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의 서점

빛으로 조각된 공간, 레진으로 감싼 서점의 경계

건축사무소 사나(SANAA)가 설계한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의 새 건물은 자연과 예술의 경계를 허문다. 특히 에이킨 아틀리에와 헤이든 콕스가 협업한 주황빛 서점은 ‘바이오 레진’으로 완성된 몽환적 공간이다.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의 서점

오페라하우스 완공 이후 가장 중요한 문화 프로젝트로 평가받는 ‘시드니 모던 프로젝트(Sydney Modern Project)’는 2022년 12월, 뉴사우스웨일스 미술관(이하 AGNSW, Art Gallery of New South Wales)의 새로운 빌딩이 공개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드니 모던 프로젝트는 AGNSW를 확장, 보수하여 19세기부터 현재까지의 호주 미술품을 소개하고 국제적인 현대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홍보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2 8

시드니 하버(Sydney Harbour)와 울루물루 베이(Woolloomooloo Bay)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자리한 이 건물은 유리, 천연석, 그리고 빛으로 이루어진 투명한 구조를 통해 자연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이며 예술과 환경의 경계를 허문다. 지형의 경사를 따라 계단식으로 펼쳐지는 전시동은 하늘과 바다, 식물의 색이 실내의 조명과 어우러져 마치 자연 속을 산책하듯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설계됐다. AGNSW의 새 건물은 호주 최초로 지속 가능한 디자인으로서 최고 등급을 받은 미술관이 되었다. 시드니 모던 프로젝트는 시드니의 문화적 중심지로서 예술과 문화를 지원하고 확장하는 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예술 작품을 더욱 포괄적으로 전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독창적인 디자인의 새로운 미술관 건물은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Pritzker Prize)’을 수상한 세계적인 건축 사무소 ‘사나(SANAA)’가 설계한 것으로 화제가 된 바 있다. 카즈요 세지마(Sejima Kazuyo)와 니시자와 류에(Nishizawa Ryue)가 이끄는 SANAA는 환경과 공존하는 건축물로도 유명한데 AGNSW의 새로운 미술관 또한 유리와 콘크리트, 그리고 풍경이 서로의 경계를 흐리며 하나의 지층처럼 겹쳐는 구조를 보여준다. 건물 입구의 파빌리온(Entrance Pavilion)에 들어서면 시선을 사로잡는 주황빛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미술관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아름다운 서점이다.

3 9

이 서점은 시드니의 디자인 스튜디오 에이킨 아틀리에(Akin Atelier)가 설계하고, 세계적인 서프보드(Surfboard) 디자이너 헤이든 콕스(Hayden Cox)와의 협업으로 완성되었다. 두 팀은 2년에 걸친 실험과 협업을 통해 서핑보드 제작에 사용되는 ‘바이오 레진(bio-resin)’을 공간적 재료로 확장하는 전례 없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 결과 탄생한 공간은 빛의 굴절과 반사, 그리고 재료의 투명성이 서로 얽히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무는 듯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에이킨 아틀리에의 건축가 켈빈 호(Kelvin Ho)가 이 공간에 대해 “건축적인 풍경 속에 떠 있는 하나의 거품”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 몽환적인 분위기의 서점은 SANAA 건축의 유려한 곡선과 투명한 구조 사이에서 부유하는 듯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4 5

갤러리 서점의 벽면은 모두 맞춤 제작된 레진 패널로 둘러싸여 있다. 이 패널들은 책을 전시하는 진열대이자 빛을 받아 반짝이는 스크린의 역할을 한다. 아침 햇살이 유리 파빌리온을 통과하면 레진 벽 안으로 부드럽게 스며들고, 오후의 낮은 빛은 그 안에서 수면처럼 일렁이기 때문에 이 공간을 걷는 사람들은 마치 빛 속을 유영하는 듯한 착각을 경험하게 된다. 낮과 밤, 맑음과 흐림 등 시간과 날씨에 따라 빛의 표면은 시시각각 다른 색과 질감을 드러내며 공간은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변하는 것이 이 서점의 특징이다. 그 안에는 예술 서적과 오브제가 놓여 있지만 이 공간에서 진짜 전시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빛’일지도 모른다.

이 공간의 물성은 눈으로 보기보다 몸으로 느껴지는 성격을 갖고 있다. 방문자가 서점의 내부를 거닐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레진 벽면에 비치는데 도시와 사람, 책이 모두 빛의 결 안에서 섞이듯이 느껴진다. 파빌리온의 축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외부의 정원을 지나 미술관 테라스에 설치된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의 대형 조각 ‘Flowers that Bloom in the Cosmos’가 한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서점의 ‘창’은 그 조각과 도시를 한 프레임 안에 담아내며, 자연과 예술, 건축이 하나의 시각적 대화로 이어지고 이 공간에서 빛은 경계를 넘어 예술이 되고 재료는 감각으로 변한다.

5 4

이번 프로젝트에 사용된 총 12톤에 달하는 레진은 모나베일(Mona Vale)에 있는 헤이든 콕스의 스튜디오에서 109일 동안 연속적으로 연마되어 탄생했다. 헤이든 콕스가 직접 개발한 전용 바이오 레진은 기존의 서핑보드용 레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와 두께를 견딜 수 있도록 특수하게 제작되었다고 한다. 색의 그라데이션은 AGNSW의 기존 건물에 사용된 사암(沙巖)에서 착안한 것으로 시드니의 지층이 수백만 년에 걸쳐 만들어낸 황금빛 톤을 레진으로 재현한 것이다. 색의 농도는 층층이 쌓아 올린 레진의 밀도와 미세한 물감의 비율로 조절되었고 각 패널은 숙련된 장인들의 손을 거쳐 12단계의 연마 과정과 7단계의 광택 처리를 통해 완성되었다.

300~500킬로그램에 이르는 모듈 하나를 완성하는 데만 3주 이상이 걸렸으며, 총 29개의 독립된 레진 모듈이 조합되어 이 독특한 공간을 감싸고 있다. 구조물의 제작 과정은 산업적이라기보다 공예적으로 다가오는데 표면의 작은 굴곡, 빛의 굴절 하나까지도 사람의 손으로 다듬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는 디지털 기술의 정교함보다는 시간의 흔적을 남기는 수공예적 감각에 가까운 것으로 레진의 손맛이 남긴 미세한 결은 미술관 외벽의 사암 절단면, 오래된 철제 난간, 도시의 낡은 구조물들과 미묘한 리듬을 이룬다.

6 5

에이킨 아틀리에는 SANAA의 건축적 언어, 즉 투명성과 유동성에 대한 현대적인 오마주로서 이 공간을 해석했다. SANAA의 건물 전체가 광활하고 개방된 볼륨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서점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작고 밀도 높은 감각의 공간을 제안한 것이다. 결국 AGNSW의 새로운 서점은 책을 진열하고 판매하는 공간임과 도시와 자연, 그리고 사람의 감각 사이를 매개하는 하나의 예술적 공간으로도 기능한다. 투명한 레진 벽 안에서 책은 빛과 함께 전시되고, 관람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 또한 그 장면의 일부가 된다.

7 3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책을 고르기보다 빛의 결을 따라 걷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시드니 모던 프로젝트가 도시 전체를 예술의 풍경으로 확장했다면 이 서점은 그 확장의 가장 작은 단위이자 가장 감각적인 순간이다. 미술관의 입구라는 장소가 이렇게까지 시적인 공간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건축과 디자인이 어디까지 예술과 맞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AGNSW의 서점은 빛, 재료, 공예, 그리고 협업의 힘으로 완성된 현대 건축의 한 예로 시드니라는 도시가 가진 투명한 기운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