같지만, 사실은 196개국의 정부 웹사이트로 연결되는 QR코드로 이루어진 인터랙티브 설치 작품이다. 관람객이 스마트폰으로 코드를 스캔하면 한국, 미국, 요르단,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각국의 공식 사이트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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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레드의 ‘디퍼런트 월드’.

이 프로젝트는 “오늘날 우리는 거의 모든 정보에 손쉽게 접근하지만, 과연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팬데믹과 전쟁이 이어지던 시기, 스프레드는 이 작품을 통해 서로 다른 세계를 호기심과 공감의 감각으로 다시 바라보는 방식을 제안했다. 또 각 QR코드는 해당 국가의 국기에서 추출한 색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서로 다른 국가와 문화를 색이라는 감각적 언어로 연결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스프레드 측은 “색은 호기심의 매체다. 사람들이 이 색은 어디서 왔을까 궁금해하길 바랐다. 그리고 그것이 각 나라의 국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그 나라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시작된다”라고 말했다. 한편 작업을 진행하던 당시, 스프레드 팀은 우크라이나의 QR코드를 생성하며 ‘혹시 이 코드를 스캔했을 때 아무것도 뜨지 않으면 어쩌지’라는 불안을 느꼈다고 한다. 전쟁과 단절의 현실이 ‘정보로 연결된 세계’라는 주제와 겹쳐지며 작품에 묘한 긴장감을 더했다.

웹사이트 spread-web.jp

지역을 안내하지 않는 지도, 센서리 맵

지역을 타인에게 소개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그래서 어쩌면 지역을 가장 강력하게 시각화하는 매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지도다. 그런데 이 지도를 후각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각과 연결한 프로젝트가 있다. 영국의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인 케이트 맥린Kate McLean의 ‘센서리 맵Sensory Map’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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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 지도: 르 마레(Smellmap Le Marais)〉. ©2018 Kate McLean

그는 지역의 경험이 시각만이 아닌 다양한 감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냄새로 읽는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지도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우선 참가자들과 함께 도시의 특정 구역을 걸으며 냄새를 수집하는 ‘스멜 워크Smell Walk’부터 진행한다. 참가자들은 식당 앞, 시장, 골목, 지하철역 등 다양한 냄새가 나는 장소를 탐색하며, 냄새의 위치·강도·지속 시간·선호도·예상 가능성 등을 기록한다. 이후 수집된 냄새 경험은 위치별 패턴, 시간대별 변화, 감정이나 기억과의 연계 등으로 분석된다. 그 과정에서 냄새는 단어로 명명되고, 개인의 연상과 감정적 반응까지 데이터로 남는다. 이렇게 정리된 정보를 바탕으로 지도를 그린다. 여기서 각 지역의 냄새 분포와 강도, 이동 경로, 감정 반응 등이 색상·도형·선으로 번역된다.

이 방식은 전 세계 여러 도시에서 사용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마르세유에서는 항구도시 특유의 디젤, 바닷물, 조개껍질 냄새가 공기 중에 섞이고, 시장의 향신료 냄새가 거리 곳곳에 퍼졌다. 맥린은 이 다층적 냄새의 흐름을 3D 모델과 색으로 시각화하며, 도시의 다문화적 삶을 ‘후각적 풍경’으로 표현했다. 반면 싱가포르에서는 습한 열대기후와 식문화가 후각 경험의 주된 요소로 작용했다. 향신료 냄새, 노점 음식, 열대식물의 향이 뒤섞이며 도시의 공기 자체가 강렬한 향으로 기억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스위스 로잔에서는 알프스산맥 아래의 청량한 공기와 호숫가의 습기, 풀잎과 비 냄새 등 자연의 냄새가 중심이 되었다. 산업적 냄새보다 자연적·기후적 요인을 강조한 점이 다른 도시와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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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의 지도, 로잔(Carte des Odeurs, Lausanne)〉. ©2019 Kate McLean

각 지역의 지도는 형태도 제각각이다. 마르세유에서는 구역별 냄새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설치 작품이, 싱가포르에서는 향을 직접 시향할 수 있는 인터랙티브 아트가, 로잔에서는 수채화처럼 미묘한 색의 그러데이션으로 완성된 평면 지도가 등장했다. 그만큼 냄새의 성격과 도시의 환경, 참여자의 감각이 달랐다는 뜻이다. 이렇듯 센서리 맵은 사람과 장소, 기억과 기술이 연결되며, 감각이라는 언어로 서로의 세계를 잇는다. 길을 안내하지 않지만, 길을 가장 깊이 느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감각의 지도다.

웹사이트 sensorymaps.com

지역을 잇는 새로운 공동체, 메이커스 야드

영국 서머싯주 프룸Frome에는 메이커스 야드Makers’ Yard라는 특별한 스튜디오가 있다. 지역의 디자이너와 예술가들이 함께 일하고 배우며 나누는, 작업 공간·이벤트·네트워크가 결합된 창작 플랫폼이다.

런던에서 활동하던 포토그래퍼 에마 토드Emma Todd와 세트 디자이너 라이언 토드Ryan Todd는 ‘언젠가 런던이 지겨워지면 떠나자’라며 농담처럼 던진 말을 현실로 옮겼다. ‘런던에 싫증 난 사람은 인생에 싫증 난 사람’이라고 했던가. 이들이 바꾼 건 활동 지역만이 아니었다. 삶의 방식을 바꿔보고 싶었던 이들은 빚까지 져가며 버려진 빅토리아 시대 제혁소를 매입했고, 이를 개조해 ‘스스로 일하며 살아가는 창의적 주거-작업 복합체’를 만들었다.

하지만 막상 살아보니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혔다. 런던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보이지 않는 인프라의 부재를 경험한 것이다. 소품을 사고파는 모임, 창작자 전문 에이전시, 전시나 이벤트를 알려주는 매체와 인플루언서들이 대표적이었다. 이를 절감한 두 사람은 직접 그런 시스템을 만들기로 했다. 메이커스 야드는 그렇게 시각예술, 영화, 도예, 목공, 주얼리, 글쓰기, 건축, 사진 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이 모여 프로젝트를 이어가는 커뮤니티가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M.Y 로컬’이라는 온라인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지역 예술가와 디자이너, 제작자들을 위한 디지털 기반 인프라로 일자리, 공유 오피스, 장비 거래, 전시 소식, 리소스 라이브러리 등 창작 생태계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다룬다. 지금은 프롬뿐 아니라 엑서터, 파머스, 플리머스, 마게이트, 브라이턴 등 영국의 5개 지역에서 시범 운영 중이며, 150명 이상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의 핵심은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니라 ‘함께한다는 감각’이다. 고립된 지역 창작자들이 서로를 만나고 일감을 나누며 협업과 우정이 자라난다. 누군가는 M.Y 로컬을 통해 팀을 꾸려 어린이 TV 시리즈를 제작했고, 누군가는 주택 증축 설계와 웹사이트 개발을 맞바꾸며 새로운 협업 관계를 맺었다. 이렇듯 메이커스 야드는 물리적 공간이자 디지털 커뮤니티, 즉 로컬 창작 생태계의 두 축을 동시에 세웠다. 도시를 떠난 창작자들이 ‘혼자가 아닌’ 상태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며, 로컬의 가능성을 사회적 연결망으로 확장하고 있다.

웹사이트 makersyard.co.uk

포스터로 그리는 연대, 비하이브 디자인 컬렉티브

포스터는 예로부터 저항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미국 메인주의 작은 해안 마을에서 활동하는 비영리단체 비하이브 디자인 컬렉티브Beehive Design Collective는 포스터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확장했다. 단순한 구호나 선전물이 아닌, 하나의 시각적 아카이브이자 관계의 지도로 다룬 것.

1990년대 말 반세계화 운동의 한복판에서 태동한 이 단체는 지난 25년간 자유무역협정, 군사 개입, 자원 채굴 등 ‘세계화’의 구조를 비판하는 대형 그래픽을 제작해왔다. ‘미주자유무역지대(FTAA)’, ‘플랜 콜롬비아Plan Colombia’, ‘메소아메리카는 저항한다(Mesoamérica Resiste)’, ‘석탄의 진짜 값(The True Cost of Coal)’으로 이어지는 포스터 시리즈는 미국의 세계화 논리가 지역을 잠식해가는 과정을 고발하고, 각지의 공동체가 어떻게 그 흐름에 맞서 스스로 터전을 지켜내는지를 시각적으로 기록한 연대의 아카이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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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이브 디자인 컬렉티브의 ‘플랜 콜롬비아’ 포스터. 웹사이트에서 더 고화질의 포스터를 볼 수 있다.

제작 방식도 독특하다. 수년간 현장을 조사하고, 지역 공동체의 이야기를 듣고, 수백 개의 상징과 은유를 도상화한다. 그렇게 완성된 한 장의 포스터에는 수백 종의 동식물과 인공 구조물, 신화적 존재가 빽빽이 자리하며, 각각이 하나의 장면으로 연결된다. 또 인물은 아예 등장하지 않고, 대신 개미, 벌, 거미 같은 비인간 생명체들이 권력, 협력, 저항을 상징한다. 인간 중심의 서사를 거부하고 생태적 관계망을 주체로 삼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포스터가 ‘읽는 방식’까지 함께 제시한다는 것. 예를 들어 대표작 ‘메소아메리카는 저항한다’ 포스터는 접을 수 있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겉면은 스페인 정복자의 시선으로 그린 고지도처럼 보이지만, 이를 펼치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난다. 땅속 개미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지역 공동체의 저항과 자치의 풍경이 드러나는 것이다. 포스터 하나를 해석하는 데 30분이 걸릴 정도로 복잡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리듬이 있다. 작은 장면들이 모여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되고, 다시 전 세계의 지역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엮어내는 하나의 직물로 완성된다.

이들의 작업은 결국 ‘로컬’의 또 다른 형태를 제시한다. 포스터라는 오래된 저항의 매체를 통해 서로 다른 지역의 목소리들이 만나는 시각적 네트워크를 만든 것이다. 비하이브 디자인 컬렉티브의 세계에서 로컬은 더 이상 한 지역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지역으로 향해 날아가 수분을 나누는 벌처럼 서로를 잇고 변화시키는 관계의 운동성 그 자체다.

웹사이트 beehivecollective.org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69호(2025.11)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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