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빚은 정원, 필라델피아에 피어난 칼더 가든
땅에 뿌리내린 움직임의 시학
‘움직이는 조각’의 창시자 알렉산더 칼더를 기리는 '칼더 가든(Calder Gardens)'이 필라델피아에 개관했다. 예술·건축·자연이 만나는 이 공간은 건축가 헤르조그 & 드 뫼롱과 조경가 피에트 우돌프가 함께 완성했다. 조각, 식물, 프로그램이 유기적으로 호흡하며 사색과 성찰을 이끄는 새로운 유형의 문화 기관으로 주목받고 있다.

바람과 숨결,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공중에 매달린 조각이 흔들린다. ‘모빌’의 시작은 묵직하고 굳건한 조각과는 반대되는, 자연의 영향과 변화무쌍한 세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태동했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 공중에 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주변 환경에 반응하는 조각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된다.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1898-1976)가 발명한 모빌은 새로운 조각 형식을 넘어선, 예술이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한 근본적 질문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움직이는 조각의 창시자를 기리는 새로운 예술 기관, 칼더 가든(Calder Gardens)이 개관했다. 예술, 건축, 자연,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며 사색과 자기 성찰을 유도하는 공간은 칼더의 작품 세계가 품었던 철학을 물리적 장소로 구현한다.

동시대 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온 스위스의 건축 듀오 헤르조그 &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 건축을 맡았고, 도시 조경의 패러다임을 바꿔온 네덜란드 출신의 조경가 피에트 우돌프(Piet Oudolf)가 정원을 조성했다. 재료의 물성과 공간의 본질을 탐구해온 건축가와 식물의 생애 주기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조경가의 만남은 미술관도 조각 공원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새로운 유형의 문화 기관을 탄생시켰다.
세 세대의 조각가, 하나의 도시

필라델피아는 칼더에게 단순한 출생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곳은 예술가였던 칼더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각자의 흔적을 남긴 장소이며, 칼더 가문 3대가 도시의 공공 공간을 조각으로 채워온 무대다. 그의 조부 알렉산더 밀른 칼더(Alexander Milne Calder)는 시청 꼭대기를 장식하는 윌리엄 펜 동상을, 부친 알렉산더 스털링 칼더(Alexander Stirling Calder)는 수완 메모리얼 분수를 제작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웅장한 계단 홀에는 칼더 자신의 모빌 ‘더 고스트(The Ghost)’가 걸려 있다.


이들의 조각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산업화로 황폐해진 도시 환경을 아름다운 도시로 개조하고자 했던 도시 조경, 건축 개혁의 흐름 속에서 탄생했다. 벤자민 프랭클린 파크웨이(Benjamin Franklin Parkway)를 따라 배치된 작업들은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반스 재단이라는 두 중요한 미술 기관을 축으로 구성된 문화 회랑을 형성한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 파크웨이를 가로지르는 바인 스트리트 익스프레스웨이(Vine Street Expressway)가 건설되며 기존의 도시 조직이 단절됐다. 고속도로는 보행자의 흐름을 끊고, 주변 환경을 소음으로 뒤덮었다. 칼더 가든은 이 두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하면서 단절된 도시 조직을 다시 잇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한다.
작품에 내재된 자연의 힘

자신의 작품들이 자연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혀온 칼더. 그의 작업에는 바람과 공기의 흐름, 관람자가 작품을 만지는 등의 예측 불가능한 우연의 조건들에 의해 좌우되는 자연의 힘이 내재돼 있다. 그는 조각을 고정된 사물이 아니라 환경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유기체로 인식했다. 칼더에게 작품의 완성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이 아니라, 바람이 불고 빛이 변하며 관람자가 움직이는 매 순간마다 새롭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칼더 가든은 그의 조형 철학을 공간 전체의 설계 원리로 확장한다. 피에트 우돌프가 설계한 정원에는 250종이 넘는 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계절에 따라 색과 질감을 달리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살아있는 배경을 형성한다. 우돌프의 정원에서는 꽃이 피고 지는 순간뿐 아니라, 시들어가는 과정까지도 아름다움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칼더의 모빌이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그 안에서 헤르조그 & 드 뫼롱이 설계한 방대한 규모의 건축은 칼더 작업들이 순환 전시된다. 약 50년에 걸친 그의 작업과 다양한 시기·유형의 작업들이 전시되는데, 이는 미술사를 중심으로 한 연대기적 구성이 아닌, 건축적 순간과의 관계에 반응하며 배치된다. 작업의 구성은 계절의 흐름처럼 시간에 따라 서서히 바뀌며, 어떤 작품은 수년에 걸쳐 한 자리를 지키고 어떤 작업은 몇 달만 전시되는 등 달라지는 환경으로 제시된다. 이는 관람자로 하여금 한층 더 세심하게 바라보고, 여러 번 찾아오도록 유도하는 전략이다.
숨겨진 세계 그리고 드러남
칼더는 철사를 구부리고 비틀어 공간 속에 선을 그리는 새로운 조형 방식을 개척했고, 움직이는 추상 조각인 모빌을 발명해 현대 조각사에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다. 1950년대 이후 그는 거대한 야외 조각 작업에 전념하며 세계 도시의 공공 공간에 움직이지 않는 조각인 ‘스테빌’을 남겼다. 모빌과 스테빌, 움직임과 정지, 가벼움과 무게라는 대조적 요소들은 칼더 작품 세계의 양 극을 이룬다.

칼더 가든의 건축과 조경은 칼더의 예술을 과시적 건축 속에 가두기보다 숨겨진 세계가 천천히 드러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파크웨이에서 바라보면 먼저 부드럽게 빛을 반사하는 금속 벽이 펼쳐지고, 그 앞에 초지로 구성된 정원이 놓인다. 이 벽은 고속도로의 소음을 낮추고 시선을 정원으로 유도한다. 입구에 다가설수록 건축의 존재감이 차츰 드러나는데, 접힌 금속 캐노피 아래 나무로 마감된 입구가 은은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건물의 대부분은 지하에 묻혀 있어, 지상에서는 거대한 건축물보다는 지형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중앙에는 커다란 원형의 디스크가 자리해 아래 갤러리를 덮는 역할을 하며, 그 양쪽으로는 지형을 파내 만든 ‘선큰 가든(Sunken Garden)’과 ‘베스티지 가든(Vestige Garden)’이 조성된다. 베스티지 가든은 바인 스트리트 익스프레스웨이가 땅을 가르기 전 존재했던 도시 격자의 자취를 기하학에 반영하며, 사라진 거리와 건물들의 기억을 간직한다. 이 두 정원은 야외 조각의 배경이자 자연 채광이 내부로 스며드는 통로가 되어 외부와 내부, 자연과 조각,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작품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한다.

건물 내부는 도시의 소음과 속도로부터 멀어져 내면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여정으로 구성된다. 관람객은 서서히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긴 가로창을 통해 고속도로의 움직임을 예술적 프레임 안에서 바라보는 ‘하이웨이 갤러리(Highway Gallery)’를 지난다. 지하 깊은 곳에는 높은 천장의 갤러리들이 이어지며, 각 공간은 모빌과 스테빌, 드로잉 등 다양한 작품을 위해 각기 다른 빛과 비례를 제공한다. 선큰 가든 중심에는 곡면 식재벽을 배경으로 단 하나의 스테빌이 서 있어, 살아있는 식물로 둘러싸인 조각이 마치 정원의 일부처럼 느껴지게 한다.

자크 헤르조그(Jacques Herzog)는 이 프로젝트를 형태가 아닌 공간에 집중한 일종의 ‘무(無) 디자인’ 건축’이라 부른다. “칼더 가든은 일종의 ‘노-디자인(no-design)’ 건축을 구현하며, 예술 작품들이 수많은 서로 다른 공간적 맥락 속에서 그들의 다양성과 모호성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이곳은 마치 나무 아래 앉을 때 느끼는 편안함으로, 자연이든 예술이든 앉아서, 거닐며, 관찰할 수 있는 장소다.”
헤르조그의 이 말은 건축가로서의 절제와 겸손을 담고 있다. 칼더 가든에서 건축은 주인공이 아니다. 그것은 무대이자 배경이며, 때로는 관람자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칼더 재단의 대표인 제이슨 프란첸(Jason Frantzen)은 이곳이 칼더의 유산과 도시 맥락에 응답하면서도, 그 자체로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실재적이자 개념적인 정원이며 모든 사람에게 반복적 발견의 공간을 제공한다고 정의한다.
움직임과 정지 사이에서

칼더 가든의 위치는 필라델피아 중심부 벤자민 프랭클린 파크웨이, 칼더 가문 3대가 남긴 예술적 유산이 깊은 도시 한가운데다. 이곳은 필라델피아의 풍부한 문화예술 생태계에 새로운 장을 더할 뿐 아니라, 고속도로로 단절되고 소음에 시달리던 유휴 부지를 문화 공간으로 전환함으로써 도시 재생의 모델로도 읽힌다.

전통적 미술관이 작품을 화이트 큐브 안에 고립시켜 전시한다면, 칼더 가든은 작품을 자연과 건축, 빛과 계절의 변화 속에 풀어놓는다. 다수의 조각 공원이 작품을 야외에 배치하지만 여전히 감상의 대상으로 거리를 둔다면, 칼더 가든은 관람자가 작품 사이를 걷고 그 아래 앉으며 작품과 같은 공간에 머물도록 한다. 이곳은 칼더의 정신과 대화하며 퍼포먼스, 사운드, 상영, 강연 등을 통해 혁신적 유산을 동시대 예술과 연결하는 살아있는 플랫폼이다.
무엇보다 이곳만의 특징은 산책 프로그램을 통해 관람자가 자신의 속도로 걸으며 작품과 자연, 건축이 만들어내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적 경험을 축적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대신, 명상적 산책이자 미학적 체험이며, 나아가 자기 성찰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칼더 가든을 거닐며, 우리는 움직임과 정지, 자연과 인공,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경험을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모빌은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하고, 계절마다 달라지는 정원은 영원한 변화를 보여준다. 지하 깊은 곳의 고요한 갤러리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 서고, 다시 계단을 올라 빛과 바람이 있는 지상으로 돌아온다. 가벼움과 무게, 움직임과 정지,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 칼더가 평생 탐구했던 순환이다.
칼더 가든은 그가 던졌던 질문들을 우리가 다시 경험하고 스스로의 답을 찾아가는 장소다. 나무 아래 앉아 바람을 느끼듯, 우리는 이곳에서 예술과 자연, 그리고 우리 자신과 새로운 방식으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