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땅의 관계를 조율하는 건축가, 조병수 조병수건축연구소 대표
한국적 미학을 ‘막’으로 규정하며 오랜 세월 건축으로 직접 실천해온 조병수 건축가. 그에게 ‘막’이란 설계의 방향성 그 이상이다. 글, 회화, 도예 등 다양한 작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적 미학을 ‘막’으로 규정하며 오랜 세월 건축으로 직접 실천해온 조병수 건축가. 그에게 ‘막’이란 설계의 방향성 그 이상이다. 자연의 변화무쌍함과 땅의 타고난 형태를 인정하고, 주어진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 그의 작품 곳곳에서 이러한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디자인하우스가 올해 야심 차게 준비한 캠페인 ‘크리에이티브, 막’ 시리즈 인터뷰이로 그를 선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 막은 작품이 상황과 재료에 반응하여 형성되는 과정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올해 새롭게 열리는 글로벌 디자인 어워드 ‘DBEW 어워드’의 심사위원으로 합류했다.
교육의 과정, 사고의 구조를 중요하게 평가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건축과 디자인은 완성된 형태 그 자체보다 결과에 이르기까지 어떤 질문을 던졌고 어떤 태도로 임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DBEW 어워드는 바로 그 지점에 주목하겠다고 선언했기에 인상 깊었다. ‘동서를 넘어서는 디자인’이라는 미션 역시 디자인을 통해 오늘날 인류의 보편적 문제를 사유할 방법을 묻는다는 점에서 나의 건축적 관심사와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그런 의미에서 심사에서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치관, 재료와 환경에 대한 태도, 공동 창작의 진정성 등을 중요하게 고려할 예정이다. 수치나 언어로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암묵적인 감각’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드러나는지도 주된 판단 기준이 될 것이다.
지난해 4월에는 푸오리살로네에서 이탈리아의 디자인 큐레이팅 그룹 ‘모스카파트너스’와 전시를, 12월에는 뉴욕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푸오리살로네에서 개최한 〈땅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땅, 숲, 막〉전은 땅과 자연, 인간의 관계를 다시 묻고 싶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건축 전시라기보다는 건축이 인간과 땅 사이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가까웠다. 정치적 의도를 내포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가자 지구에서의 분쟁 등 영토 관련 국제 갈등이 많다 보니 의도치 않게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뉴욕에서의 전시 〈The Low Land〉에서는 건축 모형, 스케치, 사진, 직접 만든 막사발 등을 소개했다. 서구의 관람객들에게 한국적인 건축 철학이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했다. 덜 다듬어진 흔적이나 과정이 드러난 작업물에서 따뜻함과 인간적인 면모를 느꼈다는 반응이 많았다. 한국적 정서가 고요하면서도 편안하게 느껴졌다는 이야기가 무척 많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건축 철학을 건축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표현하는 활동이 늘어난 것 같다.
그동안 건축을 항상 사고의 총체적인 행위라고 여겨왔다. 그리고 내 생각의 결과물이 꼭 건물로만 표현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내게 전시, 도예, 글쓰기는 건축으로 미처 다 담아내기 어려운 생각을 제각기 다른 밀도로 풀어내는 방법이다. 요즘도 건축 설계와 집필, 전시 준비를 병행하고 있다. 앞으로도 건축적 사고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매체로 ‘번역’하는 일을 지속할 예정이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시하고 ‘막’의 미학을 강조하는 건축 철학을 오랫동안 관철해왔다.
어느 날 갑자기 ‘막’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은 아니다. 20대 초반에 막사발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의 전통 미학을 감각적인 경험으로 이해하게 된 순간이다. 이 체험을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시절 ‘경험과 인식’이라는 석사 논문으로 체계화하면서 내 건축 철학을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 만들어졌다. 땅과 자연에 대해서는 10여 년 전부터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건축 설계를 할 때도 기존 지형을 잘 살리고 인간에 의해 훼손된 부분은 회복시키고자 했다. 자연은 건축가가 강조해서 드러내는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건축이 뒤로 물러날 때 비로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물론 건축 설계를 할 때 막의 미학을 인위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쓴 것은 아니다. 다만 건물과 자연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건설 과정에서 발생하는 변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대처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막의 미학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 지형과 땅의 맥락이 대부분 사라진 대도시에서는 어떻게 건축물을 설계하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할 수 있도록 건축적 요소를 더한다. 박서보 화백의 자택 겸 갤러리 ‘기지’가 대표적이다. 필지의 두 면은 연립주택, 한 면은 단독주택, 나머지 한 면은 큰 빌딩이 가로막고 있어 완전히 갇힌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설계가 매우 어려웠는데, 고민 끝에 주변 환경과 건물 사이에 면사포처럼 알루미늄 스크린을 설치해 새로운 경계를 만들었다. 스크린 안에서는 작지만 조금이라도 자연을 누릴 수 있도록 조경에 신경 썼다. 한편 과거에 지은 건물이 남아 있을 땐 역사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설계한다. 예를 들어 통의동의 건축 전시 공간 ‘막집’은 오래된 한옥과 양옥을 연결한 뒤, 단열 성능을 높이기 위해 유리 대신 투명한 플라스틱 소재인 렉산을 사용했다. 이처럼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디자인을 시작하는 경우도 많다.
마침 디자인하우스 창립 50주년 문화 캠페인의 핵심 키워드가 ‘막’이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반가웠다. ‘막’이 특정 건축가의 담론을 넘어 사회·문화적 차원에서 공론화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완벽함과 효율을 추구하는 현대건축에 질문을 던지는 태도로서 기능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개념이 매체에 의해 하나의 스타일이나 경향으로 굳어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모든 이가 각자의 환경과 문화 속에서 자신만의 ‘막’을 발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을 것이다.


한국의 ‘막’이 일본의 미학과는 어떤 점에서 다르다고 생각하나?
막은 상황과 흐름에 대한 즉각적이고 솔직한 반응에 가깝다고 본다. 가령 일본의 ‘와비사비’가 완성된 형태 이후의 비틀림이라면, 막은 작품이 상황과 재료에 반응하여 형성되는 과정 자체를 존중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결론을 정하지 않은 상태라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계절에 따른 극심한 기온차, 가파른 산지 등 한반도의 척박한 환경 탓에 막의 미학이 형성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 선조들은 생존을 위해 이 땅의 급작스러운 변화를 인정하고, 우연에 적응하며 고유의 것을 만들어나갔을 것이다.
앞으로 건축가로서 ‘막’의 미학을 어떻게 실천하고자 하나?
막을 실천하기 위해 일부러 불완전함을 연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땅의 흐름, 재료의 성질, 시공 과정에서 생기는 흔적 등을 굳이 지우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최근 작업에서도 땅의 구조를 경험으로 연결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기보다 덜 만들고 덜 말하는 건축을 이어가고 싶다. 건축이 자연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조용히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그것을 계속 추구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