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그리테크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로 사는 법, 엔씽 정희연
대중에게 낯선 스마트 팜을 친근하게 알리고자 지난해에는 식물성 도산을 오픈했는데, 독특한 콘셉트로 팬데믹 와중에도 압구정 일대의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했다.
CES 2관왕, 아랍에미리트 기업으로부터 300만 달러 규모의 사업 수주, 120억 원 규모의 시리즈 B 투자 유치, iF 디자인 어워드 수상···. 애그리테크 스타트업 엔씽이 최근 몇 년간 보여준 성과는 동종 업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화려하기 그지없다. 이처럼 눈부신 결과 뒤에는 항상 디자인이 자리하고 있다. 사용자 관점을 깊이 고려해 완성한 디자인은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쉽고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데 기여했다. 대중에게 낯선 스마트 팜을 친근하게 알리고자 지난해에는 식물성 도산을 오픈했는데, 독특한 콘셉트로 팬데믹 와중에도 압구정 일대의 핫 플레이스로 급부상했다. 스마트 팜의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절부터 업계를 일구어온 정희연 디자인총괄이사(이하 CDO)는 늘 소비자와 사용자 입장에서 생각하며 엔씽을 디자인 중심으로 사고하는 기업으로 만들고 있다.
2013년 엔씽에 합류를 결정했다. 당시 김혜연 대표는 창업을 준비 중이던 대학생이었다.
나 역시 같은 학교 산업디자인학과에 재학 중이었다. 디자인 공모전에 식물이나 IoT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내곤 했는데, 좋은 반응을 얻어 수상한 적이 있었다. 당시 김혜연 대표로부터 합류 제안을 받았는데 내 디자인이 그가 생각하던 비즈니스 모델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일반적인 디자인 전공 학생들이 관심 가질 만한 가구나 가전 등 보편적인 제품 디자인에는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생소한 분야에 뛰어들어 제품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드는 경험을 하고 싶었다. 이런 내 성향과 잘 맞을 것 같아 합류하게 됐다.
창업 초창기에는 주로 어떤 역할을 했나?
기본적으로 회사에서 출시하는 모든 제품의 외형을 다듬는 역할을 맡았다. 콘셉트와 상품 기획도 병행했다. 내가 합류하기 전에는 개발자 중심의 조직이었던 터라 개발 과정이 선행되고 이를 제품에 반영하는 식으로 프로세스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제품에 너무 많은 기능이 들어가게 되어 소비자가 자칫 피로를 느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합류 후에는 사용자 관점에서 필요한 기능과 디자인을 고려한 뒤 그에 맞춰 개발하는 형태로 프로세스를 바꿨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만든 첫 제품이 스마트 화분 ‘플랜티’였나?
그렇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주관하는 글로벌 K-스타트업 대회에서 프로토타입으로 최우수상을 받고, 상용화 과정을 거쳐 2016년 출시했다. 프로토타입은 개발자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해 사각형 화분 안에 LED 조명, 물통 등 다양한 부품과 기능을 탑재했다. 그런데 상용화를 위해 고민하면서 사용성과 편의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디자인을 굉장히 많이 수정했다. 거의 새로 만드는 수준이었다. IoT와 사물 인터넷 기술을 활용한다는 점을 알리는 것도 물론 중요했지만, 궁극적으로 화분이기에 소비자가 직관적으로 제품을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후 이 제품은 킥스타터에서 10만 달러가 넘는 금액이 모여 성공적으로 펀딩을 마쳤다.
플랜티와 수경 재배 키트를 출시한 뒤에는 스마트 팜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스마트 팜은 엔씽의 사업 계획 중 하나였지만 당시에는 현실적인 여건 탓에 실현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가장 작은 단위의 스마트 팜인 스마트 화분부터 출시해 노하우를 축적하자는 전략을 수립했다. 실제로 플랜티, 화분과 연동하는 앱을 함께 출시하면서 국내외 접속자 수가 굉장히 많아졌는데 이 과정에서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스마트 팜 OS 개발과 운영까지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완성한 ‘플랜티큐브’는 컨테이너를 이용한 모듈형 스마트 팜이다. 다른 기업의 스마트 팜과 구별되게 컨테이너와 재배 시설을 하나의 패키지로 구성했는데, 덕분에 해외 수출도 용이했고 수평이나 수직으로 쌓을 수 있어 확장성도 얻을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스마트 팜 내부에 물이 고이는 트레이나 LED 조명, 환기용 팬의 위치 등을 세세하게 조정하면서 물과 전기 사용은 최소한으로 하면서도 생산량은 최대한 늘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스마트 팜이 워낙 기술 집약적인 아이템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디자이너의 비중은 작을 것 같다.
스마트 팜은 디자인이 많이 들어갈수록 경제성은 떨어지는 구조다. 그러니 제품을 생산하고 개발하는 입장에서는 디자인 비중을 줄이고 다른 영역과 협업을 강화하는 것이 맞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자이너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 나온 것이 바로 ‘식물성 도산’이다. 스마트 팜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인공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작물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애그리테크 기업의 CDO로서 소비자들의 편견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스마트 팜에서 자란 채소를 사람들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브랜드 쇼룸이 필요했다.
식물성 도산은 ‘지구와 화성 사이의 신선한 별’이라는 콘셉트를 앞세웠다.
식물성 도산 이전의 엔씽은 B2B보다 B2C, 즉 엔지니어와 바이어에게 집중했다. 하지만 일반인이 스마트 팜의 작동 원리나 내부 공간, 기술 원리 등을 알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브랜드를 경험하게 만들려면 눈에 확 띌 정도로 독창적인 콘셉트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인테리어 디자인 스튜디오 ‘언씬버드’와 함께 미래지향적 분위기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이를 공간으로 구현했다. 오픈 뒤에는 많은 방문객들이 이곳이 엔씽이 기획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일종의 브랜드 입문자 코스가 되지 않았나 싶다.
식물성 도산에서 패션 스튜디오 ‘더 스튜디오 케이’와 화보 촬영도 진행했다.
사실 공간을 열고 난 뒤 다양한 협업 제안이 들어왔는데 대부분 거절했다. 식물성 도산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보다 자신의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반면 더 스튜디오 케이는 그들이 디자인한 옷이 이곳의 콘셉트와 잘 어울릴 것이라는 판단에서 제안했다. 우리도 기존의 농업 관련 기업, 다른 애그리테크 스타트업이 절대로 하지 않을 프로젝트를 벌이고 싶기에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졌다. 식물성 도산이 있었기에 엔씽만의 시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음악, 미술 등 흔히 농업과 동떨어졌다고 생각하는 분야와 협업하고 싶다.
최근 이천의 주차장 내 유휴 공간에 오픈한 ‘큐브 이천’에서는 자사의 기존 스마트 팜과 다른 공간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해외로 수출할 때는 이동과 시공이 용이한 컨테이너형 공간이 유리하지만, 국내에서는 재배 공간을 외부로부터 차단만 할 수 있다면 굳이 기존 방식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컨테이너 형태의 재배 공간과 건물을 혼합한 새로운 공간을 개발했다. 스마트 팜에서 수확한 작물을 뒤편의 물류 창고로 이동해 서울·경기 지역으로 빠르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 큐브 이천의 특징이다. 육묘부터 출하까지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유휴 공간 활용과 물류 비용의 획기적인 절감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 회사가 많은 변화를 겪은 만큼 CDO의 역할도 달라졌을 것 같다.
초창기에는 제품 하나를 완성도 있게 잘 만들어내는 것이 CDO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엔씽의 조직과 사업 규모가 커진 만큼 CDO도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일을 키우는 사람, 디자이너들에게 인사이트를 불어넣는 사람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식물성 도산이 기존 업계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을 시도겠지만 결과적으로 엔씽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것처럼, 애그리테크업계의 영역을 확장하고 그 안에서 엔씽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려면 새로운 일을 꾸준히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애그리테크업계로 진입하고자 하는 디자이너에게는 어떤 역량이 필요할까?
거침없이 틀을 깰 수 있는 사람이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애그리테크업계는 전공에 상관없이 새로운 발상을 할 수 있는 디자이너가 필요한 영역이다. 다른 분야에 비해 농업은 참신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여지가 아직 많다. 엔씽도 업계를 혁신하기 위해 지난 몇 년간 노력했지만 아직도 많은 기회가 남아 있고, 원한다면 이전에 없던 트렌드를 새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선례에 갇히지 않고 독창적인 비전과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