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의 기술’이라 주목 받는 디자인?

러브 훌텐의 신기한 디자인 세계

러브 훌텐은 아날로그 감성과 디지털 기술을 결합해 손으로 ‘만지는 즐거움’을 되살리는 스웨덴 출신 예술가이자 목수다. 그의 작품은 게임기, 신시사이저, 오디오 등 레트로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기계적 움직임과 소리가 결합된 감각적 오브제로 주목받고 있다. 버튼 하나, 사운드 한 톤까지 ‘촉감의 미학’을 담은 그의 세계는 기술의 시대 속 잊혀진 감성을 다시 깨운다.

‘외계인의 기술’이라 주목 받는 디자인?

터치스크린이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된 시대, 기기의 버튼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 덕분에 우리의 일상을 함께 하는 기기들의 모습은 어느샌가 비슷비슷해졌고 사람들의 손가락은 바빠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감성은 겨울 피부처럼 부슬거리며 메말라 가고 있는 중이다. 화면을 눌러 기기를 작동시켜도 손끝에 전해지는 촉감은 거의 없고, 화면이 꺼지고 나면 남는 것은 스크린에 수없이 찍혀 있는 손자국뿐이다. 더 이상 기기의 형태만으로는 기능을 짐작하기도 어렵다. 첨단 기술이 난무하고 SF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가는데도, 어째서인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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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Pixel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감각을 자극하는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손가락을 바지런히 놀릴 수 있는 뜨개질이 유행하고, 터치보다는 ‘누르는 재미’가 있는 버튼들이 다시금 기기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거나 손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슬라임이나 스트레스 볼을 쥐는 풍경도 낯설지 않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물리적 감각이 주는 매력은 여전히 우리의 감성을 채워주고 있다.

전통 장인 정신 X 현대 기술의 융합으로 탄생한 오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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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러브 훌텐 홈페이지

이런 가운데 스웨덴 출신 예술가이자 목수로 활동하고 있는 ‘러브 훌텐(Love Hultén)’의 작품들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예테보리(Gothenburg)에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이 작가는 전통적인 장인 정신을 기반으로 현대 기술을 융합하여 독창적인 오브제를 제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작품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하는 그는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일상에 스미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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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러브 훌텐 홈페이지

몇 년째 꾸준하게 사랑받는 레트로의 열풍에 따라,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공존하는 그의 작품은 공개되는 즉시 화제가 되고 있다. 복고풍 컴퓨터, 빈티지 오디오, 신시사이저, 비디오 게임기 등, 보자마자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특히 그는 게임과 음악 관련 기기에 남다른 애정을 담아왔는데, 이를 통해 작가의 관심사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창작하고 제작한 기기들을 ‘커스텀 에일리언테크(Custom alientech)’라 부르며 괴짜 같은 감각과 위트를 표현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창작물을 ‘외계인의 기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기기 안에 들어 있는 요소들이 관련 종사자가 아니면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문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이를 활용한 아이디어 또한 평범하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전시용 오브제를 만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날로그 게임과 음악이 좋아서, 즐기면서 만든 기기라는 분위기가 전해진다. 아마도 이런 진정성 때문에 러브 훌텐의 기기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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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러브 훌텐 홈페이지

​작년에 선보인 ‘레토(LETO)’는 수많은 버튼과 건반이 혼란스러움을 더하는 디자인이라 눈길을 끈다. 이 세상 물건이 아닌 듯한 이 기기는 놀랍게도 ‘악기’이며, 우주 속에 있는 듯한 몽환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내는데 특화되어 있다. 이 기기에서 특별히 주목할 점은 ‘멜로트론(Mellotron)’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1963년 영국 버밍엄에서 처음 개발된 전기 기계식 테이프 재생 건반악기다. 각 건반에 자기 테이프가 내장되어 있으며, 건반을 누르면 테이프가 재생되어 여러 가지 악기의 소리를 낼 수 있다. 혼자여도 다채로운 악기를 동시에 연주할 수 있기 때문에 비틀스, 킹 크림슨과 같은 전설적인 뮤지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혁신적인 전자 음악기기로 주목받았던 멜로트론은 디지털 신시사이저와 샘플러가 나오면서 인기가 수그러들었고, 결국 1986년에 제작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고유의 로파이 Lo-fi 사운드의 질감, 미묘한 볼륨 변동 등이 지닌 매력 덕분에 1990년 대에 다시 부활했으며 지금도 레트로 사운드 애호가들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이런 악기를 발굴해 새로운 기기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의 음악에 대한 덕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할 수 있다.

감각을 다시 깨우는 일 ‘손으로 만지는 즐거움’

레토만큼이나 독특한 작품은 또 있다. 바로 ‘GEN-06’이다. 백남준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이 기기는 패턴, 멜로디, 음조 등의 변화를 결합하여 ‘복잡하고 다층적인 사운드를 실시간으로 생성하는 자가 생성 설치물’이다. 총 6가지 악기 소리(베이스라인, 패드, 멜로디, 아르페지오, 퍼커션, 킥)를 동시에 만들 수 있으며, 이를 오픈 소스 컴퓨팅 플랫폼인 아두이노(Arduino)가 신시사이저에 전달해 사운드를 발생시키는 원리로 작동한다.

기계 내부의 다양한 부품이 움직이며 여러 채널의 미디 MIDI 활동을 모방하고, 역학적 움직임과 소리가 결합되어 ‘토템형 시각화 장치’처럼 작동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리셋 버튼을 누르면 연주의 속도, 사용하는 음계 등의 모든 요소가 새롭게 재편성되며, 매번 다른 음악을 스스로 생성해 내게 된다. 그저 소리를 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관람자의 눈과 귀를 동시에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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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러브 훌텐 홈페이지

소리가 날 때마다 움직이는 ‘페로플루이드 (Ferrofluid 자성유체)’를 사용한 기타 형태의 신시사이저 ‘외계 기타 물체(Extraterrestrial guitar thing)’ 또한 그의 기발한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수작업으로 제작된 이 기기는 전통적인 현이나 건반 대신 노브와 컨트롤러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이를 통해 사운드 유형, 피치, 볼륨, 모듈레이션을 조정할 수 있으며, 심지어 페로플루이드의 움직임까지 제어가 가능하다. 이를 통해 기기 내에 있는 요소들이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음악적인 표현에 있어 실질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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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러브 훌텐 홈페이지

이 기기에서 독특한 버튼 디자인과 페로플루이드 못지않게 특이한 점은 하나 더 있다. 바로 오른쪽에 있는 링이 달린 긴 막대 모양의 팔이다. 이는 피치 또는 이펙트 핸들 역할을 하며, 막대를 움직이면 센서가 읽는 신호 값이 변경되면서 음악에 긴장감을 더한다. 낯선 형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묘한 사운드는 기기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배가시키며, 러브 훌텐 특유의 상상력과 장인 정신이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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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러브 훌텐 홈페이지

음악만큼이나 게임에도 집요한 탐구심과 애정을 드러내온 작가의 성향이 극명히 드러나는 작품은 휴대용 아케이드 콘솔인 ‘R-Kaid-R’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 상자에 담긴 이 콘솔은 작은 스크린, 조이스틱, 버튼을 갖추고 있어 아날로그 시절의 감성을 고스란히 불러일으킨다. 마치 옛 오락실을 손바닥 위에 옮겨 놓은 듯한 디자인은 게임 마니아들의 향수를 자극하며, 동시에 기계 자체가 지닌 독특한 매력으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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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러브 훌텐 홈페이지

그 화제성은 지미 팰런(Jimmy Fallon)의 인기 프로그램, ‘투나잇 쇼’에 나와서 등장할 만큼 컸다. 콘솔 화면에 70-80년 대 북미 비디오 게임계를 풍미했던 아타리(Atari)와 닌텐도의 로고가 잇따라 떠오르는 순간 관객석에서 터져 나온 환호는 이 기기가 레트로 아이템을 넘어서 ‘추억을 불러내는 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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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러브 훌텐 홈페이지

​러브 훌텐의 매력은 과거와 현재,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정교하게 결합해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제시한다는 데 있다. 음악과 게임을 비롯하여 사람들의 일상을 채우는 취향을 예술적인 오브제로 확장하며, 잊고 지냈던 우리의 감각과 기억을 다시 깨우는 것이다. 현대적인 기술을 앞장세우기 보다 ‘손으로 만지는 즐거움’을 중요시 여기는 그의 태도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느끼는 갈증을 촉촉하게 채워주는 매력이 있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를 잇는 독창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이 작가는 우리의 메마른 감성에 깊은 울림을 선사하며,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괴짜 예술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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