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 We Are!: Women in Design 1900–Today〉전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이 지난 120년을 빛낸 디자인 신의 여성 80명을 무대 위로 올렸다.

〈Here We Are!: Women in Design 1900–Today〉전
전시 전경. 사진 Christoph Sagel

우리는 더 알고 싶다. 기록 속에 묻혀 있거나 의도적으로 생략됐지만 여전히 영감을 줄 수 있는 이름.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이 지난 120년을 빛낸 디자인 신의 여성 80명을 무대 위로 올렸다.

전시의 키 비주얼.

기록의 중요성은 분명하고 흥미롭다. 당장 빛을 발하지 못하는 이름 석 자, 이미지 한 장이 후대에 어떻게 재조명될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에서 3월 6일까지 열리는 〈Here We Are!: Women in Design 1900–Today〉전은 1900년부터 현재까지 가구, 패션, 산업, 인테리어 등 현대 디자인 발전에 기여한 여성 80명을 시대별로 나누어 이들의 작업과 작업 환경을 추적한다.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 아이노 알토Aino Aalto, 레이 임스Ray Eames처럼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들이 전시의 중심을 단단하게 잡고 있는 동시에 낯선,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목해볼 만한 이름들이 그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 전시에서 소개하는 작업은 대부분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컬렉션에서 길어 올린 것이다.

현재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인 마탈리 크라세. 사진 Julien Carreyn & Valentine Jouanjus

전시 중 처음으로 관객을 맞이하는 갤러리에서는 디자이너가 직업으로 인지되기 시작한 1900년 무렵부터 1930년까지를 조명한다.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여성이 디자이너로 일하거나 건축을 공부하는 일은 드물었다. 드로잉 튜터로 일하는 것조차 특정 계급에 속해야만 가능했고, 설사 디자인할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여성의 이름이 크레디트에 오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변화는 산업화와 함께 여성 참정권 운동에 기반해 이뤄졌다. 미국의 사회 운동가 제인 애덤스 Jane Addams, 디자이너 루이스 브리검 Louise Brigham 등이 디자인하거나 제안하는 것들이 사회 디자인(social design)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고 바우하우스, 로헬랜드 학교(Loheland School)에서 수학한 여성들의 흔적도 발견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아방가르드 물결은 여성들에게 좀 더 다양한 기회를 주긴 했으나 디자인을 평가받을 때는 여전히 성 정체성과 그 방법론에서 자유롭지 못한 시절이었다.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은 1920년부터 1950년까지를 모더니즘 선구자들의 시대로 정의하는데, 전과 비교해 여성들이 디자인이나 건축을 공부하고 그 전문성을 인정받는 사례가 많아졌다. 여성들은 주로 자신의 파트너가 속한 남성 위주의 네트워킹을 활용하거나 예술가 협회와 협업하는 방식을 통해 대중에게 작업을 선보일 기회를 얻기 시작했다. 샤를로트 페리앙, 아이노 알토, 레이 임스, 아일린 그레이Eileen Gray, 클라라 포셋Clara Porset이 대표적인 예다. 소수이긴 하지만 에바 자이젤Eva Zeisel, 트루디 페트리Trude Petri처럼 독립 스튜디오를 운영한 이들도 이때 등장한다.

다음 갤러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격동기, 포스트모던 시대인 1950년부터 1990년으로 이동한다. 이 시기에는 현대 페미니즘 운동에 영향을 끼친 사건이 디자인과 건축 분야에 걸쳐 여럿 일어났다. 취리히에서는 1928년에 처음 개최된 스위스 여성 작업 전시회(Swiss Exhibition for Women’s Work, SAFFA)가 30년 만에 다시 열렸다. 수십 명의 건축가, 디자이너가 이 전시회를 스위스의 여성 크리에이티브의 쇼케이스로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SAFFA의 레지덴셜 타워 프로젝트에 참여한 건축가 베트라 람Berta Rahm은 이후 다양한 공모전에서 수상했지만 안타깝게도 한 번도 공공 건축 설계를 의뢰받지는 못했다. 가부장적인 건축 관례에 실망한 그녀는 건축 스튜디오를 접고 페미니스트 문학 전문 출판사를 차리기에 이른다. 또 핀란드의 마리메꼬는 1968년 첫 유니섹스 컬렉션을 선보였고, 1976년에는 독일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출판물 〈커리지Courage〉가 창간됐다.

마지막 갤러리에서는 마탈리 크라세Matali Crasset, 파트리시아 우르퀴올라Patricia Urquiola, 잉가 셈페Inga Sempé, 일세 크로포드Ilse Crawford, 헬라 융게리우스 Hella Jongerius 등 1990년 이후 자신의 이름 하나로 현대 디자인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이제 여성 디자이너들이 독립적으로 스튜디오나 조직을 꾸리고 다양한 성공을 거두는 일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되었다. 하지만 이 전시에서 조명한 여성만으로 충분한가? 뛰어난 디자인이라고 결정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나의 디자인이 세상에 나올 때 ‘저자권authorship’은 누구에게 어떤 형태로 주어져야 하는가? 전시는 관객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글 신정원 통신원 담당 박슬기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Judith Brugger
오브젝트 디자인 Faye Toogood, Roly Poly
사진 Andreas Sütterlin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