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가 영근 토마토 밭 그래도팜 원승현

그래도팜은 1983년 출발한 농장으로 방울토마토, 에어룸 토마토, 비트, 참취나물, 삼나물 등을 재배한다.

브랜드가 영근 토마토 밭 그래도팜 원승현
홍익대학교 프로덕트디자인과를 졸업한 후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유기농장 그래도팜을 운영하는 ‘브랜드 파머’. 1983년부터 유기농을 하신 부모님의 뒤를 잇고 있다. ‘밭에서 브랜드를 짓는다’는 생각으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브랜딩을 한다. 2016년 나우올제 ‘맛있는 토크’에서 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을 수상했고, 2017년에는 강원도 청년 혁신가로 선정됐다. tomarrow.com

벚나무에 푸른 새싹이 찾아온 4월 중순, 강원도 주천면 그래도팜 농장에 갔다. 시칠리안 토게타, 바나나레그, 쿠오레 디 부에 등 낯선 이름표가 줄지어 있었고, 조막만 한 열매가 가지 끝에서 한창 부풀고 있었다. 마트 매대에서 보던 익숙한 공 모양 말고도 피망같이 길쭉한, 보자기로 싸맨 듯 꽃 모양으로 주름진 형태였다. 이 토마토는 붉기만 한 것이 아니고 노랗고 푸르고 검다고 했다. 그동안 이 다채로운 토마토의 세계가 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나. 이것이 비단 토마토만의 문제인가. 그래서 원승현 그래도팜 대표는 농업에 디자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땅을 착취하지 않고 공생하려는 태도를 만들고, 농작물의 숨은 이름과 가치를 발굴해 전달하고, 데면데면하기만 한 농부와 소비자 사이를 개선하기 위해 디자인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가 더욱더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도팜은 1983년 출발한 농장으로 방울토마토, 에어룸 토마토, 비트, 참취나물, 삼나물 등을 재배한다. 아버지 원건희가 일구던 땅에 아들 원승현이 손을 보태 오늘의 새로움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홍익대학교에서 프로덕트 디자인을 공부하고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한 이력도 있다.

자동차, 가구, 제품 등을 디자인하는 데에 한창 매료되어 전공을 선택했고, 졸업 무렵 브랜드 아이덴티티 작업에 흥미가 생겨 진로를 정했다. 첫 직장은 퍼셉션이었다. 할리스, 킴벌리 클락, CJ 등 국내외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브랜딩과 디자인 컨설팅을 하는 곳이라 넓은 범위에서 브랜딩의 힘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 힘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많은 기업이 소통의 문제를 겪고 있었다. 당사자는 잘 아는 기업의 당찬 포부, 좋은 가치를 타인에게 전하기는 어려워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브랜딩이 말문을 열게 하고 팬을 만들고 메시지를 확산하는 에너지를 만들었다. 그 모습을 직접 보고 과정을 경험하니 우리 농장에도, 나아가 우리 농업에도 필요한 것이 브랜딩이라는 걸 알겠더라. 이왕이면 농장 한가운데에 들어와 제대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귀향을 결정했고, 먼저 밭일을 시작했다. 열매를 보기보다는 땅을 먼저 보려 했던 것 같다.

브랜드 디자이너에서 농부로 전직하는 게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전직이 아니라 업이 하나 더 생긴 것이라 생각한다. 농산물 브랜드 디자이너이자 유기농 토마토 생산자로. 가까이 관찰해보니 부모님의 밭은 특별했다. 친환경 농사가 어렵다고 할지언정 ‘그래도’ 고집스럽게 땅을 우선으로 존중하고, 남들이 미련하다고 할지언정 ‘그래도’ 30년을 한결같이 밭에 나가셨다. 다른 농가와의 차별화 지점이 분명했다. 나를 기준으로 놓고 봐도 그랬다. 이렇게 오래 유기농 농사를 지어온 부모와 이런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식의 조합이 국내에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보니 사명감이 생겼다.

농업 자체의 매력이나 가능성도 보았던 것일까?

물론이다. ‘로컬 푸드’에서 말하는 로컬의 범위를 어느 정도로 생각하는가? 호주로 출장 갔을 때 현지인에게 물었더니 ‘편도 4시간 주행거리’라고 답하더라. 우리나라로 따지면 서울과 부산 거리다. 그만큼 우리 땅의 면적이 좁다. 게다가 농장 재배 시설 및 기술의 발달, 물류 산업의 발달이 가속화되고 있으니 땅의 지역성만으로 브랜딩하는 건 한계가 분명했다. 더군다나 지역 고유 품종이라고 하는 토종을 채종하고 재배하면 모를까, 요즘은 거의 씨앗뿐만 아니라 모종까지 다른 지역에서 우량종을 사서 심는다. 그렇기에 각 농장의 고유성이 더욱더 중요해지고 내가 디자이너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보았다.

그래도팜 브랜드의 기준은 매뉴얼 그래픽스와 함께 만들었다.
2015년 귀농 후 브랜딩 차원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궁금하다.

그간 농장을 일궈온 세월에 대해 부모님과 장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또 어떤 이유로 지금의 경작 방식을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지, 또 어떤 이유로 편리와 효율과 타협하지 않았는지 나부터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대화를 통해 ‘그래도팜’이라는 이름을 만들었고 전체 뼈대를 세울 수 있었다.

현장에서 시간을 보내며 발견한 문제점은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유도했나?

먼저 생산 단계에서는 농부란 직업 자체를 되돌아봤다. 통상적으로 농부라 함은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삭막한 사무 공간에 이렇다 할 휴게 공간도 갖추지 못한, 그러니까 문화적 자극이 부재한 이미지다. 그래서 사용자(농부) 관점으로 밭을 비롯해 사무실, 농장 일대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밭의 통로를 넓히고 설비 위치를 새롭게 정비하고 깨끗한 사무 공간에 작은 서가도 갖췄다. 청소년이나 청년이 그래도팜 농장을 보고 ‘농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랐다. 어떤 직업이든 그 분야 전문가가 지내는 공간이 그 직업에 대한 이미지나 인식을 포함해 매우 많은 것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유통 단계에서는 소비자 관점을 조금 더 세심하게 들여다본 결과 패키지 구성을 달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토마토는 크기별로 선별해 유통하는 것이 관례인데 소비자 인식 조사를 해보니 그것이 구매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래도팜의 강점인 다종다양한 토마토를 다채롭게 담은 상품 패키지를 개발했다.

한쪽 면에는 토마토 단면을, 반대 면에는 입면 스케치를 그려 넣은 피자 박스 디자인.
디자인 업무를 여러 기업과 협업하고 있다.

나의 의도와 주요 포인트를 더욱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디자인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사업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디자인 기업에 의뢰해 결과물을 쌓고 있다. 먼저 전반적인 톤앤매너와 그래도팜이란 브랜드의 기준을 만드는 과정은 매뉴얼 그래픽스와 함께했다. 서정적이고 고결한 인상의 문체부 바탕체를 그래도팜의 서체로 정했고, 아이보리 계열의 배경 색과 담백한 모노톤으로 농장의 가치관을 전하기로 했다. 대신 그래도팜의 소비자 경험 서비스 브랜드인 토마로우Tomarrow는 발랄한 에너지를 담고 있다. 져스트 프로젝트Just Project, AURG와 협업한 작업으로, 주 고객층인 자녀를 둔 40대 여성을 타깃으로 엄마와 아이 모두에게 흥미로울 수 있는 방식의 패턴과 디자인 요소를 찾았다. 체험장과 사무 공간의 디자인 및 시공은 베리띵즈, 루이스웍스561과 진행했다. 성숙도에 따른 다양한 토마토 색을 모티브로 공간마다 포인트 색을 달리해 분위기에 변화를 줬다. 체험장 뒤편의 전시 공간 ‘쏘일 갤러리’ 작업은 레어바이크와 함께한 결과다. 농장 전체로 보면 작은 비중이지만 어느 곳보다 진득하게 우리의 진심과 노력을
전달하는 코어라고 생각한다.

‘땅의기록’이란 농산물 브랜드도 론칭했다.

이 디자인 역시 디자인 스튜디오 AURG와 진행했다. 패키지를 구상할 때 ‘토마토 주스라면 빨간색이어야 해’, ‘과즙이 흐르는 토마토 사진을 넣어야 해’ 같은 통상적 문법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야 타 업체의 제품과 같은 매대에 있어도 차별될 것 같았다. 고급스러운 무드를 전하기 위해 블랙과 골드를 메인 컬러로 삼고, 컬러풀한 일러스트를 중앙에 배치해 시선을 모으도록 했다.

〈토마토 밭에서 꿈을 짓다〉란 책을 쓰고, 기획 전시를 하거나 타 브랜드와 협업도 한다. 이러한 활동이 중요한 이유는?

글을 쓰고 우리만의 의미를 담은 오브제를 만드는 건 말과 행동이 같은 브랜드가 되기 위한 노력의 표현이다. 이 과정이 쌓여야 슈퍼 팬을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한다. 져스트 프로젝트와 협업해 농장 비료 포대를 재활용한 젠가를 만들고, 소호수 아틀리에Sohosu Atelier와 협업해 그래도팜의 철학이기도 한 ‘땅과 사람과 열매의 균형’이란 의미를 담은 스탠드 모빌을 선보이기도 했다.

농산물의 소비 단계에서 꿈꾸는 변화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모르지만 사실 토마토에서 제일 중요한 게 바로 향이다. 우리나라와 네덜란드만 유일하게 무향 토마토를 소비하고, 다른 대다수의 국가는 향에 기반해 토마토 맛을 음미한다. 전통적인 토양의 특수성에 따른 결과이겠지만 한편으로는 대중의 인식이나 공감대가 부족한 탓이기도 하다. 나는 이 소비 단계에 변화를 주고 싶다. 품종마다 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리고 토마토란 농산물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히고 싶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미각 체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관련 교재와 키트를 준비하고 있다.

종합 체험 공간으로서의 농장을 선보일 계획이라고.

좋은 브랜드란 그저 즐거운 경험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시간이자 기억으로 각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올여름 개관을 목표로 여러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나만의 토마토 취향을 찾을 수 있는 미각 체험인 ‘Taste of Colors’, 토양의 중요성에 대한 배움터 ‘Circle of Life’, 에어룸 토마토 피자를 만들어보는 ‘Touch of Tomarrow’를 선보일 예정이니 기대해달라. 그리고 앞으로 그래도팜 교육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올 청년 농업인과 힘을 모아 토마토 기반의 F&B 사업까지 나설 계획이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27호(2022.05)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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