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디자인〉이 밀라노에서 주목한 전시 5

이미 많은 사람이 온·오프라인 채널에서 밀라노 전시장의 이미지를 숱하게 보았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잊지 말자. 밀라노 디자인 위크는 단순히 사진 몇 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디자인 이벤트가 아니다. 디자이너, 갤러리, 미술관, 기업, 학교, 기관 등 디자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비즈니스를 강화하는 생태계다. 지금 소개하는 전시들은 이러한 커뮤니티가 모여 1년간 연구하고 실험하며 작업한 결과물이다.

월간 〈디자인〉이 밀라노에서 주목한 전시 5

1. 이탈리아 컨템퍼러리를 묻고 싶다면 이들에게, 인테르니 베노스타

가구 브랜드 인테르니 베노스타는 가구 컬렉션 론칭을 소개하는 공식 보도 자료에 이렇게 적었다. “이 프로젝트는 디모레 스튜디오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디모레 스튜디오의 브릿 모란Britt Moran과 에밀리아노 살치Emiliano Salci가 독점적으로 관리하는 브랜드이기 때문이다. 전시가 열린 곳은 고대 조각상을 만들어온 석고 모형 갤러리 ‘푸마갈리 & 도시Fumagalli & Dossi’. 1970년대 이탈리아 디자인에 경의를 표하겠다는 인테르니 베노스타의 지향점을 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장소였다. 브랜드명은 이탈리아 디자인에 한 획을 그은 디자이너 카를라 베노스타의 이름에서 빌려왔다. 그의 작업을 재해석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디자인이 차고 넘쳐 풍요롭다 못해 피로하기까지 한 오늘날,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고유의 디자인을 선보이겠다는 의지였다. 인테르니 베노스타의 가구에 대한 첫인상은 뚜렷했다. 단순하고 간결하고 정직한 가구. 여기에 우아함을 더했다. 브릿 모란과 에밀리아노 살치의 표현에 따르면 ‘현대와 고전이 조화를 이루는 아방가르드’ 디자인이다. 푸마갈리 & 도시에서는 침대, 식탁과 의자 세트, 커피 테이블, 파티션, 테이블 램프 등 7점의 가구를 선보였는데 마치 한 집을 위해 만든 듯 조화로웠다. 이들은 앞으로 1년간 또 다른 디자인을 추가해 집 하나를 전부 채울 수 있는 컬렉션을 만들겠다고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트렌드가 변화하는 오늘날, 시류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포부를 밝힌 디모레 스튜디오, 아니 인테르니 베노스타의 다음 행보를 주목해도 좋겠다.

디자인 인테르니 베노스타Interni Venosta

제작 파브리 세르비체스Fabbri Services

사진 안드레아 페라리Andrea Ferrari


2. 플로스의 열망

1988년 팔라초 비스콘티에서 세계적 디자이너들과 협업 시대를 열겠다고 공표한 플로스가 36년 만에 같은 장소로 돌아왔다. 전시는 사진 한 장에서 시작했다. 1988년 필립 스탁을 포함한 세계적 디자이너들이 팔라초 비스콘티에서 플로스의 새로운 컬렉션을 발표했고, 마리아 물라스Maria Mulas가 행사장의 면면을 카메라로 담았다. 그중 플로스가 주목한 사진은 아킬레 카스틸리오니Achille Castiglioni, 파비오 롬바르도Fabio Lombardo, 이탈로 루피Italo Lupi, 질로 도르플레스Gillo Dorfles 등 업계 인사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 플로스의 CCO 바르바라 코르티Barbara Corti는 “이 사진이야말로 브랜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1998년을 소환한 팔라초 비스콘티의 전시가 어떤 향수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보다는 과거의 헤리티지를 영리하게 활용해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열망에 가까웠다. 가벼움과 대담함, 디자이너의 새로운 시도를 기꺼이 받아들일 책임, 용기, 무모함을 모두 갖고 있었던 그때의 정서를 환기하며 디자인이 얼마나 막중한 작업인지 되돌아보고자 한 것이다. 플로스는 에르완 부룰레크Erwan Bouroullec, 포르마판타스마Formafantasma, 바버 오스거비Barber Osgerby와 협업한 신제품을 소개하며 “디자이너들이 천재성을 표현할 수 있는 놀이터 역할을 계속하겠다”라고도 밝혔다. 플로스에게 디자인이란 곧 집단 지성이며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학문이다.

참여 디자이너 미카엘 아나스타시아데스 바버 오스거비, 포르마판타스마, 에르완 부룰레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바르바라 코르티

전시 디자인 Arquitectura-G


3. 역사성에 장소성이 더해질 때, 알코바

알코바의 전시가 열린 빌라 바가티 발세키 전경.

알 만한 사람은 이제 다 안다. 알코바의 전시를 보기 위해 기꺼이 반나절 정도는 투자할 수 있다는 것을. 2018년 발렌티나 치우피Valentina Ciuffi와 요세프 그리마Joseph Grima가 설립한 이 전시 플랫폼은 밀라노의 버려진 장소를 알리는 가장 강력한 가교라고 할 수 있다. 공장, 군 병원, 도살장까지, 전시를 열지 못할 장소가 없었다. 밀라노 시내에서 차를 타고 족히 30분은 가야 하는 외곽 곳곳에서 게릴라처럼 전시를 진행하기도 했다. 알코바의 자신감은 또 한 번 통했다. 올해는 이전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로 디자인 애호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생활과 제작의 미래를 연구하는 ‘플랫폼’이라는 알코바의 지향점을 고스란히 보여줄 수 있는 빌라 두 곳을 주거 실험의 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먼저 빌라 보르사니Villa Borsani는 가구 회사 대표이자 건축가인 오스발도 보르사니Osvaldo Borsani가 가구 생산 시설 인근에 가정집으로 쓰려고 직접 지은 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설계를 시작해 1945년에 완공한 모더니즘 주거 건축의 걸작이다. 무성한 정원으로 둘러싸인 이 건물은 보르사니 가문의 후손이 대를 이어 살고 있는 개인 거주지이자, 오스발도 보르사니 기록 보관소로 놀라운 보존 상태를 자랑한다. 또 다른 집 빌라 바가티 발세키Villa Bagatti Valsecchi는 밀라노 귀족인 바가티 발세키 가문이 도시의 열기를 피해 휴가를 즐기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19세기 롬바르디아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현재 라 베르시에라 1718 재단(La Versiera 1718 Foundation)이 보존과 관리를 맡고 있다. 각각 모더니즘과 롬바르디아 바로크 양식이 특징인 두 빌라는 알코바 프로젝트와 놀라운 병치를 이루었다. 전시에 참여한 디자이너는 70여 팀. 영롱한 식기 디자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콜롬비아 디자이너 나탈리아 크리아도Natalia Criado, 빌라 바가티 발세키의 정원에 골프 코스를 만들어 많은 사람을 끌어모은 스튜디오 페페Studio Pepe, 정원 한편에 무심하게 놓은 의자로 의외의 포토존을 연출한 준야 이시가미 등 면면이 화려하지만, 알코바의 추종자들에게 전시나 스타일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알코바의 다음 장소를 벌써 궁금해하고 있다.

A-N-D의 조명 ‘더 베일 앤드 칼럼 시리즈The Vale and Column Series’.
디자인 케인 하인츠만Caine Heintzman, 루카스 피트Lukas Peet

사진 Piergiorgio Sorgetti


4. 유미주의자들을 위한 시간 여행, 닐루파르 데포트

안드레스 레이싱헤르의 〈12개의 명상 의자〉전. 사진 Alejandro Ramirez Orozco

“유물 같은 디자인의 고요함 속에 땅과 문화, 시대로 떠나는 여정을 위한 교향곡이 담겨 있다.” 로산나 올란디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밀라노 갤러리스트의 대모 니나 야샤르의 말이다. 그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 시작 전부터 〈시간 여행자〉라는 전시 타이틀을 공개하며 관람객의 기대를 고조시켰다. 기획 의도는 명확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디자인 거장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동시대 창작자의 작업에 주목하고자 한 것,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는 작품으로 방문객을 시간 여행자로만들어주는 것. 닐루파르 데포트의 아트리움에서 〈12개의 명상 의자〉전을 연 안드레스 레이싱헤르Andrés Reisinger는 니나 야샤르의 의도를 관통했다. 12개의 사과가 하늘에 동동 떠 있는 장면을 담은 6×6m 크기의 작품 주변에 12개의 의자만 덩그러니 놓아 초현실적 분위기를 자아낸 것. 멀리서 보면 꽤 사실적으로 느껴지는 12개의 사과는 컴퓨터로 픽셀을 생성하여 제작한 모자이크 유리 조각 타일로, 성경 속 인간의 첫 번째 조상이 에덴동산에서 따 먹은 금단의 열매를 상징했다. 안드레스 레이싱헤르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가장 근본적 행위는 명상이며 세계의 균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에 가장 완벽한 숫자는 12”라고 했다. 매력적인 스토리텔링과 시노그래피 덕분일까? 관람객들은 전시장을 거니는 틈틈이 아트리움으로 시선을 돌리며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인간의 눈을 자연에 빗댄 알레그라 힉스Allegra Hicks의 메타모포시스 컬렉션, 대리석을 다루는 여러 기법을 역동적으로 실험한 아날로지아 프로젝트Analogia Project 또한 눈여겨볼 만했다. 올해 닐루파르 데포트가 소개한 컬렉션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물질에 대한 실험 그리고 창의성의 진화다. 어쩌면 니나 야샤르에게는 디자인 자체가 시간 여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5. Since 1988, 살로네 사텔리테

트리엔날레 밀라노에서 열린 마르바 그리핀 윌셔 헌정 전시 〈우니베르소 사텔리테〉.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창의성의 전초기지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단연 살로네 사텔리테다. 이곳은 각종 기업이 유망한 인재를 스카우트하기 위한 최고의 장소다. 35세 미만 디자이너가 참여하는 이 이벤트는 세계 시장을 겨냥하는 신예들의 등용문으로 자리매김했다. 매해 발군의 실력을 드러낸 디자이너의 작품 3점을 엄선해 상도 수여한다. 젊은 디자이너들의 실험 정신과 독창성을 믿어준 살로네 사텔리테 덕분에 그간 참여한 1만 4000여 명의 디자이너 중 다수가 디자인 현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올해의 주제는 ‘1988년부터 이어져온 디자인(Connecting Design since 1988)’. 수상 프로젝트로는 스튜디오 오롤루Ololoo의 조명 ‘Deformation Under Pressure’, 필리포 안드리게토Filippo Andrigetto의 책장 ‘Veliero’, 이그라운디자인Egroundesign의 황동 컵 세트 ‘Voronoi’가 꼽혔다. 또한 올해는 25주년을 맞아 특별한 순서도 마련했다. 살로네 사텔리테가 배출한 선배 디자이너와의 멘토링 프로그램이 그중 하나. (언어와 국적에 따라 대화가 가능한) 디자이너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후문이다. 트리엔날레 밀라노에서는 살로네 사텔리테 창립자이자 큐레이터인 마르바 그리핀 윌셔Marva Griffin Wilshire의 행보를 되돌아보는 〈우니베르소 사텔리테Universo Satellite〉전도 열렸다. 한 전시를 25년간 이어온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있으나 한 큐레이터가 25년을 맡은 것은 분명 주목할 일이다.

큐레이터 마르바 그리핀 윌셔, 베페 피네시Beppe Finessi

전시 디자인 리카르도 벨로 디아스Ricardo Bello Dias, 하리아드나 피나테Hariadna Pinate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오벨로Studio òbelo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52호(2024.06)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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