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등이 빛의 예술이 되기까지

미니멀아트의 선구자, 댄 플래빈의 회고전

쿤스트뮤지엄 바젤에서 열리는 전시 <빛의 헌정>은 스위스에서 12년 만에 열리는 댄 플래빈의 회고전으로 이제껏 한 번도 전시된 적이 없는 58개의 작품을 연대기별, 주제별로 살펴볼 수 있다.

형광등이 빛의 예술이 되기까지

미국 출신 아티스트 댄 플래빈(1933-1996)은 1960년대 초 산업 생산물이었던 형광등을 사용한 예술 작업으로 유명해졌다. 35점의 라이트 설치 작품을 비롯해 21개의 종이 작품, 좀처럼 보기 힘든 초기 회화 작품 2점, 그리고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 르네상스 예술가 우르스 그라프(Urs Graf)를 위해 선택한 장소 특정적 작품이 전시된다.

아일랜드계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뉴욕 퀸즈에서 자란 댄 플래빈은 1954-55년에 한국에서 군인으로 복무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비롯한 다양한 학위를 이수한 그는 구겐하임 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자연사 박물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빛의 오브제와 전시 공간의 건축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갖게 된다. 사물과 공간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해체함으로써 관객의 동선에 영향을 주거나 제한하는 작품을 구상했는데, 돌출형 구조물로 전시 공간에 접근이 불가능한 경계 구역을 만들기도 했다.

댄 플래빈은 독자적인 예술 형식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미술사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바로 회화의 맥락에서 색을 3차원의 공간으로 옮긴 것이다. 그는 상업용 조명기구를 사욤함으로써 예술에 있어서 작가과 제작 과정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뒤짚었다. 뉴욕에서 처음 열린 조명 작품 전시회 후 예술계는 댄 플래빈의 순수주의와 그의 ‘이미지-오브제'(작가 자신이 즐겨 사용했던 용어)의 그 빛나는 존재감의 즉각성에 열광했다. 이 전시는 빛을 이용한 댄 플래빈의 중요한 첫 작품이 탄생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댄 플래빈의 형광등은 공장이나 패스트푸드점, 혹은 주차장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생산 방식에 의해 결정된 파란색이나 녹색의 축소된 팔레트를 의도적으로 사용했고, 빨강, 노랑, 핑크, 자외선 및 흰색의 색조를 가진 개별 조명기구를 단순한 기하학적 배열을 통해 정교한 건축작품과 멀티 시리즈를 제작했다. 댄 플래빈은 자신의 작품이 조각이나 회화라는 사실을 강력히 부인했고, 오히려 “상황”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작품의 객관성을 강조했다.

“조명은 또 다른 도구일 뿐입니다. 관람객들이 매체적으로 또는 사회학적으로 그것을 넘어서기를 바랍니다.”

댄 플래빈
untitled (to Barnett Newman) one, 1971
© Stephen Flavin / 2024, ProLitteris, Zurich
Creditline: Collection Carré d’Art-Musée d’art contemporain de Nîmes
Photo Credit: Florian Holzherr

댄 플래빈은 심리적/정신적으로 깊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우리 앞에 펼쳐져 있지만 그것을 지나갈 때 인식해야 하는 예술을 전파한 작가다. 작가 스스로 상징적인 내용을 부정하고 때때로 숭고한 효과도 외면했다. 하지만 경건한 공간과 조명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특성이 발견되는 댄 플래빈의 작품을 향해 당대 수많은 평론가들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작가는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라는 말로 반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점은 댄 플래빈이 평생 동안 ‘헌정’을 실천했고, 종종 그의 작품을 감상적인 방식으로 사람이나 사건과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1963년부터 제작한 형광등 설치 작품은 재스퍼 존스, 솔 르윗, 도널드 저드와 같은 동시대 예술가 친구들에게 헌정된다. 앙리 마티스, 블라디미르 타틀린, 오토 프룬들리히, 바넷 뉴먼 등의 작가도 댄 플래빈의 작품 제목에 등장한다. 이러한 헌정은 소재의 익명성과 대조를 이루며, 비서사적이고 비인격적인 작품을 특정한 미학적, 정치적, 사회적 맥락에 연결시켰다.

빛의 헌정

untitled (to my dear bitch, Airily) 2, 1984
© Stephen Flavin / 2024, ProLitteris, Zurich
Creditline: The Dan Flavin Estate, Courtesy David Zwirner
Photo Credit: Florian Holzherr
untitled (to a man, George McGovern) 2, 1972
© Stephen Flavin / 2024, ProLitteris, Zurich
Creditline: Guggenheim Abu Dhabi
Photo Credit: Florian Holzherr

이번 전시는 댄 플래빈이 인물이나 특정 사건에 헌정했던 작품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목의 구성적 역할은 댄 플래빈이 정치적 사건을 언급할때 더욱 명료해진다. 예를 들어, 전쟁의 잔학 행위를 연상시키는 작품이 있는데,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작가 본인의 분명한 입장이라는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1차적 구조물 전시의 일환으로 제작한 ‘monument 4 for those who have been killed in ambush (to P.K. who reminded me about death)’가 그 예다. 1966년 뉴욕 유대인 박물관에서 <Young American and British Sculptors>이라는 제목으로 미니멀 아트 첫 번째 기관 전시가 열렸다.

untitled (to you, Heiner, with admiration and affection), 1973
© Stephen Flavin / 2024, ProLitteris, Zurich
Creditline: Bayerische Staatsgemäldesammlungen – Sammlung Moderne Kunst in der Pinakothek der Moderne München
Photo Credit: Florian Holzherr

댄 플래빈이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위해 헌정한 작품도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이번 전시에는 독일의 전설적인 미술 상인 하이너 프리드리히(Heiner Friedrich)에게 헌정하는 무제 작품 ‘untitled (to you, Heiner, with admiration and affection)’라는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프리드리히는 미국으로 이주한 후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디아 아트 재단(Dia Art Foundation)을 1974년 설립하여 1960년대와 1970년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영구적으로 설치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뮌헨의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에 있는 이 작품은 댄 플래빈이 관람객을 위해 전시 공간의 일부를 분리하기 위해 개발한 이른바 ‘barrier’라는 형식의 작품이다.

“monument” 7 for V. Tatlin, 1964
© Stephen Flavin / 2024, ProLitteris, Zurich
Creditline: Bayerische Staatsgemäldesammlungen – Sammlung Moderne Kunst in der Pinakothek der Moderne München, 2002 von PIN. Freunde der Pinakothek der Moderne
Photo Credit: Florian Holzherr
untitled (to Don Judd, colorist) 1-5, 1987
© Stephen Flavin / 2024, ProLitteris, Zurich
Creditline: Panza Collection, Mendrisio
Photo Credit: Florian Holzherr

다방면에 걸친 댄 플래빈의 헌정은 감정적인 차원을 만들어내고 작가의 예술적, 문학적, 개인적 관점을 드러낸다. 이는 곧 바젤 쿤스트뮤지엄 전시가 주목하는 지점이다. 전시실 전체를 가득 채우는 설치 작품 외에도 플래빈의 드로잉 작품도 전시된다. 여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초상화와 자연 세계의 묘사는 물론 스케치와 다이어그램도 포함된다. 작은 공책은 플래빈의 핵심적인 예술 도구였으며 30여 년에 걸친 그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일종의 아카이브다.


바젤 이야기

쿤스트할레 바젤의 관장 카를로 후버(Carlo Huber)와 쿤스트뮤지엄 바젤의 관장 프란츠 마이어(Franz Meyer)의 지원 덕분에 1975년 두 미술관에서 이중 전시가 열린 적이 있다. 후버는 댄 플래빈이 빛을 다루는 근본적인 본질에 열광하며 형광등을 이용한 설치 작품 5점을 선보였고, “매우 개인적인 성격과 큰 권위를 지닌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마이어는 작가와 함께 약 277점의 작품을 종이 위에 모아 전시했다. 드로잉, 에칭, 기술 도면은 물론 댄 플래빈이 바젤에서 작업하는 동안 특별한 애정을 갖게 된 스위스 르네상스 예술가 우르스 그라프의 작품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Untitled. In memory of Urs Graf
© Stephen Flavin / 2024, ProLitteris, Zurich
Creditline: Kunstmuseum Basel, Geschenk der Dia Art Foundation, New York
Photo Credit: Florian Holzherr
untitled (for John Heartfield) 3b, 1990
© Stephen Flavin / 2024, ProLitteris, Zurich
Creditline: The Dan Flavin Estate, Courtesy David Zwirner
Photo Credit: Florian Holzherr

댄 플래빈의 장소 특정적 작품인 (우르스 그라프를 추모하는) 무제 작품은 1975년부터 쿤스트뮤지엄 바젤의 메인 건물 안뜰에 전시되어 있다. 오늘날 분홍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빛의 분위기 있는 상호작용이 없는 안뜰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이 작품을 그대로 두어야 하는지에 대해 박물관 미술 위원회 내부에서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결국 디아 아트 재단에서 작품을 기증한 후에야 결정이 내려졌지만,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작품의 불은 켜지지 않았다. 이 에피소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지각 습관의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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