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태도가 될 때 김영나
지금까지 선보인 김영나의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작업과 역할을 확장시킨 ‘태도’ 그 자체라 해도 무방하다.
최근 김영나는 국제갤러리 소속 작가가 되었다. 그래도 디자이너의 일상은 다르지 않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 No Longer Objects> 전시 도록 작업 중이고 3월부터는 매주 금요일마다 카이스트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가르칠 예정이다. 올해 뉴욕에 새롭게 오픈하는 에이랜드의 공간 디자인을 맡아 서울의 패션을 새롭게 보여주는 한편 마이애미 바스 뮤지엄의 요청으로 어린이 미술관 벽에 설치 작업도 해야 한다. 여기에 틈틈이 4월 벨기에에서 열리는 개인전 준비까지 다양한 영역과 분야를 넘나들며 연결되는 고리는 모두 디자이너로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선보인 김영나의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작업과 역할을 확장시킨 ‘태도’ 그 자체라 해도 무방하다. 인터뷰: 전은경 편집장, 글: 김민정 기자, 사진: 레스
EK 디자이너 김영나를 말할 때 늘 등장하는 것이 카이스트 출신이라는 점인데요, 공대를 졸업하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것 자체가 특별한 것 같아요.
YN 막연하게 미술 관련 전공을 하고 싶었어요. 과학고에 다녔기 때문에 입시에 실기가 들어가는 미대엔 갈 수 없었고, 가능한 곳을 고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대학에 다니면서는 좋아하는 것의 방향이 점점 구체화됐어요. 왠지 모르게 타이포그래피가 흥미롭고 수업 시간에 목업 작업을 할 때도 제품보다는 배너 디자인에 더 신경 쓰고.(웃음) 시각물 작업이 훨씬 좋았습니다. 제품 디자인의 경우 콘셉트부터 시작해서 실제로 제품이 물성을 갖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잖아요. 자본력도 필요하고요. 그에 반해 시각디자인은 생각한 걸 빠른 시간 안에 시도해볼 수 있고 혼자서도 작업이 가능하니까 그 점에서 잘 맞았던 것 같아요.
EK 졸업 이후 첫 직장은 안그라픽스였죠?
YN 인턴을 꽤 오래 하고 정직원은 못 됐어요.(웃음) 그때는 그래픽 디자인을 전혀 배우지 않고 갔기 때문에 바로 위 선배들이 스캔부터 매킨토시 사용법까지 가르쳐주는 게 많았죠. 그래도 나중에는 저 혼자 아시아나 기내지에서 따로 나오는 프로그램 북까지 작업하고 나왔습니다. 더 위에 있는 상사들의 평가는 잘 모르겠지만 선배들한테는 잘한다고 칭찬도 듣고요.(웃음) 당시 안삼열 선배가 과장이었는데 그분이 N4라는 회사로 옮기면서 저를 데리고 갔어요. 그곳에서 1년쯤 사외보를 만들다가 그만두고 대학원에 갔습니다.
김영나는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 석사 과정을 마친 뒤 2006년 네덜란드 아른험에 있는 베르크플라츠 티포흐라피(Werkplaats Typografie, WT)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그래픽 디자이너가 네덜란드로 유학을 가는 것은 흔치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모두 의아해하는 반응이었다. 실제로 김영나는 마음에 드는 대학을 찾기 위해 한 달 동안 독일, 스위스 등지의 여러 곳을 다니며 강행군했지만 결국 WT에만 지원했다. 독특한 시스템과 공간 자체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래픽 디자인과 건축, 패션 등 다양한 분야의 협업이 이루어지는 네덜란드의 환경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네덜란드의 특징을 고스란히 녹여낸 WT는 정규 강좌 없이 실무를 중심으로 한 교육으로 유명하다. 학교에 의뢰가 들어오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학생들이 하나씩 맡아서 진행하는 식이다. 김영나가 재학하던 당시에는 설립자인 카럴 마르턴스(Karel Martens) 외에 아르망 메비스(Armand Mevis), 폴 엘리먼(Paul Elliman), 막신 콥사(Maxine Kopsa) 등이 일주일에 한 번씩 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의 프로젝트를 지도했다.
EK WT에서의 경험은 어땠나요? 어떤 점이 지금의 작업에 영향을 끼치는지 궁금해요.
YN 여러 명이 함께 쓰는 작업실처럼 개인 테이블이 있는, 스튜디오 같은 학교였죠. 제가 다닐 땐 한 학년에 학생이 6명이었는데 원하는 시간에 작업하고 주방에서 같이 밥해 먹으며 놀다 보니 가족같이 돼버렸어요. 사실 WT에서는 어떤 폰트, 어떤 라인을 쓰면 좋다는 식의 가르침은 전혀 받지 않았어요. 그 대신 하나의 프로젝트가 있으면 어떤 식으로 콘셉트를 잡고 접근해가야 하는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레퍼런스 관련 스터디도 하지만 어떤 상황,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데에 중점을 뒀지요. 그래서 뭘 공부했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알맹이는 없지만 앞으로 내가 디자이너로 일할 때 어떻게 하면 되겠다는 태도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킬은 나중에 바뀔 수도 있고 그때마다 배울 수 있지만 태도는 아니잖아요. 그런 면에서 큰 자산이 되었죠.
EK 2007~2008년쯤 국내에 더치 디자인의 붐 아닌 붐이 일었습니다. 사실 더치 디자인이 정확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문제가 복잡해질 것 같은데요. 그래도 현지에서 공부하고 일도 하면서 더치 디자인에 대해 느낀 점이 있을 것 같아요.
YN 더치 디자인을 하나의 스타일로 본다면 유행이다, 아니다 말할 수 있겠지만 바로 이 부분이 가장 큰 오해라고 생각해요. 스타일로 분류되거나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태도라고 보거든요. 네덜란드 사람들은 검소하고 스스로 뭔가 일궈나가는 것이 습관처럼 돼 있어요. 따라서 어느 분야든 기능적인 부분에 큰 가치를 둡니다. 디자인 작업을 할 때도 최소한의 인풋으로 아웃풋을 이끌어내야 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복잡한 레이어를 한다든가 오버 프린트를 하는 등 흔히 더치 디자인의 요소로 여기는 것들은 장식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쇄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혹은 그 밖의 실질적인 이유가 있어서 하는 선택이에요. 그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어떤 스타일의 양상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이들 내부에서도 도대체 ‘더치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있지만 대부분 실체가 없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것 같아요. ‘더치 디자인’이라고 했을 때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디자이너 중에는 네덜란드 사람이 아닌 경우도 많고요. 동시대에 어떤 신(scene)에서 활동한 사람들, 그중에서 활동 자체가 전통적인 그래픽 디자인 방식에서 벗어난다든가 조금은 다른 디자인 언어를 사용할 경우 ‘더치 디자인’처럼 느껴지는 것이죠. 사실 이는 네덜란드의 사회적 환경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데 펀딩 시스템이 잘돼 있고 예술, 디자인 분야에서는 정말 잘하는 사람뿐 아니라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지원이 후한 편입니다. 많은 외국인 예술가, 디자이너가 네덜란드에서 지내며 작업하는 이유죠. 저 역시 외국인이지만 WT 졸업 이후에는 국가에서 주는 지원금으로 생활하면서 일할 수 있었어요.
EK 2008년 제로원디자인센터에서 WT 개교 10주년 기념 전시 <스타팅 프롬 제로Starting From Zero>가 열렸어요. 이 전시에 참여만 한 게 아니라 직접 기획도 한 것이죠?
YN 1학년은 2학년보다 상대적으로 훈련이 덜 됐기 때문에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할 수 있는 기회가 적어요. 스스로 과제를 설정하지 않으면 잉여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직접 프로젝트를 생산하는 것이 훈련처럼 돼버렸죠. 막연하게 WT의 어떤 콘텐츠를 한국에 전시로 선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10주년을 맞아 학교에서 이를 기념하는 책을 만들었어요. 따로 전시는 하지 않기에 한국에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곳저곳 장소를 알아봤습니다. 그때 제로원디자인센터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던 구정연 씨를 소개받아 전시를 열게 된 거예요.
EK 펀딩까지 받아 진행할 정도면 실행력이 남달랐네요.
YN 전시 기획을 해본 경험은 없었지만 막연하게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좋을 것 같았어요. 당시 국내에서 WT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학교였기 때문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또 애들이랑 다 같이 한국에 와서 놀면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고요.(웃음) 무엇보다 WT에서 지내면서 스스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생산하는 것이 습관화됐다고 할까요. 내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진행한 것이죠. 학생들끼리 팀을 꾸려 학교에 얘기해서 보조를 받고, 어떤 작품을 가져갈 수 있는지 알아본 다음 직접 설치도 하면서 굉장히 자율적으로, 재미있게 했어요.
EK 계간 <그래픽> 9호 ‘베르크플라츠 티포흐라피’ 이슈가 바로 이 전시를 계기로 만든 것이라고 들었어요.
YN 김광철 편집장이 전시를 보고 연락을 했어요. 계간 <그래픽>의 새 이슈를 <스타팅 프롬 제로>의 전시 도록처럼 만들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요. 전시를 그대로 담기보다는 좀 더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면 좋을 것 같아서 네덜란드로 돌아가 학교 친구들과 콘텐츠를 새롭게 기획했습니다. 이후 3년간 쭉 계간 <그래픽>에 편집자,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어요. 2011년 김영나가 미디어버스의 임경용, 구정연과 함께 기획한 계간 <그래픽> 17호의 주제는 ‘디자인이 태도가 될 때’이다. “디자인의 영역, 디자이너의 역할의 확장은 ‘디자인이 태도가 될 때’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이슈는 김영나의 행보를 대변하기도 한다. 직접 전시를 기획해 열고, 디자인뿐 아니라 기획과 편집까지 도맡으며 자신의 역할 범위를 넓혀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디자이너로서 그의 태도가 주효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래픽을 하나의 유통 플랫폼으로 삼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디자이너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선 “디자이너가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을 두고 그래픽 디자인 계에서는 어떻게 볼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 오갔다. 김영나가 특별히 영향을 받은 디자이너를 묻는 질문에 카럴 마르턴스를 꼽은 이유 역시 그를 통해 태도에 관해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더욱 인상 깊게 느낀 김영나의 면모는 실행력이었다. 이에 대한 김영나의 반응은 이렇다. “뭔가 그냥 해보자, 잘 질러대는 면도 있어요. 이게 제 성격이라면 감사한 일이죠.(웃음)”
EK 그럼 <그래픽>의 모든 작업은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진 건가요? 아트 디렉터뿐 아니라 직접 기획도 하고 편집자 역할도 맡았는데요.
YN 네. 마지막으로 24호 ‘주관적인 암스테르담 투어 가이드’까지 만들고 2012년 한국에 돌아왔어요. 콘텐츠 자체가 유럽을 기반으로 한 내용이 많다 보니 기획에도 관여하게 됐죠. ‘베르크플라츠 티포흐라피’ 이슈 때부터 영문 병기를 시작했는데 그럼 이 책을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팔아야 하잖아요. 그래서 직접 책을 들고 몇몇 서점에 찾아갔더니 그런 곳에서 판매하는 소규모 출판물이 눈에 띄더라고요. 이건 꼭 해야겠다 싶어 ‘셀프 퍼브리싱’(10호) 이슈를 기획했습니다. 이 밖에도 네덜란드 인쇄소 4곳을 탐방한 ‘프린팅 저널’(15호)이나 ‘무엇이 아름다운 책인가, 베스트 북 컴피티션 이슈’(19호) 등은 그동안 매체에서 다뤘을 법한데 소개되지 않은,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있는 주제였어요. 자기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가장 잘할 수 있잖아요. 열심히 파다 보면 현재의 트렌드, 이슈와도 자연스럽게 접목되는 부분이 새롭게 발견되기도 하고요. ‘주관적인 암스테르담 투어 가이드’를 만들 땐 당시 네덜란드 문화계 펀딩이 50% 정도 삭감돼서 많은 외국인 디자이너, 예술가들이 떠나던 시기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얘기도 다룰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주제와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슈를 잘 접목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EK 이슈 선정부터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 담아내는 포맷까지 김영나가 참여한 이후 계간 <그래픽>이 많이 달라졌다고 느꼈어요.
YN 편집장이 거의 관여를 안 하는 것이 중요해요.(웃음) 디자이너에게 콘텐츠를 어떻게 해석하고 보여줄지 믿고 맡길 때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는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이슈를 꼽으라면 ‘타입 아카이브’(16호)인데요, 디자인을 생각했을 때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이미지에서부터 기획을 시작했습니다. 디자이너들이 애정을 갖고 있는 글자를 한 페이지에 크게 하나씩, 세세한 부분까지 특징이 잘 드러나도록 보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렇게 서체 견본집을 만들고 예시나 인터뷰는 따로 분권 형태로 제작했어요. 이미지적인 디자인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기획하고, 스파이럴 바인딩으로 엮는 등 실험적인 형태로 완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2년 서울로 돌아온 김영나는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린 <인생사용법> 전시에 참여했다. 당시 선보인 ‘일시적인 작업실’은 디자이너가 자신이 작업하는 모습을 전시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는데 귀국 후 스튜디오가 필요했던 그는 실제로 미술관에서 전시 겸 작업을 했다. 생각해보면 김영나의 전시에는 늘 남다른 지점이 있었다. 그래픽 디자이너는 평면 작업만 할 것이라는 편견을 차치하더라도 콘텐츠 구성이나 공간 장악력도 남달랐다. 자신은 늘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얘기에 방점을 두고 풀어나간다고 하지만 흔히 디자이너가 미술관에 들어갔을 때 보이는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반대로 미술관에서 역시 ‘이 공간에는 뭐가 필요할까’, ‘큐레이터가 뭘 원하는 뭘까’ 생각하며 작업을 풀어나가는 그의 방식이 새롭긴 마찬가지였다.
EK 요즘엔 작가라는 호칭으로도 많이 불리잖아요. ‘예술과 디자인을 넘나드는’ 이런 식의 수식어도 많이 붙고요.(웃음)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YN 저는 아무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생각과 사고방식이 기본부터 다르더라고요. 물론 디자이너가 작가적 사고를 하거나 작가가 디자인적 사고를 할 때도 있으니까 분명히 겹치는 부분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기본적인 출발점이나 이를 계속 이끌어나가는 힘의 속성은 다르다는 것이죠. 저 역시 갤러리에서 전시를 하지만 디자인 방법론을 사용하는 것이고, 미술계 역시 이런 제 작업이 다른 방식으로 읽히기 때문에 새롭게 느끼는 것 같아요. 어쨌거나 저는 항상 디자이너이고 무얼 하든 디자이너로서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EK 2013년에는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해 ‘두산 레지던시 뉴욕’ 입주 작가가 되기도 했죠.
YN 사실 그때는 패닉이었어요.(웃음) 전에는 가볍게 여겼는데 미술계에서 전격적으로 상을 주겠다고 나서니까 ‘왜일까’ 생각하게 됐죠. 반대로 미술계 코어에선 제 작업이 새롭긴 하지만 현대미술이라고 하기에는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다고 여기기도 해요. 그때는 왜 내 작업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고민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진지함에 대한 규정은 또 다 다르니까, 결론은 제가 디자이너로서 디자인 언어를 사용해서 작업하는 것이 미술계에도 의미 있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었어요. 그동안 제가 어떤 배경을 갖고 어떻게 작업해왔으며 그 방법론을 적용했을 땐 무엇이 파생되는지, 그 지점에서 흥미로워한 것 같아요. 뉴욕은 처음 가봤는데, 음… 다음에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웃음) 레지던시 역시 처음이었는데 긍정적인 경험이었어요.
EK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는 데에 거부감이 없는 것 같아요. 스스로는 어떤 전시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YN 전시를 대하는 태도 역시 프로젝트를 풀어나가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아요. 뉴욕 두산갤러리에서 선보인 개인전은 내가 뭘 하는지 보여줘야 하는 일종의 자기소개였는데 단순히 포트폴리오를 보여주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잘하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2006년부터 2015년까지 작업한 것을 모아서 <SET>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어요. 그동안의 작업에서 맥락은 다 제외하고 색과 기본적인 도형만 남겨서 카테고리화한 일종의 샘플 북으로, WT를 함께 다녔던 벨기에 디자이너 요리스 크리티스(Joris Kritis)가 디자인했습니다. 이후 <SET>의 콘텐츠를 공간에 선보인 것이 전시가 됐고요. 전체 공간을 페이지 수대로 나눈 다음 레이어를 겹쳐 각각의 페이지에 나오는 그래픽을 벽화로 작업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공간에 따라 페이지 배열이 달라질 수 있겠더라고요. 또 목록에서 어떤 페이지를 선택하고 어떻게 그루핑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구성할 수도 있고요. 시리즈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대구미술관과 프랑스 브장송 미술대학(Fine Art Institute of Besan on)의 갤러리, 서울 국제갤러리 등에서 선보이고 지난해 밸리록뮤직앤아트페스티벌에선 COM과 함께 설치 작업으로 만들었습니다.
EK 샘플 북이라니, 확실히 디자이너 마인드에서 나올 수 있는 효율적인 방식이네요.
YN 의도한 것은 아닌데 제 작업에선 컬러나 원형, 패턴, 기호 등이 주요한 요소잖아요. 맥락을 제외하고 나면 샘플 북처럼 사용할 수 있는 거죠. 반대로 저는 모든 프로젝트를 다 기억할 수 있으니까 <SET>을 보면 일기 같기도 하고, 그런 지점이 재미있는 것 같아요. 지난해에는 국제갤러리에서 쇼케이스 전시를 여는데, 앉아서 쉴 수 있는 큐브가 필요하다고 해서 <SET>의 페이지 두 개를 골라서 앞뒤에 넣어 제작하기도 했어요. 이 설치물은 4등분되기 때문에 각각 하나의 캔버스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작업할 땐 아카이브도 중요한데 벽화는 전시가 끝나면 사라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다양하게 응용해볼 생각이에요.
EK 단체전이나 주제가 있는 전시와 달리 개인전의 경우 아무런 제약이 없잖아요. 전시를 대하는 태도랄지 마음가짐이 다른가요?
YN 그때야말로 내 작품 세계는 뭘까 생각하게 되죠.(웃음) 2011년 갤러리 팩토리에서 개인전을 할 때 고민이 참 많았어요. 포트폴리오 전시는 하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관객에게 너무 불친절한 전시도 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다면 내 작품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까 생각하면서 스스로 고객의 니즈를 만들었습니다.(웃음) 그때 실마리가 됐던 게 밀라노 트리엔날레 뮤지엄에서 제 작업을 선보인 방식이었어요. 포트폴리오를 나열하지 않고도 아카이브를 최대한 많이 보여줄 수 있도록 여러 작업물을 구성, 배치해 한 장의 사진에 담아 벽화로 설치했거든요. 과거 작업들의 단체 초상인 동시에 새로운 시각적 컴포지션을 보여줄 수 있었죠. 이때의 전시를 힌트로 과거의 특정한 작업, 기억이 하나의 큰 그림의 요소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셀프 포트레이트’ 같은 작업도 하게 됐습니다. 한 장 한 장 모두 다른 디자인이지만 모아놓으면 완성된 큐브 퍼즐처럼 일관된 흐름이 있는, 나름 자유로운 방식으로 제 얘기를 하되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본연을 잃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생각해요.
EK 보통 개인 작업의 콘셉트랄지 주제는 어떻게 정하나요?
YN 어느 날 갑자기 전시를 하고 싶다, 책을 만들어야겠다 해서 주제를 정하기보다는 그때그때 필요성을 느끼는 부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지점을 건드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중요한 건 실행력이에요. 뭔가를 해볼까 하다가도 ‘이게 가능할까’, ‘이걸 해서 뭐 하나’, ‘큰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게 되잖아요. 어디서 이미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사실 하고 나면 생각보다 진부하지 않아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가 생기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알아서 자란다고 할까요. 특히 미술계 일을 하면서 많이 느꼈는데요, 저는 화이트 큐브의 권위, 엄숙함 뭐 이런 것보다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통해 새롭게 관찰하는 것이 많아요. 그게 또 피드백이 돼서 다시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요.
EK 전시를 하는 것 외에 미술 전시 공간 ‘커먼센터’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죠?
YN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어떤 공간이 생기면서 일어나기도 하잖아요. 이런 지점에서 평소 공간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운영위원을 맡게 됐습니다. 이후 다른 신생 공간이 많이 생기면서 더 이상 유효한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쯤 문을 닫았고요. 커먼센터는 낡은 상가를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에 해석의 가능성이 많은 공간이었어요. 저는 작가로서 이은우 씨와 개관 준비전을 여는 동시에 아트 디렉터로서 역할도 해야 했기 때문에 플랫폼을 만드는 게 중요했습니다. 워낙 폐허 같은 공간이라 로고타이프나 애플리케이션 개발뿐 아니라 기본적인 뭔가가 필요했는데, 그걸 또 어떻게 전시로 풀어내느냐가 관건이었죠. 결국 스쿼팅을 한다는 개념으로 이미 전시가 끝난 미술관 몇 군데를 찾아가 버리는 집기류, 소품 등을 얻어 왔어요. 그리고 거기에 아이덴티티를 적용시켜 인테리어 요소가 될 수 있게끔 했고요. 커먼센터는 공간 자체도 그렇고 이곳에서 열린 전시 모두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의미가 덧붙은 것 같아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레이어의 콘텐츠가 쌓이면서 그 의미가 달라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공간 스스로 그 의미를 더해갔다고 할까요.
2016년 1월 문을 닫은 커먼센터의 간판은 현재 부암동 김영나의 스튜디오 ‘테이블유니온’에서 조명으로 사용한다. 테이블유니온은 2012년 김영나가 암스테르담에서 한국에 돌아와 설립한 디자인 스튜디오로 테이블 위에서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다양한 활동의 플랫폼이 되고자 하는 의미를 담았다. 현재는 디자이너 양민영과 함께하는 가운데 다른 다양한 멤버들과도 따로 또 같이 하는 활동을 지향하며 느슨한 협업 공동체로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김영나가 선보인 작업에서 협업자는 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계간 <그래픽> 작업을 비롯해 동료 디자이너, 미술가들과 함께 운영한 커먼센터, 타이포잔치 2013 기획 등은 디자이너로서 활동 반경을 넓히고 다양한 역량을 펼치는 데에 촉매제 역할을 했다. 특히 미디어버스 구정연, 임경용과의 인연은 <스타팅 프롬 제로>부터 시작해 김영나가 이들이 운영하는 더북소사이어티의 로고 디자인, 아트 디렉팅을 맡는 것으로 이어졌으며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에서는 COM과 더불어 ‘불완전한 리스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번 인터뷰와 표지 촬영을 진행한 포토그래퍼 레스(Less) 역시 2014년 코스의 한국 론칭을 기념하는 인쇄물 <코스×서울>를 비롯해 다양한 작업을 함께 했다. 촬영 당일, 짧은 머리를 더 짧게 자르고 온 김영나는 강렬한 원색 옷을 여러 벌 꺼내며 레스와 콘셉트를 의논했다. 촬영을 진행하는 동안 모두의 귀를 트이게 하는 음악은 김영나가 직접 선곡한 것으로 현장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평소 디제잉에도 관심이 많은 그가 월간 <디자인> 독자를 위해 추천하는 선곡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Solitude – M83 / Junk
최근 알게 된 후로 무한반복 듣고 있는 M83의 <Junk> 앨범 중 ‘Solitude’는 새벽 드라이브를 위한 최고의 곡.
Film 2 – Grauzone / 1980-1982
역사 속의 네덜란드 디자인 컬렉티브 Wild Plakken을 통해 알게 된 Grauzone은 1980년대 스위스 펑크 밴드라는 점부터가 흥미롭다. 그중 단연 멋진 곡 ‘Film 2’는 뮤직비디오도 빼놓을 수 없다.
Edge Hill – Groove Armada / Goodbye Country: Hello Nightclub
15년 전쯤부터 침대 위에서 들으면 좋은 노래 1순위로 꼽는다. 늘 변함없다.
First Love – Uffie / Sex Dreams and Denim Jeans
모임별의 초대로 DJ를 처음 해보면서 만족하며 틀었던 사랑스러운 곡.
Perm – Bruno Mars / 24K Magic
흥과 섹시함이 필요할 때, 그는 최고.
EK 항상 짧게 깎은 머리랄지 구조적인 옷, 강렬한 컬러 등 외모에서부터 스타일이 분명하게 드러나잖아요. 좋아하는 브랜드, 본인만의 취향이 확실할 것 같아요.
YN 특정 브랜드보다는 세컨드핸드 숍에서 뭘 자주 사는 편이에요. 새 물건을 사서 오래돼 보이게 만드는 것도 좋아하지만 기본적으로 중고를 좋아해서요. 때론 친구들이 뭔가를 주기도 하고, 그렇게 모아서 조합하다 보면 특정한 스타일로 읽히는 것 같아요. 머리는 촬영을 한다기에 더 자르긴 했는데 평소에도 짧은 게 편해서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EK 최근에 산 물건은요?
YN 음… 아, 맞다. 제가 어제 가발을 샀어요.(웃음) 긴 머리 가발도 있는데 이번에 단발머리로 샀어요.
EK (함께 웃으며) 실제로 가발을 쓰고 외출도 하나요?
YN 간혹요.(웃음) 머리를 갑자기 자를 순 있어도 갑자기 기를 순 없잖아요. 저는 항상 머리가 짧으니까 재미로 가끔 쓰는 거죠. 가장 최근에는 프린스가 죽은 날 모임별과 디제잉을 했는데 그때 썼어요. 디제잉은 한두 번 해봤는데 특별히 기술이 있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고 배워보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EK 보통 하루 일정은 어떤가요? 쉴 때는 무얼 하는지 궁금해요.
YN 낮에는 보통 미팅을 하거나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고 밤에는 작업을 해요. 그래서 별로 쉬는 시간이 없어요. 주말에도 거의 스튜디오에 나오고 밤늦게까지 작업하니까 좋은 삶은 아니죠.(웃음) 사실 작업할 땐 딱히 일이라는 생각을 안 하니까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의 구분이 잘 안 돼요. 일부러 시간 내서 가까운 데라도 여행을 간다든지 해야 할 것 같아요.
EK 요즘 가장 관심 있는 이슈가 있다면요?
YN 균형감요. 작업을 하는데 일이 방해된다고 느끼거나 혹은 그 반대로 느낀 때가 있었어요. 이것도 못 하고 저것도 못 하면 안 되니까 ‘앞으로 나는 디자인만 하겠다’ 혹은 ‘작가로 선언하고 작품 활동만 하겠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결정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했던 거죠. 그런데 지난해 국제갤러리 전시 이후 김성원 평론가, 국제갤러리 송보영 이사와 아티스트 토크를 진행하며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특히 김성원 평론가의 얘기가 많은 도움이 됐는데, 말하자면 제가 디자이너로서 미술관에 존재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죠. 디자이너 입장에서 지금까지 어떤 방식으로 작업했으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실마리를 찾아 풀어냈는지를 이야기할 때 의미가 있지, 만약 제 배경이 미술 쪽이었다면 작업이 다르게 읽혔을 거라고요. 한마디로 저는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게 맞는 거였어요.(웃음) 이제는 딱히 일과 작업을 구분할 생각은 없지만 한편으로는 좀 더 다른 방식의 사고가 필요한 것 같아요.
EK 선례가 없으니 매 순간 혼란스러웠을 것 같기도 해요.
YN 생각해보면 저는 항상 그랬어요. 예고에 가고 싶었는데 과학고에 갔고 대학 시절에도 공대와 안 어울리는 아웃사이더 이미지 같은 게 있었어요. 근데 또 홍대에서 시각디자인을 공부할 땐 공순이, 엔지니어 같고.(웃음) 유럽에 머무는 동안에는 동양인, 여자라는 점에서 메인스트림이 될 수 없었고요. 지금까지 늘 주변부에 있었다는 느낌이랄까, 근데 오히려 그게 저 자신을 가볍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참고할 만한 선례가 있으면 조금 편할 순 있지만 없으면 어떻게 해도 상관없잖아요. 가능하면 자신에게 책임감은 주지 않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스스로 과장되고 무거워지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대로 꾸준히 하다 보면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K 주변에서 보면 김영나를 롤 모델로 삼는 여성 디자이너나 디자인 전공 여학생이 많아요.
YN 음, 이것도 저를 무겁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인데요.(웃음)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일정 지위나 인지도를 갖췄을 때 그것이 오피니언 리더로 표현된다면 그에 대한 생각을 전혀 안 할 수 없겠죠. 책임감이랄지 행동의 신중함이 필요한데 그렇다고 또 거기에 얽매여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작업할 때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균형을 잘 맞춰야겠죠.
EK 지난해에는 <한국,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 11> 책에 대담자로 참여했죠? 여성 디자이너 정책 연구 모임 Woo의 발기인이기도 하고요.
YN 저에게 2016년은 여러 가지 사건으로 가치가 많이 바뀐 중요한 해였어요. 책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여성으로서 성별을 자각하면서 살 필요가 없는 환경에 있었거든요. 하지만 내가 운이 좋아서 겪지 않았다고 이를 전체로 확대해서 생각할 순 없잖아요. 그동안 내 눈에만 보이지 않았을 뿐 불평등과 불합리가 존재하는데 이를 알면서도 그대로 유지하며 사는 건 기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예전에는 얼굴만 아는 몇몇 여자 후배 디자이너를 보면서 저 친구는 왜 작업을 안 할까 의아해했는데 그들 입장에선 자신의 작업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던 거죠. 저 역시 자주 협업하는 사진가나 출판 기획자, 설치가 등을 보면 거의 남자였고요. 의도적으로 여자들끼리 뭔가를 작업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Woo에서의 활동은 일단 제가 스스로 공부해보고 싶어서 페미니즘 스터디 그룹에 참여했어요. 또 이재원, 신해옥, 최슬기 디자이너와 함께 국내외 정책 사례 리서치를 맡았는데 올해 이와 관련한 전시를 열고자 기획 중에 있습니다.
EK 앞으로 디자이너로서 꼭 해고 싶은 프로젝트나 이루고 싶은 바람이 있다면요?
YN 뭔가 생활에 좀 더 밀접한 것, 옷이나 집처럼 매일매일 생활하면서 접할 수 있는 것을 디자인해보고 싶어요. 디자이너로서 바람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이가 들어서도 디자인을 계속하는 것인데, 지치지 않고 에너지가 있는 한 가능하지 않을까요. 꼭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받지 않아도, 아까 말했듯이 노는 것처럼 하는 작업. 평소에 하던 것을 계속하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