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시네마틱한 디자인, 류성희
한국에서 가장 창의적인 프로덕션 디자이너를 꼽는다면 단연 류성희다. 그는 세트나 소품 만드는 것을 넘어서 영화적 세계관을 확장하는 프로덕션 디자이너다.
한국에서 가장 창의적인 프로덕션 디자이너를 꼽는다면 단연 류성희다. 〈아가씨〉 〈괴물〉 〈달콤한 인생〉 〈올드보이〉 등 세련되거나 독특한 미장센으로 화제를 모은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는 늘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한 개념조차 미미한 시절, 포트폴리오를 들고 직접 제작사의 문을 두드리며 충무로에 출사표를 던진 그는 칸 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벌칸상을 수상하며 많은 후배 디자이너들의 귀감이 되었다. 흔히 영화에 관심 좀 있는 사람은 류성희표 벽지를 한눈에 알아보기도 하는데 그가 가진 힘을 패턴에만 한정 짓는 건 엄청난 오산이다. 그는 세트나 소품 만드는 것을 넘어서 영화적 세계관을 확장하는 프로덕션 디자이너다.
〈아가씨〉 이후 6년 만에 나온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휘몰아치는 감정보다는 은근하게 숨겨진 감정에 집중한 작품이다. 산해경이 상징적 모티브이며 산과 바다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영화미술의 핵심은 무엇이었나?
〈헤어질 결심〉은 감정의 낙폭이 크지 않은 이야기다. 범죄 영화의 플롯이 흐르는 가운데 두 사람의 감정이 미묘하게 흐른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떠오른 주요 상징은 ‘산’, ‘바다’, ‘안개’, ‘산해경’ 같은 것이었다. 나는 시나리오를 읽을 때 이런 식으로 포착한 키워드나 감정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메모를 잘 하는 편이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각본을 가장 먼저 읽는 1차 관람객인 동시에 제작 과정에서 개입되는 스태프와 배우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사람이기도 하기에 초반의 리듬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헤어질 결심〉 각본을 읽고 메모한 단어들은 지극히 모호하고 관념적이었다. 이것들을 머릿속에 굴려놓다 보니 파도와 파장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극 중 해준(박해일 분)과 서래(탕웨이 분)는 녹음 앱을 매개로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여느 멜로 영화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하진 않는다. 이 복잡 미묘한 기류를 담고자 파동을 시각화한 것이 이번 영화미술의 핵심이었다. 자칫 사변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관념적 주제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듯해 기분 좋았다.
산 혹은 바다, 초록 혹은 파랑으로 보이는 모호한 디자인이 서사 전반에 힘을 실었다.
“공자님 말씀에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난 인자한 사람이 아닙니다. 난 바다가 좋아요”라는 서래의 대사가 있다. 그때 해준은 자기도 모르게 “나도”라고 내뱉는다. 해준과 서래는 계속해서 바다로 나아가는 과정에 놓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바다를 향한 두 사람의 갈망을 단지 바다로만 보여준다면 서사를 가두는 디자인일 테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능선이 파도처럼 보이고 바다에 이는 물결이 산에서 연결되듯 그들의 호와 불호가 결국 물줄기로 이어지는 디자인이기를 의도했다. 산해경에서 미술적으로 많은 영감을 받았고 극 중 서래가 한국어를 익히는 책 〈산해경〉에 이런 의도가 가장 잘 드러난다. 개인적으로 〈산해경〉은 〈헤어질 결심〉에서 가장 흡족한 작업이다.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한 일러스트레이션이 많아서 아쉽다.
해준의 주요 공간인 경찰서는 전형성에서 벗어난 클래식한 매력으로 화제를 모았다. 어떤 의도였나?
경찰서는 박찬욱 감독이 콕 집어 요구한 공간이었다. 한국 영화에 늘 등장하는 뻔한 경찰서가 아니면 좋겠다고 했는데 그게 무엇인지에 대해선 구체적인 답을 듣지 못했다. 전형적이지 않으면서도 해준의 캐릭터를 대변할 만한 경찰서를 고민하던 차 부산에서 한 은행을 찾았다. 넓은 바닥과 벽체, 창문 그리고 클래식함이 있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은행이었다. 거기에 벽면과 기둥을 만들어 빈 공간에 새로운 질서와 질감을 부여했다. 취조실을 제외한 경찰서 신은 모두 여기서 촬영한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경찰서로 보일 수도 있기에 걱정했는데, 사실 일반적이지 않은 것과 실제로 있을 법한 것 사이의 균형을 만드는 일 또한 박찬욱 감독의 프로덕션 디자이너가 맡은 역할이기도 하다.(웃음)
작품의 전환점에 쓰인 층계 앱과 녹음 앱도 새롭게 디자인했다. 스마트 장치를 접목한 영화미술 또한 새로운 시도였을 텐데.
스마트폰에 탑재된 기본 앱을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디자인하자고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헤어질 결심〉은 ‘마침내’, ‘단일한’, ‘붕괴’ 같은 문어체를 자주 사용한다. 자칫 올드해 보일 수도 있는 만큼 동시대적 감각을 담고자 했다. 특히 녹음 앱은 좋아하는 콘셉트 중 하나였다. 앱의 시각적 주제는 ‘서래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것은 무엇일까?’였다. 은근한 복선인 셈이다. 바닷물이 밀려와 모래를 덮기 전 서래가 마주했을 법한 풍경을 시각적 요소로 표현했는데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간혹 세트나 소품만이 영화미술의 정수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영화 속 그래픽이나 UI/UX까지 정교하게 구현할 수 있는 시대인 만큼 프로덕션 디자인의 범주도 좀 더 확대해야 한다.
연이어 개봉한 〈외계+인 1부〉는 고려 시대의 도사들부터 2022년 인간의 몸속에 수감된 외계인 죄수까지 온갖 인물과 시대를 망라한다. 작품에서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무엇인가?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지만 프로덕션 디자이너 또한 그 안에 담긴 세계관을 함께 구축한다. 등장인물은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어떠한 가치에 의해 움직이는지 영화미술로써 말하는 것이다. 〈외계+인 1부〉에서 가장 집중한 것은 신검 디자인이었다. 한때 지구의 에너지원이 석유였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는 액체 금속으로 이루어진 신검이 주요 자원이다. 물론 허구와 상상의 결과물이지만 이러한 소품에 개연성을 담는 과정에서 세계관이 구축되기에 무엇보다 디테일이 중요했다. 벽란정, 밀본 등 과거와 관련된 공간을 대부분 디자인했고 이 밖에도 안상수 디자이너의 타이포그래피를 적용한 게 기억에 남는다. 훈민정음처럼 음성 과학을 담은 아름다운 외계어 서체로, 한글을 입력하면 곧 외계어로 변환되는 프로그램까지 개발해 놀라운 수준을 보여준다. 가드(김우빈 분)가 사는 집과 우주선에 몇 차례 등장하며 2부에서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영화감독과 작업한 만큼 세계관의 충돌도 있을 듯하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유연해야 한다. 감독마다 취향이 다르고 소통하는 방식도 다르다.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지지 않기도 하며 우기고 싶은 순간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세계관은 결국 감독이 방점을 찍는 것이다. 각 감독의 성향에 따라 기본값을 잘 설정해두는 게 나름의 노하우랄까?(웃음)
한국인 최초로 칸 영화제 벌칸상을 받은 〈아가씨〉는 류성희 감독식 미장센의 극치를 보여준다. 시네마스코프 촬영으로 아름다움이 더 극대화되었다. 일본인인 척하면서 서구 문물을 찬양하는 조선인 코우즈키(조진웅 분)의 서재가 특히 인상적이다.
서재는 〈아가씨〉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다. 애너모픽 렌즈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공간의 층위를 어떻게 보여줄지 고심했다. 낭독회가 열리는 무대는 코우즈키의 탐미주의적 욕망이 응축된 곳이다. 그 안에 담긴 것을 한 번에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층을 계속 쌓았다. 공간의 단차를 만들고 지하실을 숨기고 다다미 아래 수로를 설계해 그의 세계가 온전히 드러나기까지 관객이 끊임없이 상상하기를 바랐다. 숙희(김태리 분)가 히데코(김민희 분)를 데리러 갈 때 처음 이곳이 등장하는데 서재 문을 열었을 때 카메라 높이가 3m 정도라면 그 안으로 들어갈수록 층고가 높아지고 바닥이 낮아져 카메라 앵글은 6m에 이르는 거대한 공간을 비추게 된다. 단순히 큰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크다’라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 프로덕션 디자인은 이런 지점에서 공간 디자인이나 건축과는 명확하게 다르다. 철저히 렌즈에 입각한 디자인이고 이로 인해 영화는 판타지가 된다. 이처럼 지극히 영화적 공간을 만드는 것은 박찬욱 감독과 작업할 때 가장 신나는 일이기도 하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로서 시네마의 가능성을 확장할 기회를 갖게 되니까. 단순히 동양적 미감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벌칸상을 받은 건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한 〈아가씨〉의 성취는 기술과 결합해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고 가장 시네마틱한 공간을 구현했다는 것이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정체될 틈이 없다. 마치 산해경처럼.”
코우즈키의 저택은 CG(외관)와 세트(내부)와 로케이션 촬영(정원)을 결합한 디자인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로웠다.
언뜻 보기에는 그야말로 클래식한 영화지만 VFX 기술이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었다. 〈헤어질 결심〉도 마찬가지다. 산봉우리도, 해준과 서래가 오른 절벽도, 밀려오는 파도도 CG 없이는 온전히 구현하기 힘들었을 거다. 머지않아 야외 촬영을 하지 않는 시대가 오지 않을까? 외부에서 만들어온 배경을 LED 세트에 틀고 그 안에서 연기를 하는 시스템은 예산, 시간 등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것이다. 실제로 〈일장춘몽〉도 버추얼 스튜디오에서 찍었고 앞으로 이런 식의 테크놀로지를 좀 더 적극적으로 도모하고자 한다. 2000년대 초반 디지털카메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 우리는 필름 카메라와 헤어질 수 있을지 의문을 가졌지만 이제는 모두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심지어 아이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영화 촬영을 할 수 있다. 한국은 이제 SF의 시작 단계라고 본다. 아직 수요가 많지 않으니 작업이 세분화되지 않았고 프로덕션 디자인 과정에서 게임업계 디자이너들과 협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OTT 시장이 커지면서 장르물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VFX를 활용한 프로덕션 디자이너의 새로운 직함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신기술의 도입에 상당히 열려 있는 편인데 이유는 명확하다. 옛날이야기를 하더라도 동시대성을 반영할 때 더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포도디자인스튜디오는 어떤 방식으로 일하나? 스튜디오 이름에 담긴 의미도 궁금하다.
스튜디오 로고는 영문 ‘PODO’로 표기하는데 뜻 자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과일 ‘포도’에서 비롯되었다. 포도를 적합한 온도에서 잘 숙성하면 맛있는 와인이 된다. 와인은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도 하고 취하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을 판타지로 안내할 수 있는 과일이 있다면 단연 포도가 아닐까. 이런 디오니소스적 의미를 담아 박찬욱 감독이 지은 이름이다.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헤쳐 모여’ 식으로 팀을 꾸렸는데 이제는 다른 방식을 모색하고 있다. 시각 매체에 대한 수요도 많아지고 나 또한 역량이 쌓이면서 한 번에 두세 작품 정도는 핸들링이 가능해졌다.
앞서 얘기한 작품들과 달리 〈암살〉이나 〈국제시장〉은 판타지 구현보다는 시대적 배경을 재현하는 데 좀 더 무게를 두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
〈고지전〉과 〈암살〉이다. 그전까지 전쟁 영화를 해보고 싶다거나 자신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고지전〉은 산 하나를 두고 땅따먹기 하듯 싸우며 전개되는 구조가 흥미로웠다. 영화를 보면 대체 어디를 디자인한 건가 싶을 수도 있지만 사실 포크레인으로 흙을 퍼다 나르며 지형을 만들고 방공호도 설계했다. 불이 나서 쉬고 있는 산 하나를 전체적으로 조각하는 작업에 가까웠다. 항상 스튜디오 안에서만 작업하다가 어느 날 문득 흙 밟으며 디자인을 하다니.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리얼리즘이었다. 나는 해보지 않은 것을 할 때 강력한 동기가 생긴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새롭게 시도하는 작품을 선택하게 된다. 〈암살〉은 규모와 시대가 새로웠다. 거대한 세계를 구현하고 싶다는 열망도 있었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가 많지 않았다. 일본 문물과 서구 문물이 혼합된 건축양식에 관객들이 거부감을 갖게 될까 봐 걱정도 많았는데 다행히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다.
류성희 감독은 국내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의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2000년대 초반부터 여성 감독으로 영화계에 몸담고 있다. 롱런의 비결은 무엇인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일할 당시 나는 최약체였다. 아시아인이었고 여성이었다. 상처받지 않고, 심플하게 생각하고, 무조건 행동으로 실행하는 추진력 같은 것을 습관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한국 영화업계는 오히려 자신 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운이 좋았다. 과거에 영화는 남성 권력 위주의 산업이었지만 내가 일을 시작한 시기부터 업계 문화가 바뀌고 있었다. 흔히 박찬욱, 봉준호가 룸살롱 비즈니스를 없앴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런 새로운 문화가 수혈될 때 나 역시 새로운 피로서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었으니까. 힘의 논리 때문에 부대낀 적도 물론 많지만 결국 원론적인 방법으로 이겨냈다. 여성 후배들이 기대한 답변은 아닐 수도 있겠으나 원칙을 고집한 나의 고지식함이 오래 버틴 비결이다. 선례가 없는 길을 걸을 땐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직진해야 한다. 때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 별명이 사오정이기도 하다.(웃음) 사실 당시에는 여성 감독뿐 아니라 프로덕션 디자이너도 거의 없었다. 미술하는 사람이 영화를 꿈꾼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결국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고마운 질문이고 내 대답은 단순하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로서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앞으로의 계획은?
도예를 전공하면서 느낀 가장 큰 갈증은 대중을 만나기까지 너무 벽이 많다는 것이었다. 영화의 매력 중 하나는 불특정 다수와 빠르게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정체될 틈이 없는 직업이다. 마치 산해경처럼 말이다. 내 작업을 유물로 남기기보다는 동시대적 취향과 고민을 반영한 결과물로 대중과 소통하고 싶다.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나 뮤직비디오까지도 매체를 확장하고자 마음먹은 이유다. 최근 작업한 드라마 〈작은 아씨들〉이 곧 tvN에서 방영할 예정이며 내년에는 넷플릭스 시리즈 드라마 〈마스크걸〉이 공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