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스포츠를 향한 선언, 프로-스펙스 구은성 사업부장

한국 토종 스포츠 브랜드 프로-스펙스가 달라지고 있다. 브랜드 북 〈우리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를 펴낸 것을 시작으로 브랜드 철학을 다시 세우고, 디자이너들과 호흡하며 브랜드의 방향을 근본부터 재정비하는 중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 구은성 프로-스펙스 사업부장이 있다. 그를 만나 변화의 이유와 미래상을 물었다.

따뜻한 스포츠를 향한 선언, 프로-스펙스 구은성 사업부장
브랜드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올해로 회사에 들어온 지 10년이 됐는데 사실 입사 초기부터 많은 문제점을 느꼈다. 전 직장인 유통사에도 브랜드 전략팀이 있었는데 프로-스펙스는 브랜드 그 자체임에도 브랜드 전략팀이나 마케팅팀이 없었다. 상품과 디자인 역시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언젠가 이런 문제들을 고쳐야겠다고 마음먹고 마치 데스노트처럼 바꿔야 할 목록을 작성해두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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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성 2016년 프로스펙스 신발기획팀 MD로 입사해 신발 기획, 마케팅, 상품 운영 등 실무 전반을 거쳤다. 2019년 오리지널 기획팀을 이끌며 MZ세대를 겨냥한 오리지널 라인을 선보였고, 브랜드 이미지 전환을 주도했다. 현재는 프로-스펙스 사업부장으로서 사업 전반을 총괄하고 있다.
그 변화의 시작점이 브랜드 북 〈우리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라고 들었다.

회의감만 있었던 건 아니다. 프로-스펙스는 1981년에 탄생해 대한민국의 역사와 함께해온 브랜드다. 이 헤리티지는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카이브를 모아 브랜드 북 〈우리의 레이스는 끝나지 않았다〉를 펴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조금 쉽게 생각한 측면도 있었다. 헤리티지를 잘 정리해 보여주면 사람들이 우리를 다시 보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단편적인 접근만으로 브랜드가 달라질 순 없었다. 대신 어떤 헤리티지를 이어가야 하는지, 미래에 무엇을 남겨야 할지에 대한 기준을 얻었다.

그렇게 도출한 미래의 방향성은 무엇이었나?

우리는 스포츠 브랜드이기에 프로-스펙스가 추구해야 할 스포츠 정신부터 다시 정의해야 했다. 답은 ‘따뜻함’이었다. 아직 대한민국이 완전히 성장하지 못했던 시절,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치르며 선수들에게 맞는 옷과 신발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달려왔던 시간, 국제상사 시절 운동선수 출신들이 직접 현장을 뛰며 선수들을 지원하던 기억이 그 배경에 있다. 그 안에는 단순히 제품을 만드는 일을 넘어 누군가의 도전을 끝까지 지지하려는 태도가 담겨 있다. 프로-스펙스는 그 정신을 언어로 확장해 ‘SPORTS FOR ALL’이라는 슬로건으로 정리했다. 이는 엘리트 스포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전문 선수가 아니어도, 기록을 목표로 하지 않아도, 일상 속 모든 움직임을 응원하고자 하는 브랜드의 가치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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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펙스의 슬로건 ‘모두를 위한 스포츠’.
브랜드를 바꾸는 과정에서 디자인 언어도 다시 썼다고 들었다. 패브릭 기반의 스튜디오 오유경은 물론, 산업 디자인 스튜디오인 SWNA와 함께한 것이 인상적이다.

헤리티지와 상품으로서의 연속성은 다르게 가야 한다고 봤다. 2026 S/S 시즌을 준비하면서 던진 질문은 하나였다. 프로-스펙스가 모든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고 정말 필요한 것만 남긴다면 무엇이 남을까. 그래야 앞으로 쌓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프로-스펙스는 예쁜 포장지보다 튼튼한 뼈대가 더 중요하다고 봤고, 두 스튜디오 모두 그 뼈대와 구조를 함께 고민해줄 파트너라고 판단했다. 특히 SWNA의 경우, 산업 디자인이 주로 다루는 ‘자동차’와 신발의 구조가 꽤 비슷하다고 여겼다. 유선형의 형태, 비교적 남성적인 디자인 언어, 그리고 무엇보다 제품 자체가 신뢰를 기반으로 설계해야 한다는 점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함께 합을 맞춰보고 싶었다.

그렇게 나온 2026 S/S 시즌의 제품은 무엇이 달라졌나?

신발은 러닝화 2종과 일상적인 스니커즈 1종으로 기획했다. 고민이 많았다. 러닝화는 지금 가장 뜨거운 카테고리이자 레드오션이니까. 하지만 프로-스펙스는 스포츠 브랜드이고, 러닝이라는 종목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여기서 기준이 된 건, 앞서 말한 것처럼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는 일이었다. 다른 브랜드들의 러닝화는 외형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는 화려한 장식을 덜어내고 적정한 기능성과 기술력에 집중한 형태로 만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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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스펙스가 2026 S/S 시즌에 SWNA와 함께 선보인 새로운 신발.
로고 플레이가 강하지 않은 것 같은데?

대중의 고정관념상 로고를 전면에 드러내는 것이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번 시즌에는 로고 노출을 의도적으로 줄였다. 하지만 이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브랜드 파워를 점진적으로 증대시켜 언젠가 이 로고를 다시 전면에 내세울 생각이다. 의류 역시 전반적으로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고, 기능과 쓰임에 집중한 이른바 ‘실용적인 미니멀리즘’을 담아냈다.

매장 전략도 새롭게 이끌어가고 있다고.

과거 매장 전략은 로고를 과시하듯 드러내고 대중을 향해 외치는 쪽에 가까웠다. 이제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는다. 분위기 자체로 궁금해지는, 들어와보고 싶어지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오늘날의 매장은 단순한 상공간이 아닌 하나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니 그에 맞는 접근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따뜻하고, 밝고, 깨끗한’ 느낌을 주려고 했다. 3월에는 용산 사옥 지하에, 하반기에는 서촌에 새로운 매장을 오픈하는데, 용산은 스튜디오 우네그가, 서촌은 스튜디오 COM이 각각 맡고 있다. 상품, 디자인, 공간까지 전반적으로 다양한 스튜디오와 협업하기 때문에 제각기 다른 결과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큰 틀에서는 꽤 비슷한 결로 정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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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하반기에 오픈 예정인 프로-스펙스 서촌 플래그십 스토어를 3D로 구현한 모습.
앞으로 또 어떤 변화를 이어나갈 예정인가?

지속적으로 진화를 거듭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협업하는 디자인 스튜디오들과 파트너십을 유지하면서 더 높은 품질의 상품과 콘텐츠를 만들어가고 싶다. 단박에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는 자극적인 퍼포먼스는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단기적인 성과와 장기적인 변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73호(2026.03)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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