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브랜딩으로 소통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이기섭

2011년 3월 그래픽 디자이너 이기섭은 홍대 앞에 땡스북스를 열었다. 디자인 전문 서점도 아니고 사업 아이템으로 전망이 없는 작은 동네 서점을 차린 데에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디자이너로서 그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면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북 브랜딩으로 소통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이기섭
1968년생. 홍익대 섬유미술과를 졸업했다. 대학 때 미술대학 학술지 <홍익미술> 편집장을 맡으며 책 만드는 재미에 빠진 후 지금까지 책 만드는 일을 해오고 있다. 졸업 후 홍디자인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김두섭, 민병걸과 함께 눈디자인을 운영했다. 2011년 3월 땡스북스를 설립해 문화 공간으로서의 서점 운영과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시각 디자인 그룹 진달래 회원이며 서울여대 겸임 교수로 출판편집 디자인을 강의한다. 그림책 <눈을 맞춰요>, <모두 웃어요>(아이즐) 등을 비롯해 공저 <일러스트레이터 그래픽 디자인>, <인디자인 편집 디자인>(안그라픽스)을 냈다.

2011년 3월 그래픽 디자이너 이기섭은 홍대 앞에 땡스북스를 열었다. 디자인 전문 서점도 아니고 사업 아이템으로 전망이 없는 작은 동네 서점을 차린 데에 모두가 의아해했지만 디자이너로서 그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면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단순한 북 디자인이 아니라 북 브랜딩이라는 개념으로 책과 책을 둘러싼 환경을 풍요롭게 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대로 책을 만들거나 혹은 그와 다를 바 없는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즐겁게 살면 쉽게 지치지 않고 지치지 않으면 오래 일할 수 있다는, 그래서 예전에는 할 수 없었던 일도 하게 됐다는 그의 얼굴은 조금은 정제된 미소의 스마일 캐릭터와 닮아 보였다. <스마일 서커스> 그림책을 펴내고 ‘스마일 로그’ 전시회를 열며 해온 일련의 작업이 어느새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 모양이었다. 인터뷰: 전은경 편집장, 진행·정리: 김민정 기자, 인물 사진: 이창화 기자

땡스북스 아이덴티티, 2011~2015
땡스북스의 콘셉트는 동네 서점이다. 홍대 앞이라는 동네를 해석하며 가장 염두에 둔 것은 글로벌 소통이다. 뿌리는 동네에 내리되 가지는 세계를 향한다. 이 콘셉트에 맞는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글로벌 소통 수단으로서 영어를 메인 모티브로 삼았다. 쉬운 문장으로 영문 캠페인을 전개했고 땡스북스 철학을 공유했다. 메인 아이덴티티 요소는 Y100% 노랑으로 정했고 모든 결과물에 적극적으로 사용해 땡스북스의 상징이 되도록 노출시켰다. 서브 요소인 간결한 일러스트레이션은 동네서점의 친근함을 표현하며 타이포그래피로만 구성된 이미지의 딱딱함을 보완해준다.
대학 때는 섬유 미술을 공부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었는지 첫 시작부터 찬찬히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저는 시각 디자인을 전공으로 공부한 적은 없어요. 대학교 2학년 때 복학하고 학과 내 편집장을 맡았는데 꼭 소식지를 만들 필요가 없었음에도 한 해 동안 네 권이나 만들었어요. 전공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뭐 재미있는 게 없을까 궁리하던 차에 책 만드는 일을 발견하게 된 거죠. 당시 2학년 실기실이 A동 210호여서 제호를 ‘A210’ 으로 정하고 과제보다 더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안상수 교수님 연구실에 찾아가 편집 디자인을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그때가 막 전자 출판이 도입된 시기였는데 저는 매킨토시가 있었어요. 그래서 맥다모(매킨토시를 다루는 사람들의 모임) 동호회 활동도 하면서 나름 컴퓨터를 익히고 편집 디자인도 해서 책을 만들었지요. 안상수 교수님께 제가 만든 결과물을 보여드렸더니 제가 ‘과 분위기는 흐리지 않겠다’,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하셨는지 허락해주셨어요(웃음). 이후로는 시각 디자인과 수업을 들으면서 디자인뿐 아니라 글을 쓰고 편집도 해야 하는 미술대학 학술지 <홍익미술> 편집장도 맡았습니다. 이때의 경험이 지금 땡스북스를 운영하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며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디자인을 하고 싶고 책도 만들고 싶은데 그러려면 글이 필요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제가 직접 기획도 하고 취재도 하고 기사도 쓰면서 자연스럽게 글과 디자인, 두 가지를 모두 편집할 수 있게 된 거죠.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한 필요한 모든 프로세스를 다 경험한 셈이네요.

결과적으로 편집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거죠. 최근에 연평 도서관 프로그램 가이드북을 만들었는데, 이 프로젝트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소년원, 군 부대 등 소외된 공공시설에 문화 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추진한 사업의 일환이에요. 제가 서점을 운영하다 보니 연평도 군부대에 지은 도서관의 문화 프로그램을 짜달라는 의뢰도 받게 된 거죠. 달마다 추천 도서를 선정해주고 장병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금주의 책’ 같은 코너도 만들었는데, 이걸 또 나중에 도서관 내부 운영자들이 활용하고 큐레이션할 수 있도록 32쪽의 가이드북으로 만들었어요. 직접 프로그램을 짜서 글도 쓰고 일러스트도 그리고 사진도 찍어서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만들 수 있었던 건 대학 때부터 편집에서 글과 디자인을 별개로 보지않고 열심히 한 덕분인 것 같아요.

대표님을 보면 늘 일을 즐기면서 하시는 것 같은데, 지치지 않는 비결이 뭔가요?

스스로 자신의 성향이나 좋아하는 것, 중요시하는 것 등 몇 가지 부분에 집중하면서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는 게 중요합니다. 운동으로 치자면 등산은 정상이라는 목표가 있어서 거기까지 반드시 올라야 성취감을 느끼지만 서핑은 자연에 몸을 맡기고 파도라는 흐름을 타면 그 자체가 즐거움인 거잖아요. 사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려서 책 만드는 게 재미있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예요. 대학교 4학년 때 <홍익미술>이 예산 문제로 발간을 못해 다음 해 여름에 나왔거든요. 그때 전 이미 졸업을 한 상황이었는데 계속 학교에 나가 편집실에 들락날락하면서 책을 만들었어요. 시간도 많으니까 더 열심히 만들어서 나름 볼륨도 있고 컬러풀한, 뿌듯한 결과물이 완성됐죠. 그 책을 보고 당시 안그라픽스에서 오래 근무하시다가 홍디자인으로 독립한 홍성택 선생님이 함께 일해 보지 않겠느냐고 하셔서 취직도 할 수 있었고요. 사실 땡스북스를 열 때도 처음엔 책을 공급하겠다는 출판사가 많지 않았어요. 저 역시 큰 부담없이 1년만 버티자고 마음먹었는데 뭔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선물처럼 따라왔습니다. 디자이너의 삶도 그렇고 사회 생활도 꼭 계획대로만 일이 흘러가는 게 아니잖아요? 섬세하게 계획을 짜놓은 다음 그것을 실제로 이루기란 힘들죠. 그럴 땐 흐름에 몸을 맡기되 스스로 중심을 잡으면 되는 거예요.

홍디자인에서 첫 직장 생활을 하셨네요.

홍디자인에 취직해 처음 맡은 프로젝트가 <행복이 가득한 집> 7주년 리뉴얼이었는데 그땐 얼마나 즐거웠는지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면 빨리 회사에 가고 싶었어요. 이후 2년간 홍디자인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실무적으로 참 많이 배웠습니다. 첫 사회생활이기도 하고 홍성택 대표 같은 좋은 선생님도 있었으니 얼마나 신이 나서 오버를 했겠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지치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그땐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120%를 쏟다 보니 빨리 소진돼서 2년 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죠. 이럴 때 가장 고전적인 핑계가 유학 아니겠습니까(웃음). 홍디자인을 그만두고 유학 준비를 하면서는 일하며 배운 것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책을 한 권 썼는데 그게 바로 안그라픽스에서 나온 <쿼크익스프레스 QuarkXpress 3.3>이에요.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정보만 딱 모아서 콤팩트하게 만들었습니다. 디자이너가 이것만 알면 당장 일하는 데 문제가 없도록 쿼크의 방대한 정보 중 약 20%만 큐레이션한 거죠. 이 책이 나름 잘 팔려서 인세도 꽤 받았어요.

유학 생활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미국에서는 랭귀지 스쿨을 다니며 1년간 어학 공부를 하고 시카고 예술대학(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 지원해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때 마침 IMF 사태가 터져서 한국에 잠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지 못했죠. 만약 그때 미국으로 가서 학업을 계속했다면 비슷한 수순을 밟은 사람들처럼 교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그럼 지금의 땡스북스는 없었을 테고요. 하지만 저는 내 의지대로 안 되는 상황들은 받아들이고 즐겁게 살고 싶었어요. IMF 사태가 터지고 환율이 높아진 상태에서 미국에서 힘들게 공부할 필요가 있나 싶었죠. 한국에 돌아와서도 당장 일자리가 없길래 이참에 여행이나 하자 싶어서 물가가 싼 나라로 떠났습니다. 경제적으로 워낙 안 좋은 시기였으니까 어떻게든 일거리를 찾으려고 애쓰기 보다는 어디라도 다녀오면 상황이 좀 나아져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간 거예요. 그렇게 시리아, 요르단, 터키, 이스라엘 등을 6개월간 여행하고 돌아오니까 갑자기 한국에 불고 있는 벤처 붐 덕분에 바로 미래랩이라는 인터넷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됐죠.

버라이어티한 여정이었네요. 그럼에도 늘 밝고 긍정적인 성향이 돌파구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인생은 그런 것 같아요. 20대에는 미래를 위해서 목표를 세우고 또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할 것 같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은 목표가 정확히 뭔지 모르니까 불안해하는 것이고요. 하지만 사실은 내가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분명히 아는 게 중요해요. 즐기다 보면 지치지 않아서 오래 하게 되고 또 그러다 보면 예전에는 미처 능력이 없어서 못하던 일들도 할 수 있게 되는 거죠. 저는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편이라 스스로 즐겁게 살고 시대의 흐름을 즐기면서 가능하면 즐겁게 일하고 싶었어요. 또 한 가지, 디자이너로서 저의 삶과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라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소통’인데요. IMF 사태 때문에 미국에서 한국에 막 돌아왔을 때, 진달래라는 시각 디자인 그룹에서 ‘대한민국’을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어요. 대학교 때 시각 디자인 수업을 들으면서 알게 된 김두섭, 민병걸, 안병학 선생 등과 함께 만든 모임이었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아 있다 보니 전시회를 통해 뭔가 밝은 기운을 주고 싶었죠. 그래서 저는 ‘대한민국 거울’이란 제목으로 스마일 포스터를 만들었습니다. 이 작업을 계기로 디자인이라는 것이 하나의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느끼고 주제에 대한 해석에 초점을 맞추게 됐지요. 그때 막 포스터를 주변 사람들한테 나눠줬는데 퇴근하고 돌아와 방 불을 켰을 때 이 포스터의 웃는 얼굴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콘텐츠의 힘이랄지, 그래픽으로 소통하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사실 땡스북스를 열 때도 처음엔 책을 공급하겠다는 출판사가 많지 않았어요. 저 역시 큰 부담 없이 1년만 버티자고 마음먹었는데 뭔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선물처럼 따라왔습니다.”

인터넷 회사에서는 어떤 경험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디자인 총책임 역할을 맡았는데 디자인 소스를 가지고 웹사이트를 만들고 오프라인 홍보물도 제작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쯤 지나고 나니 회사 경기가 갑자기 좋아지면서 바른손이라는 문구 회사도 인수하고 규모가 꽤 커졌어요. 저 역시 디자인 팀장에서 이사가 되었는데 문구 상품이나 캐릭터 쪽은 다뤄본 적이 없지만 그래픽을 다듬고 회사 브랜드들을 책자로 정리하며 자연스럽게 제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는 대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쭉 책 만드는 일을 해온 셈인데요, 중요한 건 저에게 어떤 기회가 생겼을 때 그 일이 책 만드는 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하지 않거나 멀리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어떤 프로젝트든 책 만드는 일의 확장으로 생각하고 편집의 프로세스를 적용시키면 되는 거죠. 편집자는 사진가든 일러스트레이터든 많은 사람이 각자의 재능을 잘 발휘하게끔 조율하면서 그 결과물의 밸런스를 맞추는, 일종의 코디네이터 역할을 하는 거잖아요. 어느 프로젝트든 이렇게 자기화하면 일할 수 있는 영역도 넓어지고 많이 배우게 되는 것 같아요. 회사에 다니면서 또 즐거웠던 점은 매달 밀라노 상품 박람회, 프랑크푸르트 페이퍼 월드, 도쿄 기프트 쇼 등에 참여하기 위해 출장을 다녔던 건데요. 내부적으로 오프라인 숍을 준비하고 있어서 바잉할 것과 셀링할 것의 시장조사를 위해 부지런히 다녔지만 회사의 대주주가 바뀌는 바람에 결국 실현도 하지 못하고 그만둬야 했어요. 하지만 당시 브랜딩을 고민하고 열심히 보고 경험한 것이 결과적으로 땡스북스를 오픈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죠.

결국 어떤 일을 하든 편집과 디자인을 구분하지 않고 책을 만든 경험이 확장되 고 연장된 것 같네요.

앞으로도 저는 책 만드는 일을 할 건데 딱히 북 디자인이라 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북 브랜딩’을 한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브랜딩은 결국 아이덴티티를 좀 더 효율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에요. 장점을 살리고 쉽게 소통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아이덴티티 프로젝트도 그렇고 브랜딩을 하는 데는 편집 디자인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죠. 결국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전체적인 코디네이션을 하고 밸런스를 맞춘다는 점에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종류의 작업을 하든 결과물을 책자로 정리하는 버릇이 있어요. 이제는 디자인의 좋고 나쁨을 조형 감각이나 미적 센스로 만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디자이너 각자가 잘하는 방식으로 소통하며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스스로를 드러내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색깔이 드러나고 이후의 미래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 거죠.

“앞으로도 저는 책 만드는 일을 할 건데 딱히 북 디자인이라 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북 브랜딩’을 한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브랜딩은 결국 아이덴티티를 좀 더 효율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에요. 장점을 살리고 쉽게 소통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이죠.”

대학원에서는 불교의 선(禪)을 전공하셨지요. 아무래도 뜻밖의 행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른손 회사를 그만두고 김두섭, 민병걸 선생과 함께 눈디자인을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바빴지만 4년 반 정도 지나고 나니 직원도 늘고 디렉션만 해도 되니까 시간 여유가 생겼죠. 당시 저는 삼성동에 살고 있었는데 집 앞, 봉은사에서 시민 불교 강좌를 들은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누구나 그렇지만 뭔가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잖아요. 제가 좀 소심한 편인데 다음에 같은 상황이 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여러 가지로 마음고생을 하고 싶지 않아서 불교 공부를 시작하게 됐어요. 불교의 교리는 한마디로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잖아요. 우리는 흔히 변하면 나쁜 것이라고,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든요. 사람 관계든, 자리든 변할 수밖에 없는데 안 된다고 놓지 않고 꽉 쥔 채 연연하다 보면 지칠 수밖에 없어요. 한창 이렇게 불교 강좌를 듣다 보니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동국대학교 대학원 신입생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된 거예요. 당시 눈디자인이 남산에 있었는데 오후에 졸리면 산보 삼아 다닌 뒷길이 바로 동국대학교와 이어져 있었거든요. 면접장에 갔는데 모두 스님들만 있더라고요(웃음). 교수님들도 스님이었는데 몇 가지 질문에 봉은사에서 배운 대로 잘 대답을 했더니 합격을 시키시더라고요(웃음). 그렇게 해서 선(禪)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사실 디자인과 선은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싹 비워야 한다는 점, 절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요. 일본 디자인의 경우 그 원류를 선에서 찾아볼 수 있고요. 현재 대학원 과정은 다 수료한 상태인데 아직 논문은 못 썼습니다. 디자인과 선을 주제로 언젠가는 꼭 쓰려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지요.

그래픽 디자이너지만 일러스트레이션으로 개인전도 열었습니다.

눈스튜디오를 공동 운영하면서 개인적인 시간 여유가 좀 생겼어요. 제 역할은 디렉션을 하는 건데 디자이너들의 작업이 끝나야 할 수 있으니까 기다리는 동안 매일 한 점씩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마음이’라는 캐릭터입니다. 100여 점이 모였을 때 첫 개인전을 열고 이후에도 몇 번 전시를 열었어요. 또 ‘마음이’를 콘텐츠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그림책도 펴 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 작업에 할애하는 시간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스튜디오 운영과 병행하기가 벅차더라고요. 헬렌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을 보면 “기꺼이 한쪽 문을 닫아야 다른 쪽문이 열린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맞는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디자인 비용이 아닌 저작권료로 살아봐야겠다는 결심으로 7년간 운영하던 눈디자인을 그만뒀어요. 때마침 아이가 생겨서 집에서 육아를 하며 그림책도 만들고 일상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때 개인전을 열면서 인연을 맺게 된 더 갤러리 관장님을 통해 땡스북스 서점을 열게 된 것이고요. 처음에는 더 갤러리의 자문과 디자인 리뉴얼을 맡으며 제가 제안했던 기획인데 오히려 관장님이 저에게 직접 운영을 해보면 어떻겠느냐 해서 맡게 됐어요. 생각해 보면 땡스북스는 인생의 구간을 잘 즐겨서, 쉼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프로젝트입니다. 육아를 하며 아이와 즐겁게 지내고 충분한 휴식을 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다 보니 지치지 않고 또 새로운 일을 할 수 있었던 거죠.

땡스북스는 동네 서점이지요. 작은 서점들이 경영난에 시달리고 문 닫는 시점에서 과감한 선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외국에서 서점은 문화 공간인데 우리나라의 작은 서점에는 참고서, 잡지만 있는 그냥 책을 쌓아놓고 파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늘 아쉬웠어요. 서울 이란 도시가 더 매력적이 되려면 동네마다 색깔이 있어야 하고 그 색을 더 분명히 해줄 서점도 하나씩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땡스북스는 처음부터 ‘동네 서점’이라는 콘셉트를 분명히 했는데 홍대 앞에 있으니까 그 지역에 잘 어울리는, 문화적으로 다양성을 중요시하는 서점이야 했지요. 그래서 일반 서점이지만 디자인을 경험할 수 있는, 디자인이 하나의 경쟁력이 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주인이 디자이너니까 따로 디자인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고 디자인으로 소통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죠. 물론 처음에는 주변에서 만류하기도 했고 고민이 많았어요. 하지만 동네에 서점이 생겨서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저 역시 이 공간을 통해 소통하고 성장하며 그렇게 인생에서 자꾸 플랫폼을 만들어간다면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나만의 멋진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1년만 운영해보자고 생각했는데 사소한 인연과 우연 속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지치지 않고 하다 보니 성과가 나게 된 거죠.

땡스북스에서 판매하는 책들은 어떤 기준으로 큐레이션된 것인가요? 또 서점에서는 출판사 별로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전시도 함께 진행하는데 어떻게 기획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땡스북스는 처음부터 출판사와 직거래를 고집했어요. 보통 작은 서점은 총판을 통해 책을 받는 데 그러면 마진이 줄어드니까 경영이 어려워질수 밖에 없잖아요.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라도 직거래를 해야 했습니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처음 서점 문을 열었을 때는 매장에 책이 별로 없었습니다(웃음). 제가 디자이너니까 연이 닿아 있는 디자인하우스, 안그라픽스, 홍디자인, 세미콜론 등 5군데 출판사 외에 판매가 불확실한 작은 서점에 선뜻 책을 넣어주는 곳이 없었던 거죠. 지금은 약 500군데 출판사와 직거래하고 있는데요, 가급적이면 정치 분야나 실용서같이 유통기한이 짧은 책과 겉과 속이 다른 책은 판매를 피합니다. 디자인은 아주 좋은데 내용이 별로라든가, 반대로 콘텐츠는 알찬데 디자인은 영 아닌 책도 지양하는 것이죠. 서점에서 열리는 전시는 일종의 윈윈 전략으로 직거래 출판사에 줄 수 있는 혜택을 고민하다가 떠올린 아이디어였습니다. 출판사와 함께 책을 소개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를 기획해 꽤 넓은 공간에서 한 달간 비중 있게 진행하지요. 중요한 건 이 공간을 여느 서점의 매대와 달리 무료로 제공한다는 점인데요, 돈을 받는 순간 서점 고객들을 위한 전시가 아닌 홍보로 변질되기 때문이죠.

서점과 더불어 북 디자인을 중심으로 하는 땡스북스 스튜디오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물론 장르와 콘텐츠에 따라 달라 지겠지만 땡스북스가 디자인한 책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나 스타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부분은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과제와 같은데요. 저는 콘텐츠를 최대한 함축적으로 표현한, 겉과 속이 같은 디자인을 지향할 뿐 모든 작업물에 땡스북스 디자인을 씌우는 것을 지양합니다. 콘텐츠를 해석해서 그걸 보여주는 부분이 제일 우선시돼야 한다는 거죠. 사실 저는 스튜디오 내에서 큰 틀을 조율할 뿐 디자인은 각각 그것을 맡은 디자이너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합니다. 땡스북스 스타일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보다 디자이너 각자가 콘텐츠를 해석하고 스스로 그 능력을 키워가는 게 더 중요한 것이지요. 좋은 해석은 누구나 공감해주니까 조형감을 더 하고 트렌디한 요소를 넣기보다는 콘텐츠를 해석하는 센스와 능력을 길러야 해요. 그럼에도 땡스북스가 디자인한 것이라고 알아봐주길 바라는 부분이 있다면 전체적 균형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기도 한데, 저희 스튜디오에서는 표지만 의뢰하는 디자인은 맡지 않아요. 또 제목과 본문 원고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디자인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디자인 예산이 얼마 되지 않는 북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기 때문에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는 콘셉트를 더욱 명확히 하고 시행착오를 줄여나 가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지요.

땡스북스 주인이자 디자인 스튜디오 대표, 그림책 작가, 그래픽 디자이너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역할을 해나가는 데에서 어느 한 가지에 치우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는 게 중요할 것 같은데요.

저는 언제나 직업란에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씁니다. 책을 만들든 서점을 운영하든 제가 하는 모든 일은 그래픽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기 때문이죠. 만약 제가 경영인의 마인드로 서점을 운영했다면 땡스북스를 프랜차이즈화하거나 비즈니스 툴로 활용해 투자를 받아서 또 다른 사업을 벌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본업이 그래픽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책을 큐레이션하거나 도서관 문화 프로그램을 짜는 등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당장 돈이 되는 일을 하기보다는 지속 가능성을 보고, 스스로 스트레스 받지 않으며 즐겁게 일하는 것 역시 중요해요. 땡스북스를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운영하다 보니 문제점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떤 단점을 극복하기 어려울 땐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균형을 맞추면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잣대에 휘둘릴 필요 없이 자신만의 기준이 분명하면 오리지널이 되는 거죠.

좋은 디자인을 하면서 디자이너로서 롱런하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디자이너가 스스로를 가장 잘 알아야 하죠. 그래서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소통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깨지더라도 자꾸 부딪쳐야 해요. 저 역시 학교 졸업 후 잠시 동안은 시각 디자인과 출신이 아니어서 콤플렉스가 있었지만 전공에 얽매이지 않으니 사고가 자유로워졌어요. 사고 범위를 넓혀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과 디자인을 연결시킬 수 있는 접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색깔이 나타나게 되고요. 또 한 가지, 너무 지치지 않도록 밸런스를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밸런스는 중간에서 얌전히 정도의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양 끝에서 끝을 오가더라도 균형 감각을 가지면 되는 거예요. 흐름에 몸을 맡기되 중심만 잘 잡으면 이리로 가든 저리로 가든 상관없이 즐거운 겁니다. 쉽게 지치지 않으려면 스스로 즐거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에게 관대해야 합니다.

“저는 언제나 직업란에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씁니다. 책을 만들든 서점을 운영하든 제가 하는 모든 일은 그래픽 디자이너의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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