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가옥 오초량에서 만난 〈에디터갑의 집〉

대충 좋은 것 말고, 진짜 좋은 것으로 채운 집

일본식 근대 가옥에서 복합문화공간으로 재개관한 오초량이 세 번째 기획전을 열었다. 전시 제목은 <에디터갑의 집>. 20년 경력의 아트, 건축, 공예 전문 에디터이자 갤러리 클립 대표 정성갑이 기획을 맡았다. 아트부산 주간 그가 직접 도슨튼이 되어 소개해 준 전시 이야기를 만나보자.

100년 가옥 오초량에서 만난 〈에디터갑의 집〉

지난 9일부터 12일까지 이어진 아트부산 주간, 페어장 밖에서 주목받은 전시가 하나 있다. 바로 오초량에서 진행된 <에디터갑의 집>이다. 지난해 5월 일맥문화재단이 전시관 겸 복합교육문화공간으로 재개관한 오초량의 세 번째 기획전으로 갤러리 클립 정성갑 대표가 기획했다. 전시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이번 전시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공간 중 하나인 ‘집’과 그 안을 채우는 ‘사물’을 주목한다.

<에디터갑의 집> 전시 실내와 야외 정원 모습 (사진. 공정현)

20년의 잡지 에디터와 편집장의 시절을 지내고 제게 본질적 가치로 남은 것이 있다면 집입니다. 집에서 행복한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꿈꾸는 집은 우선 건축적인 집입니다. 아늑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구조적으로 멋이 있는. 그리고 그 안에는 공예적 손길의 바닥과 기둥, 벽면과 계단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성껏 단장하고 매만진 구석이 없는 집은 우리의 눈과 마음에 어떤 색채도 만들어주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내 스스로 작가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구와 그림. 헤르만 헤세가 말하는 ‘신성한 무위’는 이런 총체적 분위기와 흐름의 바탕에서 비롯된다고 믿습니다.

전시 서문 ‘집에서 누리는 신성한 무위無爲를 위하여’ 중 일부분

<에디터갑의 집> 전시 전경 (사진. 공정현)

잡지 <럭셔리> 피처 디렉터, 디자인프레스 편집장, <공예+디자인> 편집장을 지내온 정성갑 대표. 이번 전시를 위해 그는 지난 20년간 쌓아 온 안목과 취향을 바탕으로 작품 한 점 한 점을 신중히 선별했다고. 특히 이번 전시는 100년 된 근대 가옥인 오초량에 사는 누군가를 상정하고 그 사람의 취향을 보여주는 콘셉트인 만큼 아트, 건축, 공예 전문 에디터이자 건축 애호가로 살아온 정성갑만의 앵글을 보여준다. 그 결과 황형신, 이정배, 윤태인 작가의 가구와 오브제부터 남춘모, 김선형 작가의 회화, 그리고 이혜미 작가의 도자 설치 작업까지 정원과 2층 구조의 실내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다.

대충 좋은 것 말고 진짜 좋은 것

황형신 작가의 1인용 데스크와 윤태인 작가의 CLAY Series_Table lamp의 모습 (사진. 공정현)
오초량에서 진행 중인 <에디터갑의 집> 전시 전경 (사진. 공정현)

<에디터갑의 집> 전시를 위한 작품을 고민하며 정성갑 대표가 강조한 것이 하나 있다. 대충 좋다고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좋은 단 한 점이 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힘’이 있는 작품이라고 표현한다. “비례가 맞지 않고, 소재가 좋지 않고, 생각과 기술이 정리되지 않은 작품에는 힘이 없다. 힘은 아름답고, 정교하고, 초월적이며, 어떤 철학을 담고 있을 때만 비로소 작품 안에 생명처럼 서린다.”라며 힘이 있는 작품이야말로 진짜 좋은 작품이라고 정성갑 대표는 말한다. 아울러 그는 모노하 거장 이우환 작가의 “진짜 좋은 것들로만 하나씩 갖는 것이 진정한 럭셔리”라는 말을 언급하며 이를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좌표로 삼았다고도 밝혔다. 정성갑 대표가 전시 준비 과정을 기록한 인스타그램 피드 글 중 ‘이번 전시 많이 아름다울 겁니다’라는 대목이 유독 진실돼 보인 건 이처럼 기품과 박력이 가득한 작품에 그가 방점을 찍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다양한 표정과 기운이 깃든 집

1층 도코노마 모습 (사진. 공정현)

집에 평면이 있다면 입체도 있어야 한다. 네모가 있다면 동그라미가 있어야 하고, 나무가 있으면 금속도 있어야 한다. 소재와 형태가 다양하게 맞물릴 때 비로소 집이라는 공간에는 표정과 기운이 생긴다. 정성갑 대표가 이번 전시에서 각기 다른 재료, 모양, 크기의 작품을 고른 이유다.

일본식 가옥인 오초량 1층과 2층 공간에는 유독 눈길을 끄는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도코노마다. 다다미 바닥 보다 한 단 높여 만든 도코노마는 화병, 서예 족자, 미술품 등 값비싼 장식품을 올려두는 장식 공간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하이라이트 역할을 톡톡히 한다. 1층 도코노마에는 포스트 단색화가로 불리는 남춘모 작가의 회화 작품 두 점과 이혜미 작가의 도자 작업, 황형신 작가의 테이블 작업 각각 짝을 이루고 있다. 흥미로운 건 도코노마 위에 올려진 작품들이 각기 다른 장르와 소재를 지니고 있음에도 어느 하나 모난 것 없이 균형의 미를 갖췄다는 점이다.

오초량에서 만날 수 있는 남춘모 작가 작품들 (사진. 공정현)


남춘모 작가는 광목을 일정한 크기로 자른 뒤 캔버스에 가득 붙여 그 위에 선을 그었다. 정성갑 대표는 남춘모 작가의 힘 있고 자유로운 선에서 느껴지는 리듬과 율동 그리고 박력에 매료되었다고. 한편 또 다른 그의 작품은 광목을 나무틀에 붙인 후 레진으로 떠올린 뒤 그 위에 세 가닥의 선을 그었다. 남춘모 작가를 상징하는 부조 회화다. 평면을 입체로 만드는 과정에서 갖추게 된 공예의 미감과 건축의 구조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남춘모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20호 크기의 작품을 새로 제작했다. (사진. 공정현)

한편 이번 전시에서는 남춘모 작가의 20호 크기 작업도 만날 수 있다. 이를 위해 정성갑 대표는 대구의 작가 작업실을 직접 방문하고, 인당미술관과 대구 리안갤러리 전시를 직접 찾으며 작가와 인연을 맺었다. 대게 60호 이상의 큰 작품으로 구성된 남춘모 작가의 작업에서는 보기 드문 크기임에도 작가는 “어떤 느낌일지 한 번 해 보지요”라는 말과 함께 두 점을 새로 제작했다. 일반 화이트큐브 공간 보다 협소한 오초량 공간에 맞춘 두 작품은 오초량 라이브러리 공간 입구에서 만날 수 있다.

3cm 배수로 선과 면을 이룬 황형신 작가의 작품 (사진. 공정현)

1층 도코노마에 올라간 이혜미 작가와 황형신 작가의 작품도 개성 있는 형태와 소재 활용으로 눈길을 끈다. 특히 황형신 작가와 정성갑 대표의 인연은 남다르다. 그가 4년 전 갤러리 클립 오픈을 준비하면서 시작된 연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이번 전시의 콘셉트를 건축애호가의 집으로 잡으면서 가장 먼저 떠올리고 연락한 이가 바로 황형신 작가라고 말했다.

차갑고 딱딱한 스틸을 주재료로 사용하지만 황형신표 작품에는 따뜻함과 듬직함 그리고 무엇보다 모던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정성갑 대표의 말에 따르면 작가는 마리오 보타, 페터 춤토르 등 유명 건축가들의 고향인 스위스로 건축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관심이 많은 인물로 그의 작품은 건축물과 같은 기하학적 구조를 지닌다. 무엇보다 3cm 배수의 단위로 선과 면을 구성하는데 덕분에 모든 작품은 비스포크 제작이 가능하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스틸 의자, 대형 다이닝 테이블, 황동 콘솔, 병풍, 라운지 테이블까지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다.

실내 공간과 야외 정원에 자리한 이혜미 작가의 작품은 집의 표정을 다채롭게 해준다. (사진. 공정현)

달항아리로부터 모티프를 얻은 이혜미 작가의 도자 작업도 흥미롭다. 흙으로 만든 도자 위에 작가는 은분을 입혔는데 흙을 매만진 손의 흔적들이 은분 아래 은은하게 비치는 점이 특징이다. 아울러 은분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색되는데 세월에 따라 달리 보이는 작품의 색을 보는 재미도 있다. 한편 정성갑 대표는 1층, 2층, 야외정원까지 곳곳에 이혜미 작가의 작품을 분산시켜 배치했다. 이는 공간 곳곳에 구 형태의 작품이 자리할 때 집의 표정과 분위기가 다채로워지기 때문인데 기획자로서의 그의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혜미 작가의 작품 못지않게 오초량에서 눈을 돌리면 마주할 수 있는 작품이 있다. 바로 김형선 작가의 동양화 작업이다. 그는 아크릴 물감으로 동양화를 그린 첫 번째 세대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2층 도코노마를 장식하는 그림도 바로 김형선 작가의 작품이다. 구상과 추상을 오가는 그의 작품은 때로는 기운생동이, 때로는 아기자기함이 느껴진다. 작가는 한지 중에서도 제일 두껍고 질긴 종이인 장지를 사용하는데 아크릴 물감의 농담을 조절해가며 종이에 흡수시켜 그림을 그린다. 캔버스에 물감을 올리듯이 바르는 서양화와 달리 바탕과 색이 교감을 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이정배 작가의 목가구. 간결함과 실용성은 조선 목가구의 모습과 닮았다. (사진. 공정현)

조선 목가구를 오랜 시간 연구해 온 이정배 작가가 만든 가구도 에디터갑의 집의 표정을 다채롭게 만든다. 테이블과 거치대 등 그의 가구에는 조선시대의 간결함과 실용성이 묻어난다. 이에 작가는 자신만의 풍류를 더했는데 1층 다다미 방에 놓인 독서 테이블은 조선 후기 풍류와 해학 그리고 낭만을 그린 신윤복의 그림 ‘주유청강(舟遊淸江)’으로부터 모티프를 얻었다. 배의 형상을 테이블 아래 표현했고, 풍등처럼 가볍게 흔들리는 조명도 더했다. 테이블 아래에는 볼트와 같은 장치도 여럿 달려 있는데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뒤틀리는 목재를 고정해 주는 장치로 그 조임을 달리해 가구가 자연스럽게 숨을 쉴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이정배 작가의 책 거치대 옆에 놓인 스툴은 윤태인 작가의 작품이다. 황형신 작가를 찾아간 작업실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작가와 그의 작품은 전시를 구상 중이던 정성갑 대표의 눈을 사로잡았다. 윤태인 작가는 나무로 작품의 뼈대를 만든다. 그 위에 점토를 붙이고, 알루미늄으로 캐스팅한다. 알루미늄 소재임에도 점토를 매만진 손의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덕분에 작품에서는 온기가 느껴진다. 실내 공간과 야외 정원 곳곳에서 마치 원래 있었던 마냥 스리슬쩍 자리하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차를 내어주는 오초량의 부엌 공간 (사진. 공정현)

마지막으로 전시를 모두 둘러봤다면 오초량에서 내어주는 차를 받아 들고 나만의 시간을 즐겨보자. 100년의 가옥에서 정성갑 대표가 전하는 작품을 곱씹어 보며 일상의 지속 가능함을 누려보길. “아름다운 걸 수시로, 자주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힘에 부치는 이 삶을 더 단단하게 붙잡을 수 있는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라는 그의 말은 이번 전시가 하나의 제안이 아니라 위로에 더 가까웠음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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