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설렘을 디자인하다, 트래블러스 노트
트래블러스 노트는 커버를 고르고 리필을 조합하는 과정 자체가 여행처럼 작동하며, 그 감각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아왔다.

여행은 어쩌면 장소가 아니라 상태에 가깝지 않을까. 낯선 곳을 향하는 기대감, 일상을 벗어나는 감각, 그리고 아직 펼쳐지지 않은 시간에 대한 설렘까지. 트래블러스 노트는 이러한 감각을 일상 속에서도 이어갈 수 있도록 기획한 노트다. 커버를 고르고 리필을 조합하는 과정 자체가 여행처럼 작동하며, 그 감각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꾸준히 사랑받아왔다. 이 노트를 기획한 이이지마 아츠히코에게 그 시작을 묻자 “나부터가 여행하는 기분으로 디자인한 노트”라는 답이 돌아왔다.

트래블러스 노트는 어떻게 시작됐나?
2004년 여름, 재직하던 디자인필(미도리, 플로터 등을 제작하는 문구 회사)에서 ‘A5 슬림 사이즈 노트’를 주제로 사내 공모전을 개최했다. 그 소식을 듣고 알고 지내던 치앙마이 공방에 커버 제작을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만드는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가죽 소품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러프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시제품을 제작했고, 그렇게 완성된 것이 트래블러스 노트 커버의 원형이다. 시제품을 처음 본 순간 ‘여행’이라는 키워드가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이를 바탕으로 여행을 주제로 한 노트를 만들기로 했다. 다만 여행 일정표나 준비물 리스트를 적는 ‘여행 전용 노트’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 포맷은 사용 방식이 제한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는 감정 자체에 초점을 맞춰 일상 속에서도 여행의 설렘과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노트로 발전시켰다. 여기에 다양한 리필 용지를 더해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한 구조를 갖추며 지금의 트래블러스 노트가 완성됐다.

트래블러스 노트는 사이즈부터 남다르다.
사이즈는 기존에 정해진 규격이 아닌, 트래블러스 노트다운 필연성과 의미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레귤러 사이즈는 지도나 비행기 탑승권을 끼워 넣고 그대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는 감각을 담고자 했고, 패스포트 사이즈는 여권 크기에서 오는 직관적인 연상을 반영했다. 속지는 자유롭게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지만 사이즈 선택지는 제한되어 있는데, 이러한 불편함이 오히려 사용자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올해는 브랜드 론칭 20주년을 맞아 카드 사이즈 노트를 새롭게 선보일 예정이다.
블랙, 브라운, 캐멀, 블루, 올리브로 이어지는 색상도 인상적이다.
초기에는 가죽의 기본색인 블랙과 브라운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각 색이 지닌 의미와 맥락을 고려해 확장해왔다. 예를 들어 2025년 한정 컬러로 선보인 레드는,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는 시대에 ‘Love And Trip’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선택한 색이다. 패키지 역시 일반적인 문구 제품에서는 보기 드문 박스 형태를 선택했다. 제품을 손에 들고 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꺼내기까지의 과정을 하나의 경험으로 만들고, 그 과정에서 설렘이 느껴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30종이 넘는 다양한 리필도 특징이다. 어떤 방식으로 확장했나?
처음 시제품을 받았을 때 빨리 써보고 싶어 무지 종이로 노트를 만들어 사용해봤다. 줄이 없는 지면은 낯설었지만, 오히려 자유롭게 기록할 수 있고 낙서나 티켓, 스탬프 등을 더할 수 있어 사용 방식이 확장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러한 무지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기본 리필은 무지 노트로 구성하게 됐다. 이후 리필은 종이의 색, 두께, 질감을 중심으로 확장해왔다. 인쇄된 포맷을 제시하기보다 사용자가 무엇을 쓰고 어떻게 표현할지를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새로운 리필은 내부 아이디어에서 출발하기도 하고, 사용자 의견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도화지 리필은 그림을 그리는 사용자의 요청에서 시작됐고, 연결 밴드는 여러 권의 리필을 고무줄로 묶어 함께 사용하는 한 팬의 방식에서 파생됐다. 모든 리필은 샘플 제작과 실제 사용을 거쳐 최종적으로 상품화 여부를 결정한다.
15주년 기념 프로젝트 ‘B-sides & Rarities’도 기억에 남는다. 물에 젖어도 찢어지지 않는 종이, 스티커 분리 용지, 편지지 패드 등 실험적인 리필 용지를 선보였다.
개발했지만 여러 이유로 출시되지 못한 리필 용지가 15년 동안 축적돼 있었다. 이를 한데 모아보니 기존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사용 방식이 드러났고, 상품화를 전제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실험적인 아이디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레코드 싱글 B면에서 착안했다. 대중성을 고려한 A면과 달리 B면은 보다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이러한 태도는 타인의 평가보다 개인의 취향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트래블러스 노트의 성격과 잘 맞는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일부 리필은 이후 정규 제품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리필 용지뿐 아니라 펜, 펜 홀더, 스티커, 지퍼 케이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노트를 커스터마이징할 수 있다는 것도 트래블러스 노트의 특징이다.
커스터마이징의 핵심은 ‘자유’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꾸미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더할지 스스로 선택하는 과정에 가깝다. 무지 리필에 하나씩 더해가는 순간, 노트에는 자연스럽게 개인의 취향과 경험이 쌓인다. 그렇게 완성된 노트는 각자의 기록이자 하나의 결과물이 된다. 사람들은 이 노트를 서로 보여주고 공유한다. 그 과정에서 취향이 오가고, 새로운 방식이 만들어지며, 사용자 간의 연결이 형성된다. 트래블러스 노트는 이렇게 개인의 기록에서 출발해 커뮤니티로 확장되었다.
2011년에는 오프라인 공간 ‘트래블러스 팩토리’를 오픈했다.
2009년 처음으로 고객을 초대한 오프라인 이벤트를 통해 제품이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이를 계기로 브랜드의 거점이 될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고, 트래블러스 팩토리를 열게 됐다. 이 공간은 번화가가 아닌 골목에 위치하며, 시간의 흔적이 드러나는 재료와 분위기를 통해 방문자가 자신의 기억과 감각을 환기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스탬프나 ‘트래블러스 타임즈’처럼 트래블러스 팩토리에서만 만날 수 있는 요소도 있다. 스탬프를 찍기 위해 일본 각지는 물론 각 나라의 트래블러스 노트 팝업을 돌아다니는 마니아도 있다고 들었다.
스탬프는 트래블러스 노트 출시 이전, 디자이너인 하시모토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그는 ‘트래블러스 노트’라는 글자와 지구본 이미지를 조합해 스탬프로 찍힌 듯한 형태의 로고를 만들었다. 그러던 중 “이걸 실제 스탬프로 만들어보면 어떨까”라는 제안이 나오면서 지금의 로고와 스탬프가 완성됐다. 이후 스탬프를 다양한 곳에 찍어보며 자연스럽게 활용 방식이 확장됐다. 노트 표지에 찍으면 하나의 오리지널 노트가 되고, 우표나 티켓 위에 찍으면 또 다른 개성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사용 경험은 2009년 오프라인 이벤트에서 사용자들이 직접 노트를 꾸미는 모습으로 이어졌고, 스탬프 코너는 이후 이벤트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한편 트래블러스 노트를 둘러싼 다양한 요소는 종종 ‘망상’에서 시작된다. 현실성이나 근거는 잠시 내려놓고, ‘트래블러스 에어라인이 있다면?’, ‘트래블러스 카페는 어떤 모습일까?’처럼 우리가 좋아하는 것 앞에 ‘트래블러스’를 붙여보는 식이다. 연 1회 발행하는 ‘트래블러스 타임즈’ 역시 ‘트래블러스의 신문이 있다면?’이라는 상상에서 출발했다.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와 사용자들의 노트, 그리고 브랜드가 품고 있는 다양한 상상까지 담아내며 트래블러스의 세계를 조금씩 확장해가고 있다.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도 전개하고 있다. 협업은 어떻게 이뤄지나?
우리에게 협업은 트래블러스 노트를 쓰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여행이나 무언가를 시작할 계기를 제공하는 일이다. 동시에 우리가 좋아하거나 동경하는 사람, 브랜드와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즐거운 과정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3년 홍콩 스타페리와의 협업이다. 아직 홍콩을 여행해보지 않았거나 스타페리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용자들에게 여행의 계기를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스타페리의 역사와 분위기를 반영한 참 장식과 클립, 리필 노트를 구성했고, 리필 노트에는 구룡반도에서 홍콩섬까지의 루트 맵과 브랜드의 이야기를 담았다. 여기에 스타페리를 탈 수 있는 티켓을 넣어, 노트를 매개로 실제 여행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다양한 리필, 굿즈, 협업, 오프라인 공간 등으로 확장해왔지만 전체적으로는 일관성이 느껴진다. 트래블러스 노트라는 브랜드를 하나로 묶는 디자인 기준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기준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디자이너 하시모토와 함께 시작할 때부터 타깃을 노트를 만드는 우리 자신으로 잡았다.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고 직접 쓰고 싶고 설렐 만한 활동인가를 가장 먼저 고민했다. 그 기준에 공감하는 동료들이 모이면서 트래블러스의 세계도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지난 20년 동안 동일본 대지진과 팬데믹, SNS와 AI를 비롯한 디지털 환경의 변화 등 많은 사건을 겪었다. 그럼에도 마케팅 데이터보다 이러한 변화를 직접 경험하며 얻은 감각과 직감을 바탕으로 다음 방향을 고민했다. 기술이 빠르게 발전할수록 오히려 그런 직감에 기반해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일의 의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