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세계관 설계자, 류성희
류성희에게 프로덕션 디자인이 무엇인지 묻자 “25년을 해도 새로운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일정한 규모나 재료로 정의할 수 없으며, 오직 이야기를 유기적인 세계관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가장 시네마틱한 디자인’을 주제로 2022년 9월호에서 이야기를 들려준 류성희를 3년 만에 만났다. 그사이 그의 세계는 스크린을 넘어 전시와 무대 등으로 유연하게 뻗어가고 있었다. 그에게 프로덕션 디자인이 무엇인지 묻자 “25년을 해도 새로운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일정한 규모나 재료로 정의할 수 없으며, 오직 이야기를 유기적인 세계관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이다.

먼저 근황이 궁금하다. 요즘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나?
짧은 휴식기를 가지며 내 인생의 등대 같은 영화들을 다시 꺼내 보고 있다. 계기는 우리 일에 성큼 들어온 AI 때문이다. 영화업계도 AI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팀도 작년부터 AI를 활용하는데, 효율 면에서는 확실히 놀랍다. 하지만 전문 인력 감축과 효율 중심의 시스템 재편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는 마음은 솔직히 복잡하다. 관객이 기꺼이 영화관을 찾게 하고, 영화를 곁에 두게 할 이유를 우리는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요즘은 이런 질문들을 곱씹고 있다.
최근작 〈어쩔수가없다〉 이야기를 해보자. 주인공 유만수(이병헌 분) 가족의 2층 주택이 지닌 상징성에 주목한 평이 많다.
프랑스풍 주택은 박찬욱 감독이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점찍어둔 배경이었다. 1970년대 중산층을 겨냥해 부동산 업자들이 만들어낸 유럽풍 주택에 대한 기묘한 환상이 유만수라는 캐릭터와 맞닿아 있었다. 그렇게 로케이션을 정했지만 주택이 다소 낡아 이야기에 맞게 손봐야 했다. 단순히 아름답고 세련된 공간으로 표현하는 대신, 캐릭터가 지닌 허상과 충동성을 녹여내고 싶었다. 거친 콘크리트 질감의 테라스를 덧붙이고 1층에는 장식적인 아치형 개구부를 설치한 이유다. 덕분에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쬘 때는 집에 희망과 온기가 감돌지만, 해가 지거나 앵글을 달리하면 공간의 각 요소가 날카롭고 수직적인 압박감을 드러낸다.
또 흥미롭게 몰입했던 인물이나 공간 디테일이 있다면?
구범모(이성민 분)의 음악 감상실을 만들 때 재미있었다. 그는 타자기와 필름 카메라를 쓰는 ‘아날로그 인간’이다. 그런 사람의 취미 방은 어떤 모습일까? 특히 내 마음을 끈 건, 특수 제지 회사에 근무한 그의 경력과 직업적 자부심이었다. 오디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방에 계란 판을 붙여 방음실을 마련하곤 하는데, 구범모라면 자신이 좋아해 마지않는 종이를 겹겹이 포개 방음판을 만들지 않았을까 상상했다. 제지 회사 기술자의 정체성과 음악을 향한 애정이 교차하는 공간을 표현하고 싶었다.


매번 새 캐릭터를 분석하다 보면 여러 인생을 살아보는 기분이 들 것 같다.
그게 참 재미있다. 한편으로는 리얼리즘에 발을 붙여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상상력을 발동해야 하는 일과 사실을 재현해야 하는 일을 동시에 수행하며 그 균형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어쩔수가없다〉 직전에 작업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좋은 예다.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반세기에 걸친 서사를 다뤄야 했기에 팀 전체가 어느 때보다 리서치와 고증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시대극이기 때문일까?
드라마라는 장르의 대중적 영향력이 크기 때문인 것 같다. 동시에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아 프로덕션 디자인 팀이 거의 모든 것을 선정하고 만들어야 하는 현실도 한몫한다. 시대별 세트장이나 소품 창고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보니 배우가 디뎌야 하는 돌바닥 하나부터 마을까지 새로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대극은 사실상 SF와 다를 바 없다. 그만큼 모든 것을 공부해야 한다. 〈폭싹 속았수다〉의 경우 육지에 하나의 섬을 만들었다고 할 만큼 내 커리어 중 가장 압도적인 규모의 세트였다. 1950년대 제주 도동리 마을부터 시장의 좌판, 시내 골목골목까지 만들었는데, 그 과정 자체가 디자이너의 생각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담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일은 단순히 무대와 배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시각적 세계관을 구축하는 작업이라는 걸 깨달았다. 진정성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 진심이 전달된다.
〈마스크걸〉은 웹툰 원작이어서 이미 독자가 가진 시각적 세계관이 있다. 이런 경우 프로덕션 디자인은 어떻게 출발하는가?
나는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처음부터 세 번까지 반복해서 읽는 시나리오 리딩을 중요하게 여긴다. 관객 입장에서 처음 느끼는 감정과 분위기에 집중한다. 〈마스크걸〉은 만화적 감수성과 우화적 뉘앙스가 공존하는 작품이다. 특히 인물의 삶이 기이한 꿈처럼 느껴졌다. 마치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처럼, 박수갈채를 받는 달콤한 순간과 모든 것이 발가벗겨진 듯한 끔찍한 악몽이 교차하는 장면이 어른거렸다. 이러한 극적인 양면성을 인물과 공간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것이 목표였다.

사진 ©넷플릭스코리아

사진 ©넷플릭스코리아

지난 10월 에르메스 메종 도산에서 열린 ‘쁘띠 아쉬’의 공간 연출에 참여하며 새로운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영화 미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주인공이 배우가 아니라 쁘띠 아쉬였을 뿐, ‘3대가 함께 살던 집’이라는 설정을 통해 주인공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일은 여전히 프로덕션 디자인의 영역이다. 영화 세트장을 재현하는 콘셉트였기에 촬영용 조명을 활용해 시간대와 공간의 분위기를 구현했는데, 관람객들이 특히 흥미롭게 반응했다. 공들여 만든 세트를 촬영 후 곧바로 허물어야 했던 영화 현장의 아쉬움을 이번 전시에서 달랠 수 있어 더욱 의미 있었다.
2025년 바밍타이거의 ‘비둘기와 플라스틱’ 콘서트 무대 미술, 2024년 RM의 〈Come Back to Me〉 뮤직비디오 미술, 2023년 한국영화박물관 〈씬의 설계: 미술감독이 디자인한 영화 속 세계〉 전시 참여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이름을 올렸다. 이러한 활동들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까?
그렇다. 주인공과 상황이 달라져도 결국 이야기를 전하고 경험을 나누는 것뿐이다. 나는 스토리텔링 그 자체를 좋아한다. 영화가 아니더라도 디자이너로서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몰입하게 하고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내 작업의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덕션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유연하게 변모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이런 일도 할 수 있구나’ 싶은 순간이 생기는 것 같다.
학부 때 도예를 전공했던 내가 영화계로 넘어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손을 뻗어도 닿지 못할 것 같은 막연한 거리감 때문이었다. 스탠리 큐브릭과 왕가위의 작품 세계를 흠모하면서도 정작 도예를 하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냥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고 공부를 시작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접점을 확장하려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그냥 해보자’는 소박한 결심에서 많은 일이 비롯된다. 이 과정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시작을 꿈꾸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없이 기쁠 것이다. 나에게도 이렇게 하나하나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큰 즐거움이자 동력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영화 산업에서의 AI에 관해서도 생각을 묻고 싶다.
긍정적으로 보면 우리 현장에서 부족한 능력을 보완할 수 있는 도구가 생겼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SF 영화 제작에는 콘셉트 아티스트, 프로퍼티 마스터, 머신 디자이너 등 다양한 전문 인력이 필요한데, 현재 국내에는 이런 전문가들이 충분하지 않다. 이런 직군에 AI를 활용하면 한국적인 SF 영화 제작에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그와 별개로 영화 고유의 정서적 울림과 영화관의 가치는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AI로 제작한 영상이 쏟아지고 손안의 화면으로 영상을 무한히 볼 수 있는 시대에 관객은 영화관을 찾아야 할 필요성을 점점 덜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집에서 혼자 보는 경험과 영화관에서 감각을 공유하는 경험은 완전히 다르다. 개인이 점점 원자화되는 사회일수록 영화관은 공동의 경험과 기억을 나누는 자리로 더욱 절실해진다. 그 차이를 관객이 분명히 느끼도록 만들려면 디자이너는 무엇을 기획해야 할까. 요즘 나도 그 질문을 곱씹으며 고민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평소 영감을 얻거나 참고하는 사이트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영화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IMDb를 자주 본다. 작품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그 기록이 다시 인물별로 분류되어 있어 배우뿐 아니라 스태프들의 이력도 확인할 수 있다. 어떤 작품에서 누구를 만나 영향을 받았는지가 데이터로 보인다. 쉴 때는 시각적인 자료는 일부러 조금 멀리한다. 대신 책을 보는데, 언젠가부터 동양 철학 관련 책이 재미있다. 음악도 좋아한다. 한 편의 명곡은 때로 한 편의 영화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