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에서 기회를 찾는 도시, 2026 방콕 디자인 위크 리뷰
방콕 디자인 위크가 올해로 9회를 맞이했다. 태국 창조경제청과 방콕시가 주관하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디자인 행사로, 지난 1월 29일부터 2월 6일까지 방콕 시내 전역에서 열렸다. 이번 행사에서는 서구식 디자인의 전형성에서 탈피해 독자적인 정체성을 구축해나가는 태국 디자인 생태계의 현재를 만날 수 있었다.

응답하라, 디자인

행사 기간 내내 방콕 시내에선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난해 10월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시리낏 왕대비를 추모하는 애도 행렬이 이어졌는데(태국 정부는 1년간의 공식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공기 중에 나라의 어른을 잃었다는 상실감이 축제(방콕 디자인 위크)의 환희와 뒤섞여 흘렀다. 그리고 이러한 슬픔 가운데 디자인에 대한 사유는 한층 깊어진 듯했다. 전년도까지 방콕 디자인 위크가 ‘디자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췄다면, 올해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디자인을 통해 생존과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전쟁과 기후 위기, 지정학적 갈등의 국면 속에서 디자인에 길을 물은 것이다. 올해 행사의 주제인 ‘디자인 S/O/S’에서도 이런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S, O, S란 각각 안정된 내수(Secure Domestic), (해외) 진출의 기회(Outreach Opportunities), 지속 가능한 미래(Sustainable Future)를 뜻하며 이로부터 방콕 디자인 생태계의 지향점을 읽을 수 있었다. 200여 개의 디자인 쇼케이스와 전시, 30여 개의 인재 개발 프로그램 등 350개 이상의 프로그램이 차로엔크룽과 딸랏노이, 프라나콘, 빠크롱딸랏, 방람푸와 카오산 등 방콕 크리에이티브 지구 전역에서 열렸다. 지역사회와 디자이너가 협력해 마련한 토크, 워크숍, 이벤트 등이 행사 기간 내내 이어졌으며, 16개국 이상의 디자이너가 참여한 국제 협력 프로그램과 디자인 마켓이 더해져 태국 디자인 고유의 역동성을 드러냈다.



앞서 소개한 3개의 키워드 중 지속 가능성은 올해 방콕 디자인 위크 전반을 아우르는 프레임이었다. 방콕 시청 광장에서 펼쳐진 ‘하이라인 방콕’이 대표적이다. 공교롭게도 애도 기간과 맞물려 지난해 같은 장소에서 열린 전시에 비하면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의미마저 축소된 것은 아니었다. 프로젝트를 맡은 HAS 디자인 & 리서치는 지역에서 생산하는 패브릭을 광장 한편의 가로등 상부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뜨려 파빌리온을 디자인했다. 낮에는 캐노피, 밤에는 가로등 불빛을 산란시키는 역할을 하는 이 설치물은 비교적 단순한 아이디어로 역동적인 공공 공간을 창출했다. 파빌리온에 활용한 패브릭은 행사를 마친 후 지역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샘플로 제공할 예정이다. 말 그대로 제로 웨이스트에 방점을 둔 작품인 셈. 이 밖에 대규모 플리 마켓에선 재사용이 가능한 비계 구조와 팔레트 등을 활용해 사후 폐기물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자국 문화를 자양분 삼은 디자인 생태계
태국은 동남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서양 열강의 식민지를 겪지 않은 국가다. 20세기 프랑스와의 조약으로 당시 영토의 상당 부분(현 라오스, 캄보디아)을 넘겨주긴 했지만, 핵심 영토를 지키며 국가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태국은 자국의 역사와 전통, 문화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된 몇 안 되는 아시아 국가가 되었다. 단절 없는 문화와 역사의 계승은 태국의 디자인 DNA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메인 기획 전시 중 하나인 〈Distill〉에서 이런 면모가 돋보였다. 전문 디자이너와 디자인 전공 학생들이 참여한 이 전시에선 지역 재료와 제작 기술, 문화, 기후, 사회, 자연, 종교 등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제품을 선보였다. 이러한 기조는 그래픽 디자인 전시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Voice of Fonts〉전에선 태국의 버내큘러 서체를 독창적인 연출과 함께 조망했다.


이번 행사에선 근현대 산업 기반의 전시에도 힘을 쏟은 모양새였다. 페어형 전시 〈D/Objects〉가 그 예다. 30여 명의 디자이너 및 디자인 브랜드가 참가한 이 전시의 주제는 ‘기원을 재창조하다(Reinvent the Origin)’로 과거의 원형을 현대적 라이프스타일과 기술로 재구성해 미래 디자인의 프로토타입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팝업 스토어 ‘트레이드마크 방콕’은 로컬 브랜드를 큐레이션해 재조명하는 자리였다. 아로마 흡입기, 각종 소스, 건전지 등 방콕 기반 브랜드들의 제품을 한정판으로 리디자인하거나 특별 구성으로 변주했다.



결은 조금 다르지만 도시의 맥락과 흔적을 활용한 사례도 있었다. 카오산 지역의 뉴 월드New World는 한때 지역을 대표하던 쇼핑몰이었지만 도심 공동화에 따라 오랫동안 버려진 채 방치되었다. 한때 저소득 도시 노동자들이 몰 안에 임시 건물을 짓고 생활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들마저 떠나며 완전히 폐허가 됐다. 이번 방콕 디자인 위크에선 이 건물을 배경 삼아 장소 특정적 전시를 선보였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조각가 윗 삠빠깐차나뽕Wit Pimpakanchanapong이 제작한 키네틱 조각 ‘Mai Ya Rap’. 미모사를 모티브로 경량 금속 프레임과 반투명 컬러 패널 등을 활용해 만든 8m 높이의
이 거대한 설치물은 폐허 한가운데서 강력한 아우라를 발산했다.


세계를 향해 열린 문
지역 정체성에 입각한 전시가 주를 이뤘지만 그렇다고 방콕 디자인 위크가 쇄국적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러 국가들과 함께 호흡하는 모습이 도심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국제 공모 포스터 프로젝트인 〈Fight for Kindness〉도 그중 하나다. 비영리 조직인 타입캠퍼스TypeCampus가 기획하고 제타폰트Zetafonts가 후원한 이 프로젝트는 친절의 가치를 기념하는 그래픽 디자이너의 포스터들을 영상으로 선보였다.

〈Outtakes〉전은 크로스 컬처의 전형을 보여줬다. 이번 행사의 사실상 노른자위라고 할 수 있는 방콕 중앙우체국에서 열린 이 전시는 한국의 디자인 에이전시 베이그가 방콕의 PBB&O, 팜그룹Farmgroup과 공동 기획한 프로젝트다. 지난해 온라인 전시로 선공개한 바 있는데 당시 클라이언트에게 채택되지 못한 B안도 함께 전시하는 방식으로 눈길을 끌었다. 방콕 디자인 위크에선 기본 포맷을 유지하되 온라인에서 전하기 어려웠던 고민과 선택의 과정을 드러내는 데 방점을 두었다. 지난 온라인 전시에서 시각적 유희의 매개 역할을 했던 맥 OS의 폴더 아이콘은 거대한 전시 구조물로 치환됐다. 전시장 가득 정렬 배치한 구조물을 열람할 때 여러 디자인 프로젝트의 과정을 살필 수 있도록 했다. 기호학적 관점에서 보면 실제 물건(폴더)을 양식화한 기표(디지털 아이콘)가 폴더형 구조물로 재현된 셈이다. 이에 베이그 장재용 대표는 “관객이 폴더를 넘기며 정보를 읽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디자인을 이해하는 즐거운 경험이 되도록 구성했다”라고 말했다. 행사 기간 내내 전시장은 관람객들로 장사진을 이뤘으며, 여러 나라의 디자인 관계자들이 차기 전시의 협업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한편 전시 장소 선정 자체가 문화적 유대감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 경우도 있었다. 홍콩은 지난해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근대건축 아카이빙 전시를 순회전 형식으로 선보였는데, 이미 지난해 전시를 관람한 이들에겐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장소라는 층위가 더해지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전시가 열린 곳은 19세기 태국 왕족의 일원이었던 솜못 아몬판 왕자의 궁전. 구도심에 위치한 이곳은 사실상 폐허로 남아 있는데 여러 현실적 이유로 소멸해가는 홍콩의 근대건축 유산 자료가 붕괴 직전의 공간 안에서 펼쳐지며 그 의미를 강화했다. 전시는 지난해 베니스에서 선보인 실물 건축 실측 도면 일부를 발췌해 소개했는데 트로피컬 모더니즘이라는 홍콩 특유의 건축양식이 인류세에 접어든 우리에게 미래의 단서를 마련해준다. 전시에서 소개한 일련의 근대건축 자료는 과거와 미래의 공존이라는 방콕 디자인 위크의 정신적 얼개와도 맞닿아 있었다. 이처럼 올해 방콕 디자인 위크는 강력한 정체성만큼이나 유연하고 폭넓은 수용의 자세를 보여줬다.



Interview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이번 전시를 기획했나?
지난해 방콕 디자인 위크에서 관객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태국의 전시 문화를 경험했다. 이번 전시 역시 소통을 강조해 단순히 보는 전시를 넘어 직접 참여하며 완성해가는 공간으로 구성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느낀 태국 고유의 시각 언어가 있다면?
위트와 유머. 가볍게 소비되는 요소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분명한 태도와 감정이 담겨 있다. 이러한 태도와 감정은 글로벌 트렌드를 따르기보다 태국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솔직하고 정확하게 드러내는 디자인 방식으로 이어진다. 방콕이라는 도시가 가진 복합적인 에너지와 태국 특유의 강렬한 시각 문화가 어우러지며 독특하고 인상적인 시각 이미지를 만든다. 특히 컬러와 일러스트레이션이 지닌 매력은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선 이러한 지점이 간결하고 미니멀한 한국의 디자인과 만나 흥미로운 긴장감과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Interview

〈Outtakes〉전이 열린 장소는 방콕 디자인 위크 내에서도 메인 스폿이었다. 많은 관람객이 방문할 것을 예상하고 이에 대비해 작품을 배치하고 동선을 설계했다. 또한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액티비티 구성에도 주력했다. 각 디자인 에이전시의 포트폴리오가 담긴 빅 폴더의 크기와 구조를 최적화하는 데에서 태국의 협력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현경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Outtakes〉전 기획
태국 디자인의 넥스트 제너레이션
도시 전역에서 펼쳐지는 거점형 행사에서 주최 측의 강력한 이니셔티브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단단한 파트너십이다. 올해 방콕 디자인 위크가 성료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기관과 기업, 학교의 적극적 참여가 있었다. 방콕의 대표적 복합 쇼핑몰 ‘엠스피어EmSphere’에선 11개 대학 학생의 연합 전시 〈Something tO Stay___on〉이 열렸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이미 알아챘을 테지만 이 전시의 타이틀은 올해 방콕 디자인 위크의 주제 ‘디자인 S/O/S’의 유희적 재해석이다. 한편에선 지속 가능성을 주제로 폐자재를 활용한 작품이나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킥복싱, 차양 문화 등 자국 문화의 정체성을 디자인에 반영한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한편 실파콘 대학교에서는 ‘2025 올해의 디자이너(Designer of the Year 2025)’ 수상자들의 전시가 열렸다. 태국의 창의적인 디자이너를 지원하기 위해 실파콘 대학교가 2004년에 제정한 어워드로 현재는 장식예술학부가 정부 및 디자인 기관과 협력해 프로젝트를 주도한다. 전시장에선 태국 디자인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19명의 수상자를 소개했는데 본상인 ‘올해의 디자이너’와 공로상 외에도 신진 디자이너들을 선정하며 태국 디자인의 미래를 밝혔다. 가구 디자이너 아랏 띠라빠닛빤Arrat Teerapanichpan, 주얼리 디자이너 티따뽄 마하완Thitaporn Mahawan, 그래픽 디자이너 꼰까녹 딴띠수완나Kornkanok Tantisuwanna 등 총 7명의 수상자는 자국 디자인 생태계의 내일을 이끌어갈 주역이었다.


이처럼 방콕 디자인 위크는 차세대 디자이너들의 활약으로 더욱 생기가 넘쳤다. 11일간 이어진 이 디자인 축제는 불안과 위기 속에서도 시대를 가로지르는 문화 정체성, 지역을 아우르는 포용성, 그리고 멈추지 않는 창작열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