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없이도 그럴듯한, 권위를 비트는 디자이너 김형진
한때 글쓰기를 업으로 삼을 만큼 ‘저자로서의 디자이너’ 역할에 꾸준히 관심을 두는 한편, 출판사 워크룸 프레스를 운영하며 ‘원칙 없는 디자인’을 선보이는 그를 만나봤다. 번지르르한 농담이나 애매모호한 비유 없이도 그럴듯한, 김형진의 디자인처럼 뭐 하나 아쉬운 게 없는 인터뷰였다.
2000년대 중반, 국내 문화·예술계가 그래픽 디자인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던 그때 워크룸은 신선한 미감의 전시·공연 포스터와 홍보물을 디자인하며 존재감을 분명히 했다. 주로 기업 사보나 애뉴얼 리포트 등을 제작하던 디자인 에이전시와 달리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영향력을 넓혀간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 탄생의 신호탄이었다. 워크룸의 공동대표 김형진은 바로 그 중심에서 국내 그래픽 디자인계의 변화의 흐름을 주도한 인물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냥 동료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즐겁고 신기했던 상황이 죽 이어진 결과’다. 한때 글쓰기를 업으로 삼을 만큼 ‘저자로서의 디자이너’ 역할에 꾸준히 관심을 두는 한편, 출판사 워크룸 프레스를 운영하며 ‘원칙 없는 디자인’을 선보이는 그를 만나봤다. 번지르르한 농담이나 애매모호한 비유 없이도 그럴듯한, 김형진의 디자인처럼 뭐 하나 아쉬운 게 없는 인터뷰였다. 인터뷰: 전은경 편집장, 정리: 김민정 기자, 인물 사진: 안상미
EK 지난해 워크룸이 10주년을 맞이했어요.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떤가요? 현재도 탄탄하게,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나요?
HJ 네. 하지만 워크룸은 6개월 뒤 망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조직이에요. 자주 일하는 클라이언트는 있지만 고정적인 일이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일이 없다면 문 닫는 거죠. 그래도 정말 아니다 싶은 일은 거절할 수 있는 여유는 있어요. 다행이죠. 사실 저희는 거절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고 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최악인 일이거나, 진행하다 보니 최악으로 치닫는 일이라면 언제라도 그만둘 수 있는 여유는 만들어놓으려 해요. 사실 오늘 아침에도 클라이언트와 그런 통화를 했어요. “그냥 도로 가져가세요. 저희는 안 할래요”라고.
EK 보통 거절할 땐 이유가 뭐예요?
HJ 다양해요. 기억나는 첫 번째 이유는 주말 근무 때문이었어요. 조판만 두 달쯤 걸렸던, 손이 무척 많이 갔던 책 작업이었는데 인쇄를 넘기기 거의 직전 상황이었죠. 금요일 새벽 3시쯤 최종 교정 작업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다음 날에도 나와달라는 거예요. 저희는 주말 근무를 안 한다고 하니까 화를 내더라고요. 협상할 필요가 없었어요. 디자인 비용 안 받을 테니 다른 데 가서 알아보라고 했죠.
EK 주요 클라이언트는 아무래도 문화·예술계가 많죠? 외부에서 봤을 때, 기업 일은 잘 안 하려고 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어요.
HJ 저희 모두 이전 직장에서 했던 기업 홍보물 작업에 지쳐 있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인쇄물에 사용되는 의미 없는 ‘말’들에 질려 있었죠. 혁신이니 공헌이니 그런 빈말들이오. 그래서 워크룸 초기에는 의식적으로 안 하려고 했어요. 기업 일 계속할 거면 굳이 독립할 이유도 없었고요. 하지만 원칙이라는 게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잖아요. 지금은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죠. 이를테면 저희가 CJ에서 진행하는 그림책 행사나 공연 지원 프로그램 작업을 여러 번 했는데요, ‘이건 그래도 문화 관련 일이니까’라고 자위한다면 좀 구차하잖아요.
2006년 김형진은 디자이너 이경수, 편집자 박활성, 사진가 박정훈과 함께 워크룸을 설립했다(현재 공동대표는 김형진, 이경수, 박활성 세 사람이다). 대학에서 고고미술사학을,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그에게 독립 전 디자이너로서 쌓은 경력은 안그라픽스에서 근무한 1년 남짓으로, 김형진의 표현대로라면 ‘데뷔는 늦었으나 독립은 빨랐던 셈’이다. 공동대표인 박활성은 대학 동창으로 김형진이 한때 외부 필자로 참여한 <design db> 편집장이었다. 이경수는 당시 <design db>의 디자이너로 김형진과 안그라픽스에서 함께 근무했던 동료이기도 하다. 여기에 사진가였던 박정훈까지 총 4명이 각각 500만 원씩 투자해 2000만 원의 자본금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워크룸이다.
EK 디자이너로 일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니까 정해진 코스를 밟는 것과 달랐을 것 같은데요.
HJ 디자인 전공자가 아닌 디자이너는 많지 않나요? 그보다는 서른이 넘어서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했으니 좀 늦은 나이이긴 했어요. 대학원에서 1950~1960년대 미국 미술을 공부했는데 그 때문에 공부를 계속하려면 유학을 가야 했어요. 그렇게 뉴욕으로 떠났는데 그제야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3개월 만에 돌아왔죠. 제가 늦게 깨닫는 편인 것 같아요. 이후 내 앞가림은 스스로 해야 해서 시작한 게 글쓰기인데 <design db>뿐 아니라 그야말로 다양한 매체에 닥치는 대로 글을 썼어요. 한동안은 <씨네21>에 TV 프로그램 비평을 쓰기도 했는데 그걸 보고 한 여성 교양지에서 연락이 와 아예 이름을 내건 꼭지를 연재하기도 했고요. 방송 기자였던 여자 친구(현재 부인)의 영향을 받아 PD 시험을 봤는데 최종 면접에서 떨어지기도 했고. 말하자면 고학력 실업자였어요. 이제 뭘 해야 하나 막막하던 차에 디자인을 배워보자 해서 실기 시험이 없는 SADI에 들어갔는데 2학년 마치고 유급 처리되는 바람에 졸업은 못 했고요. 그러고선 일 년 정도는 집에서 용돈벌이 글쓰기와 살림을 하며 지내던 중 첫딸, 아히가 태어났어요. 더 이상 이렇게 살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번 같이 일했던 안그라픽스 기획 이사에게 연락해서 ‘디자이너로 일할 수 없겠느냐’고 물어봤죠. 답변이 오길 기획 일을 겸하면 과장으로, 디자인만 할 거면 신입 사원으로 들어와야 한다 하길래 그냥 디자이너 하겠다고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셀프 인사 청탁인 셈인데, 아무튼 이런 이상한 방식으로 디자이너가 됐죠.
EK 기획자가 아닌 디자이너를 선택한 건 디자인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은데…. 기획자로 들어가면 직급도 높고 월급도 많이 받으니까 가장 역할을 더 잘할 수 있었잖아요.
HJ 그게 별로 대단치 않게 보였던 것 같아요. 일종의 자신감이었을 수도 있고. 금방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EK 그야말로 나이 많은 신입 사원이었는데 주변에서 도와주는 동료나 선배는 없었어요?
HJ 지금 워크룸을 함께 운영하는 경수 씨나 제너럴그래픽스의 문장현 대표, 박영훈 전 안그라픽스 부사장 등이 많이 도와줬어요. 나이도 많은데 불쌍하다고.(웃음) 막상 일을 시작했을 땐 어마어마하게 고생했어요. 매킨토시를 어떻게 켜는 줄도 모르는 바보였으니 주변의 도움이 절실했죠. 그런데 입사 후 한 달쯤에 회사에서 저한테 큰 프로젝트를 맡겼어요. 당시 KTF(지금의 KT)에서 다이어리 제작을 의뢰했는데 그걸 통으로 해보라고요. 내가 재능이 있나 보다, 그래서 이렇게 큰일을 맡기나 보다 착각하고 꽤 고무되었죠. 결국 인쇄부터 제본, 후가공을 거치는 동안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사고가 다 터졌어요. 오죽하면 인쇄소 화장실에 숨어 울기까지 했으니까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디자인 그만두고 잘하는 일이나 하라고 그 일을 시켰던 것 같아요.
EK 그럼 스튜디오를 차리기 전 디자이너로서 경력은 안그라픽스에서 일한 것이 전부네요?
HJ 맞아요. 매킨토시를 처음 접한 날로부터 1년쯤 지났을 때 워크룸을 열었어요. 그냥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꽤 건방진 소린데, 우습게 보였다고 해야 하나.
EK 스튜디오를 운영하려면 계속 수익을 내야 하잖아요. 처음 구성원 간에 합의한 규칙, 이건 꼭 지켜야 한다는 원칙이나 임무 같은 게 있었나요?
HJ 정관을 만들었어요. 정확한 단어를 사용해서, 간결하게 좋은 문장으로 쓰기 위해 노력했죠. 거기 적힌 원칙 중 가장 중요했던 하나가 아무리 돈이 없더라도 기본급은 무조건 지급한다는 거였어요. 프리랜서를 오래 해봤기 때문에 불규칙한 수입이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잘 알고 있었거든요. 첫 기본급은 50만 원이었어요. 그 달에 돈을 적게 벌든 많이 벌든 무조건 50만 원씩. 그 뒤 3개월, 혹은 6개월마다 기본급을 조정하는 식으로 운영했고요. ‘주말 근무를 하지 않는다’, ‘밤샘을 하지 않는다’ 같은 노동 원칙도 있었는데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어요. 10년 넘는 시간 동안 주말 근무와 밤샘 횟수를 합치면 10번 정도 되니까. 1년에 한 번꼴로 성적이 좋은 거죠.
EK 재정적으로도 꾸준히 목표한 대로 나아가고 있는 건가요?
어떻게 보면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스튜디오 규모를 일부러 작게 유지하는 것이 비결 아닌 비결이었을 것 같아요. HJ 활성 씨가 안정 추구형이라면 저는 확대형이죠. 그 밸런스가 맞았던 것 같아요. 일례로 제가 스튜디오 재정 운영을 맡았던 2009년에는 일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받아서 흑자를 많이 냈어요. 연말에 보너스도 많이 나눠 가졌는데 구성원들에겐 그 1년이 너무 힘들었나 봐요. 모두 이렇게는 못 산다고 해서 다시 활성 씨가 통장을 가져갔어요.(웃음) 활성 씨만 있었다면 규모가 전혀 늘지 않고 저만 있었으면 망했을 것 같은데, 중간에 타협점이 있었던 거죠. 스튜디오 규모도 조금씩 늘려갔는데 사실 그렇게 작은 건 아니죠. 시작할 당시엔 디자이너가 10~20명씩 있는 디자인 에이전시가 흥했던 시기니까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지긴 했지만, 워크룸을 소규모 스튜디오라고 하기엔 살짝 민망한 구석이 있어요. 지금은 8명이나 되니까요. 출판도 마찬가지예요. 처음부터 워크룸 프레스는 독립 출판이 아니라 상업 출판을 한다고 생각하고 만들었으니까요. 누군가 우리를 소규모 스튜디오, 독립 출판사로 정의한다면 굳이 부정하진 않지만 미안한 감이 있어요.
EK 워크룸이 문을 연 시기만 해도 소규모 스튜디오를 찾아보기 힘들었으니까요. 어쨌든 당시로선 큰 모험이었을 텐데 디자이너로서 독립을 결심할 만큼 자신감이 있었나요? 설사 그렇더라도 창업은 또 다른 영역인데 어떤 확신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HJ 그때는 내가 디자이너로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자문조차 안 했어요. 오히려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워크룸도 당연히 잘되리라 생각한 게, 당시 저는 정말 이 필드에 대해 아는 게 없었거든요. 아는 디자이너라고는 안상수, 정병규, 김두섭 선생님 정도였으니까요. 디자인계를 잘 알았다면 그렇게 덜컥 스튜디오를 차리지 못했을 거예요. 클라이언트를 어떻게 확보하고 매출은 어떻게 올리고, 운영은 또 어떻게 할지 아예 고민이 없었던 거죠. 그냥 다 같이 모여서 하고 싶은 것, 잘되겠다 싶은 것을 하는 거니까 당연히 잘되리라 본 거예요. 그런데 경수 씨나 활성 씨는 당시 선배들로부터 ‘한국에선 그런 모델로 성공할 수 없다’, ‘6개월 안에 망한다’ 등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업계에 선배가 없었으니까 그런 얘기를 해주는 사람도 없었고요.
워크룸은 10년이 넘도록 종로구 창성동에 위치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서촌이라는 곳에 첫 둥지를 틀었고 이후 그래픽 디자이너뿐 아니라 건축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독립 큐레이터 등 주변의 이웃과 함께 문화 영역을 매개로 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mk2, 갤러리 팩토리, 건축가 서승모와 공동 설립해 2015년까지 운영한 헌책방 가가린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김형진은 이번 표지 촬영 역시 워크룸이 있는 동네, 그중에서도 자신에게 굉장히 의미 있는 장소라고 밝힌 mk2에서 진행하길 바랐다. 그 결과 표지의 배경은 김형진이 디자인한 포스터가 여러 장 붙어 있는 mk2 화장실 한쪽 벽으로, 의도한 연출이 아닌 늘 존재해온 풍경 그대로를 담은 것이다.
EK 김형진에게 mk2는 왜 특별한 장소인가요?
HJ 서울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집이에요. 로고도 제가 만들었고, 10년간 메뉴판도 직접 디자인했어요. 커피도 맛있고 테이블도 멋지고요. 무엇보다 주인 이종명, 이미경 씨에게 많이 배웠어요. 뭐가 좋고 예쁜 건지에 대해. 아, 로고엔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를 썼어요. 저의 넘버원 타입 페이스죠.
EK 서촌은요? 이 동네가 워크룸 혹은 김형진에게 특별히 영향을 미치나요?
HJ 서촌이라는 곳의 문화적 맥락에는 관심이 없어요. 사실 좀 지겹고 촌스럽죠. 서촌이라는 이름 근처에 우글대는 말과 이미지들이. 그래서 저는 일부러 창성동, 통의동, 이렇게 동네 이름으로 불러요. 이곳은 제 동료들이 있는 곳이죠. 말씀하신 mk2는 물론이고 갤러리 팩토리, 프랙티스, 플랏엠, 더 북 소사이어티 등. 얼마 전까진 슬기와 민도 이곳에 있었고, 버스로 두 정거장만 가면 김영나와 양민영의 스튜디오가 있어요. 한 달 전쯤엔 사진가 EH 김경태도 이곳에 스튜디오를 열었고요. 그들이 없다면 서촌은 아무것도 아니죠. 적어도 저에겐 그래요.
EK 2015년 9월 가가린이 문을 닫았죠.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개인적으로 가가린은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합니다.
HJ 닫을 때가 되어서 닫았다, 이게 당시 제 심정이었어요. 가가린은 한때 독립 출판물 유통의 거점으로 의미가 있었지만 그건 아주 잠시였어요. 더 북 소사이어티나 유어마인드 등이 생기면서 가가린은 사실상 서촌의 유력한 관광 코스가 돼버렸죠. 관광객들은 이곳을 아주 좋아했는데 그것도 썩 괜찮은 일이긴 했어요. 하지만 결정의 순간이 왔을 때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못 되었던 거죠. 가가린이 멀쩡히 잘 운영되고 있을 때 한 잡지에 가가린 부고를 쓴 적이 있어요. “사랑처럼, 가가린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라고 시작하는 글인데요, 젊은 친구들이 ‘자기들처럼 가난했고 낙관적이었던 이 공간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썼죠. 뭐, 그냥 그 정도예요.
EK 사실 오랜 시간 동업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안잖아요. 같은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회사를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서로 의견이 달라지기도 하고 변수도 생기고, 그럼에도 워크룸을 10년 넘게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뭐라고 생각해요?
HJ 워크룸은 디자이너로만 이루어진 조직이 아니라는 게 큰 이유였던 것 같아요. 저와 경수 씨는 디자이너지만 활성 씨는 편집자이기 때문에 부딪히는 지점이 있을 때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한 것이죠. 활성 씨의 존재 덕분에 문제가 첨예해지는 걸 막을 수 있었던 경우가 많았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보자면 전 혼자서는 아무것도 안 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워크룸이 필요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 2006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같이 뭔가를 만들어나가는 게 즐겁고 신기하고 그래요. 사실 유학도 그런 식으로 갔어요.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다 간다길래, 아 나도 가야 되나 보다, 그렇게 토플 보고 GRE 보고, 그랬어요. 전형적으로 친구 따라 강남 가는 타입의 인간이에요.
EK 10년이 넘는 시간을 돌이켜봤을 때 클라이언트나 프로젝트의 성격에 눈에 띄는 변화가 있나요? 그렇지 않다면 미세하게나마 그 흐름이라도 달라졌을 텐데.
HJ 첫 클라이언트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이었어요. 같은 과 선배였던 김인혜 큐레이터가 장 뒤뷔페의 <우를루프 정원> 전시를 맡았는데 내가 디자인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한 거죠. 당시 저는 안그라픽스에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퇴사한 경수 씨가 워크룸의 이름으로 도록을 디자인했어요. 두 번째 클라이언트는 국립중앙박물관이었는데 이 역시 같은 과 선배였던 윤상덕 학예사가 준 일이었어요. 음… 인맥이네요. 초반에는 인맥으로 일을 했고요(웃음), 그렇게 한 1년 정도 열심히 일하다 보니까 이 두 기관의 홍보물이 달라졌다는 반응을 얻게 됐어요. 당시만 해도 문화·예술 쪽에는 그래픽 역량이 집중되지 않았으니까 뭔가 새로웠던 거죠. 이후 자연스레 그보다 작은 단위의 사립 미술관, 갤러리, 공연장 등의 일이 들어오면서 한동안 프로젝트의 90% 이상이 문화·예술 관련 일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죠. 사실 문화·예술 영역에서 워크룸보다 잘할 수 있거나 훨씬 좋은 조건으로 일할 수 있는 디자이너는 얼마든지 많아요. 그럼에도 아직 워크룸이 유효하다면 그건 우리가 편집이 가능한 디자인 스튜디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디자인 스튜디오는 디자이너로만 이루어져 있는 데 반해 저희에겐 편집자가 있으니까. 워크룸 프레스는 편집자 3명, 디자이너 3명으로 그 비율마저 같아요. 이건 제 평가이긴 하지만, 그래픽적으로만 본다면 워크룸은 2010년 초반에 이미 시효를 다했어요.
EK 굉장히 냉정한 평가네요.
HJ 저는 항상 그렇게 얘기해요. 워크룸이 그래픽적으로 뭔가를 돌파하거나 제시할 수 있었던 시기는 2010년 초반까지였다고요. 그 이후 워크룸은, 과거를 팔며 지속하고 있는 거고요. 그리고 11년이나 되었으니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어쩌면 맘 편하게 맡길 수 있는 스튜디오이기도 할 테고요.
EK 이렇게 스스로에게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건 그만큼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어떤 점에선 부족하지만 다른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식이랄까.
HJ 저는 디자이너에겐 어느 정도 ‘자뻑’이 필요하다고 봐요. 자기가 한 걸 엄청 예쁘다고 생각해야죠. 그게 없으면 디자인을 계속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일이 끝나는 순간 거기에서 빠져나올 줄도 알아야 해요. 그러고는 거리를 두고 자기를 평가해볼 수도 있어야겠죠. 자뻑과 거리 두기를 동시에 해낼 수 있어야 해요.
EK 작업에 대한 자신감이 높은 거죠?
HJ 재수 없는 답이겠지만 그래요, 아직까지는.
EK 디자인뿐 아니라 글을 쓸 때도 자기 확신이 강한 것 같아요. 말하는 태도도 그렇고요. 어떤 때는 걱정스러울 정도인데(웃음),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요.
HJ 중·고등학교 때 밀란 쿤데라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의 소설 중 <농담>을 특히 좋아했는데, 책을 읽으면서도 늘 궁금했어요.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좋을까?’ 나름 답을 찾은 게, 나는 그의 단호한 문장이 좋은 거였어요. 물론 번역한 문장이긴 했지만요. 대학 땐 문학평론가 김윤식 선생의 강의를 무척 열심히 들었는데, 그분은 항상 여지가 없이 단호한 말투를 썼어요. ‘훌륭하다’, ‘너절하다’처럼 명확한 단어를 사용해 말했죠. 물론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두는 게 저의 실제 감정 상태에 가까울 거예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얘기해선 다른 사람을 매혹시킬 수 없다고 생각해요.
EK 그렇다면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HJ 원칙이 없는 것이 저의 가장 큰 힘이라고 봐요. 원칙 없는 디자인, 좀 더 공식적으로 말한다면 절충적 디자인을 한다고 할 수 있겠죠. 이건 경수 씨 옆에서 제가 디자이너로서 살아남기 위해 사용했던 방편일 수 있는데요, 경수 씨는 굉장한 원칙주의자, 좋은 맥락에서 도그마를 딱 쥐고 작업하는 디자이너거든요. 디자인에 있어 옳은 것, 좋은 것이 확실하게 있는, 디자인계의 대표적인 원칙주의자 중 한 명일 거예요. 반면 저는 정말 많은 것으로부터 쉽게 영향을 받아요. 아침 출근길에 생각했던 것, 전날 본 그림, 지난주에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 온갖 다양한 것에 쉽게 유혹당해요. 좋은 게 있으면 ‘아! 이거 너무 좋다’하면서 금방 빠져 들고, 또 금세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식이죠. 성정상 원칙적인 작업을 지루해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뒤섞고 맥락 없이 집어넣고, 그런 걸 선호해요.
EK 원칙 없는 디자인을 잘 보여주는 예로 뭐를 들 수 있을까요?
HJ 사람들에게 잘 안 알려진 작업 중에서 말하자면 2008년에 진행한 쌈지 스페이스 10주년 초청장과, 같은 해 사무소 강의 포스터 같은 거? 그 작업을 하기 직전 어쩌다가 목활자 이미지를 보게 됐는데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이틀간 목활자 이미지를 닥치는 대로 모아 디자인에 처발랐죠. 생각해보세요, 쌈지나 사무소가 목활자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당시 유학 중이던 정진열 디자이너가 그 작업을 보고 ‘한국에 뭐 이런 디자이너가 있지?’ 하고 생각했대요. 족보 없는 작업이었던 거죠.(웃음) ‘뭐 하는 애야’,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EK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작업을 꼽는다면요?
HJ 플랏엠과 같이 했던 작업들이오. 꽤 많이 했는데, 2009년 상수동 카페 ‘잇’을 시작으로 ‘비터스윗나인’, ‘에이랜드’, ‘고사소요’, ‘비플러스원’, ‘한성별식’, ‘식스티세컨즈’, ‘루밍’, ‘WEK 키즈’, ‘모파상’, ‘다이빙포펄스’ 등의 작업을 함께 했어요. 플랏엠이 공간을 만들고, 저는 그래픽을 만드는 식이었는데, 언제나 예외 없이 제 그래픽을 완벽하게 공간에 구현해주었죠. 제가 현장 다니는 걸 굉장히 귀찮아한다는 것만 빼면 정말 아무 문제가 없어요.
EK 2012년에는 월간 <디자인> 리뉴얼도 진행했어요. 당시 이야기도 좀 들어보고 싶은데요,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HJ 리뉴얼이 반드시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되진 않아요. ‘단순히 기분을 바꿔보자’라는 것도 충분한 이유가 되죠. 저와 프랙티스의 유윤석 씨가 같이 진행했던 월간 <디자인> 리뉴얼은 후자에 가까운 경우였어요. 당시는 전은경 기자가 새롭게 편집장이 된 지 얼마 안 된 때였고, 더군다나 400호 기념호를 앞두고 있었어요. 변신하기 좋은 상황이었던 거죠. 지면을 13단으로 나누고 이를 변형해가며 운용하자는 기본 틀은 윤석 씨가 짰어요. 전 주로 그걸 흐트러트리는 임무를 맡았고요. 윤석 씨는 그런 저를 ‘룰 브레이커’라고 불렀죠. 저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인하우스 디자이너들에게 리뉴얼 방향을 부드럽고 온전하게 전달하는 것이었어요. 그동안 외부 디자이너가 진행했던 월간 <디자인> 리뉴얼이 한 두 호를 못 버텼던 이유는 디자인이 나빠서가 아니라 인하우스 디자이너에게 새로운 규칙에 익숙해질 시간을 벌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반년에 걸쳐 천천히 리뉴얼을 진행했어요. 매달 두세 꼭지씩 디자인을 바꾸고 다음 달부터 인하우스 디자이너에게 그 꼭지를 넘겨주는 식으로요. 제호까지 온전히 바꾸는 데는 무려 일 년이 걸렸죠.
EK 포스터, 아이덴티티, 북 디자인 등 다양한 작업을 하고 있는데요, 가장 선호하는 분야가 있다면요?
HJ 예전엔 포스터 작업이 제일 좋았고, 잘했어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제 포스터 작업을 어디에 들이밀기가 창피해지더라고요. 주변에 잘하는 분이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책 작업이 제일 좋고, 잘한다고 마음먹기로 했어요. 정말 잘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믿어보려고요.
EK 그렇다면 북 디자인만의 특성과 매력은 뭐라고 생각해요?
HJ 월등히 지겹다는 것. 책 작업의 하이라이트는 본문 교정이에요. 최소 2번에서 많게는 10번 넘게까지, 1쪽부터 마지막 쪽까지 훑으며 고치는 작업을 반복하죠. 이걸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 단순노동의 ‘하이’가 와요.
김형진은 워크룸의 이름으로 자음과모음, 클레마지크 같은 크고 작은 출판사의 북 디자인을 한다. 그리고 편집자 박활성과 출판사 워크룸 프레스를 운영하며 디자인, 미술, 인문·사회 관련 책뿐 아니라 문학 총서 ‘제안들’, 사드 전집, 사뮈엘 베케트 선집 등의 문학 서적도 펴낸다. 2006년 워크룸과 동시에 시작한 워크룸 프레스는 초반 몇 년간은 활동이 뜸했으나 2011년을 기점으로 상업 출판사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문학 총서 ‘제안들’은 표지의 절반을 훌쩍 넘는 띠지에 SM견출고딕으로 크게 적은 저자와 제목이 풍기는 뉘앙스만으로 ‘갖고 싶은 책’의 대명사가 되었다. 2014 코리아 디자인 어워드 그래픽 부문에서 수상작으로 꼽히기도 한 이 책에 대한 당시 심사평은 “오브제로서의 책의 신호탄”부터 “한글 타이포그래피를 단독으로 내세운 당돌함”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EK 워크룸 프레스가 지향하는 책은 어떤 책인가요?
HJ 책은 편집자 소관이에요. 워크룸 프레스의 편집자인 박활성, 김뉘연, 민구홍이 지향하는 것이 곧 워크룸 프레스의 책인 것이죠. 물론 어떤 타이틀을 진행하겠다는 내용의 회의는 해요. 하지만 편집자가 기획한 책을 두고 ‘이건 하자’ 또는 ‘이건 하지 말자’와 같은 결론은 내지 않죠. 어떤 한 사람이 확신을 가지고 무언가를 주장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워크룸 프레스가 동료에 대해 갖는 기본적인 관점도 그래요. 혹여 이해할 수 없더라도 활성 씨가 편집장이라는 이유로, 또 제가 공동대표라는 이유로 결정권을 쥐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경우는 없어요.
EK 맞는 얘기이긴 하지만 대표로서 매출이나 시장 반응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순 없잖아요. 내부에선 어떤 확신이 있어도 시장 반응은 다를 때, 그 간격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지 않나요?
HJ 그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인터뷰에서도 몇 번 이야기했는데, 저희는 이미 출판이 사양산업임을 확실히 알고 시작했기 때문에 기대가 크지 않아요. 홍보나 마케팅을 따로 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꽤 잘하고 있는 거라 생각하고요. 만약 우리가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의 책을 낸다면 판권을 따내기 위해 출판사가 가진 자원을 어마어마하게 쏟아부어야 하니까 심각하게 고민하겠죠. 하지만 워크룸 프레스가 출간하는 책은 편집자 한 사람의 판단을 믿고 진행할 수 있을 정도의 사업적 규모예요.
EK 그렇다면 워크룸 프레스가 지향하는 디자인은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HJ 상품이라는 것. 티셔츠를 디자인하듯 하는 거죠. 파는 거니까요.
EK 워크룸 프레스에서는 다른 출판사의 책도 디자인합니다. 의뢰가 왔을 때 선택의 기준이 있나요? 같은 북 디자인이지만 워크룸 프레스의 책을 디자인할 때와 다른 태도, 기준이 있을 것 같은데.
HJ 별반 다르지 않아요. 어차피 뭘 요청해도 잘 받아들이지도 않으니까. 가능하면 저희의 판단을 믿어달라고 설득하는데, 프랙티스 윤석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가 테이블 위에 드러눕는 걸 잘 한대요.(웃음) 필요하면 아양도 떨고 그러면서 설득하는 거죠. 외주 단행본 작업에만 적용되는 특별한 기준은 없는데, 굳이 말하자면 표지뿐 아니라 본문 디자인까지 전부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선호하긴 해요. 하지만 표지만 맡긴다고 안 하는 것도 아니에요. 말하고 보니 이것도 원칙이 없네요.
EK 사실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도 워크룸이 디자인한 경우에는 스타일이랄지 분위기에서 미묘하게 티가 나요.
HJ 조판값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어디서든 유지되는 특유의 자간, 어간 감각이 있는 거죠. 또 매번 진화하긴 힘드니까 어느 순간 의도와 상관없이 고유한 스타일이 생기기도 하고요. 본문 조판에 대해서는 모두가 중요하다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이고 있는데 저는 가독성이나 판독성이라는 말은 정말 싫어요. ‘제안들’을 조판할 때도 가장 크게 염두에 둔 건 가독성이나 판독성이 아니라 ‘누군가 이 책을 지하철 안에서 읽는다고 했을 때, 옆 사람이 보기에 어떤 느낌일까?’였거든요. 예를 들어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보면 기차 안에서 에단 호크가 어떤 책을 읽고 있잖아요. 근데 그 책의 조판이 후지면 얼마나 싫겠어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어느 정도 멋을 부리고 싶었던 거죠. 한국어 조판 같지 않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무엇보다 ‘나는 이 정도의 책을 읽어’라는 뉘앙스를 풍길 수 있는 밀도감, 사실 이게 가장 중요했어요.
EK 직접 쓴 책을 디자인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HJ 제가 번역한 책은 직접 디자인해요. 그런데 제게 글쓰기는 디자인과 관계없는 완전히 다른 맥락이거든요. 실제로 저는 디자인을 잘하는 것보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훨씬 커요. 그게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EK 특별히 내고 싶은 책이나 쓰고 싶은 주제의 글이 있나요?
HJ 욕심 같아서는 내년 상반기에 3개월 정도 쉬면서 글만 쓸까, 생각하고 있어요. 뭐 별다른 글은 아니고요. 제가 은근히 모범생이라서 디자인을 하고 있는 이상, 디자인에 관한 글을 써야지 다른 건 못 쓰겠더라고요. 2000년대 그래픽부터 시작해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글을 써보고 싶어요. 사실 지난해 일민미술관에서 진행한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전시 역시 2005년부터 2015년 사이의 그래픽 디자인에 대해서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거였어요. 최성민 씨가 비슷한 생각의 글을 SNS에 올린 것을 보고 바로 메시지를 보내서 함께 전시로 기획한 것이죠.
2016년 봄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은 최근 10년간 서울에서 일어난 그래픽 디자인계의 변화를 말하는 전시였다. 김형진, 최성민이 공동 기획하고 길종상가, 김성구, 더 북 소사이어티·테이블유니온·COM, 옵티컬레이스 등이 작가로 참여한 가운데 그래픽의 직접적인 결과물이 아닌 그것이 ‘해석된 풍경’을 전시했다. 그러니까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은 출력된 결과가 아닌, 입력과 출력 사이에 존재하는 맥락을 보여주는 전시였다. 그리고 그 맥락을 통해 시대적·사회적 배경을 유추하고 어제와 다른 오늘을 발견하며, 내일을 이야기하는 전시였다. 보편적 제목과 달리 특정 시기, 한정된 소수 디자이너의 활동을 다룬다는 점에서 불만이 제기됐지만, 처음부터 범위와 대상은 그러했으며 전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상관없는 반응이었던 셈이다.
EK 전시 결과는 만족스러웠어요?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을 기획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요.
HJ ‘젊은 디자이너들이 어떻게 생각할까?’가 가장 중요했어요. 또 ‘선배 디자이너들이 이 전시를 어떻게 잘 무시해줄까?’ 역시 중요했는데 결과적으로 정말, 잘 무시해줬어요. 선배 디자이너 중에 유일하게 자신이 다녀갔음을 표시해준 사람은 정병규 선생님뿐이었어요. 따로 방명록을 적지 않더라도, 누군가 왔다 가면 소식이 들리기 마련인데 그마저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그 점에서는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해요. 최성민 씨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는데, 저는 이 전시를 통해 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거든요. 의도적으로 단순화시켰다고 할까, 굳이 2005년부터 2015년까지 구획을 나누고 이들이 다른 세대임을 부각시킨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EK 그런데 이 전시가 예상치 못한 국면을 맞은 게, 전시 관계자인 함영준 큐레이터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되면서 파장이 컸잖아요. 여기서 인상 깊었던 건 김형진이 이 일련의 사건을 대하는 태도였는데요, 굉장히 적극적이라고 생각했어요.
HJ 함영준 큐레이터는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전시가 열리는 일민미술관의 큐레이터였을 뿐 전시 자체를 기획한 사람은 아니에요. 기획자는 저와 최성민 씨였으니까요. 물론 함영준 씨가 없었다면 전시 진행이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만큼 많은 영향을 미쳤고 헌신적으로 도와준 것도 사실이죠. 따라서 저는 제가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몸을 사리지 않은 것에 대해선 잘했다고 생각해요. 사실 제게도 그 사건은 아직 상처로 남아 있지만 이를 계기로 여성 디자이너 정책 연구 모임 WOO가 발기했고 자성의 계기가 됐으니 결과적으로는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낸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요.
EK WOO에 대한 연대와 지지에도 적극적인데요, 생각해보면 김형진의 시선은 늘 디자인업계 전반에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데에만 급급해하지 않고 외부를 향해 항상 열려 있는 느낌이랄까요.
HJ 저는 외부에 특별한 관심은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이나 후배들이 하는 일에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 특히 저보다 어린 사람들이 하는 일은 웬만하면 옳다고 생각하고 지지하는 편인데요, 나이가 많은 사람보다 어린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옳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거든요. 물론 세부적으로는 실수할 수 있지만 그건 지적해서 고치면 되는 것이고, 논리와 논리가 부딪힐 경우엔 웬만하면 젊은 세대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배들의 역할은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 그걸로 충분해요.
EK 그렇다면 새롭게 떠오르는 스타일의 흐름 가운데 눈여겨보는 것이 있나요? 디자인만 봤을 때 요즘 눈길을 끄는 작업은 어떤 거예요?
HJ 2014년인가, 계간 <그래픽> ‘New Studio’ 이슈를 보았을 때 좀 충격을 받았어요. 도무지 제 그래픽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작업들이 가득했거든요. 나쁘다는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머리로 따라잡히지 않는 작업들. 좋긴 너무 좋은데 어떻게 구성한 것인지 상상이 안 되는 거예요. 저도 디자이너니까 누군가의 작업을 보면 어떻게 했는지 감이 오거든요. 그런데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단순히 새롭고 더 잘하고 참신하다 정도가 아니라 저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이해하지 못하는 레이어를 구축하는 거죠. 예를 들면 박철희, 양민영, 김성구, 맛깔손, 정새우, 김규호 같은 디자이너들의 작업이 그래요. 프레스룸의 작업도 무척 좋아하는데, 이 팀은 나이에 비해 고전적인 방식의 그래픽을 보여주죠. 그래서 제가 이해할 수도 있고요. 프레스룸이 들으면 싫어할 얘기려나?
EK 그래서 결국 이해는 하지 못한 건가요?
HJ 네. 그런데 그나마 잡은 지푸라기 정도를 얘기해보자면 ‘스크린이 기본 베이스라서 그렇다’ 정도?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전시에서도 김성구 디자이너의 작업은 마치 컴퓨터 화면처럼 보였잖아요. 스크린에서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를 생각하고 하는 작업과 인쇄를 했을 때 어떻게 보일까를 염두에 두고 하는 작업은 다를 수밖에 없는 거죠. 레이어 숫자만 놓고 봐도 인쇄에서는 몇 겹만 겹쳐도 뭉개지지만 스크린에서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으니까요. 반면 저는 하나의 레이어로 끝내는 작업이 많아요. 아무리 복잡한 작업이어도 겉으로 볼 땐 하나의 레이어처럼 보이게 하고요. 사실 몇 달 전에 그럴싸하게 흉내를 내보려고 한번 시도도 해봤어요. (스마트폰에서 이미지를 찾아 보여주며) 엑셀 템플릿과 픽셀을 가지고 작업해본건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좀 애처롭네요.
EK 보통 그런 작업은 개인 프로젝트로 하는 건가요?
HJ 아니요. ‘클리닉부터 스크린까지, 건강과 행복을 구하는 방법들’이라는 강연을 위한 포스터였어요. 저는 개인 작업은 하지 않아요. 흔히 말하는 자기 주도 작업은 거의 안 해요. 워크룸 일만 하죠.
EK ‘상업 디자인의 허기를 개인 작업으로 메운다’는 말도 있잖아요. 회사를 다니면서 개인 작업을 하기도 하고. 김형진의 경우 어차피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기 때문에 그런 간극이 없다는 얘긴가요?
HJ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제가 원래 하고 싶은 게 별로 없기도 해요.
김형진은 아침 8시 반부터 밤 9시까지 평균 13시간을 스튜디오에서 보낸다. 워크룸 프레스의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책상이 그의 자리로, 잠깐 쉬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는 일도 없이 그냥 일만 한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아이들과 놀거나 개를 산책시키고 읽을 거리가 있으면 보다가 잠든다. 최근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 산 것은 가을용 맨투맨 티셔츠. 회색 오버사이즈로 스튜디오 근처 스트로모브카라는 빈티지 옷 가게에서 구매했다. 또 BEM이 제작한 ‘서울인기’ 굿즈 티셔츠 중에서 ‘인천’도 샀다. 그 외에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스타벅스 카드를 충전하고, 사흘에 한 번꼴로 담배 한 갑을 사며 유흥은 하지 않는다.
EK 요즘 관심을 갖는 이슈가 있다면요?
HJ 바로 얘기가 안 나오는 걸 보니 없나 봐요. 음… 대신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까 그 생각은 항상 해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방편에는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좋은 취향을 갖는 것일 수도 있고 나의 윤리적 기준을 계속 높이는 것일 수도 있고. 하고 싶은 대로, 되는 대로 다 해버리면 꼴불견인 나이가 됐거든요. 간단히 말해서 ‘자기 훈육을 어떻게 할까’ 이게 저희 가장 큰 관심사라 할 수 있죠.
EK 앞으로 하고 싶은 프로젝트는요?
HJ 없어요. 디자인이라면 할 만큼 하고 있어요. 그 외엔 글을 잘 쓰고 싶어요. 제가 살면서 들었던 칭찬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요. 그중 하나가 ‘참 원칙 없는 사람이다’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고요, 다른 하나는 제가 좋아하는 선생님으로부터 글 잘 썼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예요. 좋은 글 쓰고 싶어요. 항상.
EK 그 렇다면 디자이너 김형진을 자극하는 것은요? 누가 김형진을 자극해요?
HJ 음… 제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오. 지금 디자인하는 책의 편집자일 때도 있고, 동료 디자이너일 때도 있고, 제 딸, 아들, 아내일 때도 있고요. 아, 얼마 전에는 데이비드 보위에 대한 책 표지 작업을 했는데 그땐 누구보다 데이비드 보위에게 잘 보이고 싶었어요. 누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매일 데이비드 보위 음악만 들으면서 작업했어요. 이런 식으로 매번 그 대상이 바뀌어요.
김형진이 꼽은 (버리기 아까워 모아뒀다 이제야 버리려고 마음 먹은) 다섯 가지 거절당한 시안
1 <재즈 싱잉의 비밀> 책 표지 시안.
2 모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 포스터 시안.
3 모 회사의 50주년 기념 로고 시안.
4 모 가구 판매 회사의 프로젝트 로고 시안.
5 <윈터슬립> 포스터 시안.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