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셔리를 재조명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판터 앤 투롱

에르메스부터 발렌시아가까지, 판터 앤 투롱의 디자인 언어

스위스 기반의 디자인 스튜디오 '판터 앤 투롱'은 에르메스, 발렌시아가 등 유수의 브랜드와 협업하며 소재 탐구와 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현대적 럭셔리의 본질을 새롭게 재정의한다. 이들은 뛰어난 완성도와 서사를 결합해 일상적 사물에 낯선 가치를 부여한다.

럭셔리를 재조명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판터 앤 투롱

에르메스, 발렌시아가, 위블로, 비트라, 카펠리니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 스위스 로잔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디자인 스튜디오 ‘판터 앤 투롱(Panter&Tourron)‘과 협업을 진행했던 브랜드라는 것이다. 스테파노 판테로토(Stefano Panterotto)와 알렉시스 투롱(Alexis Tourron)이 설립한 이 스튜디오는 소재 탐구와 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디자인, 기술, 사회가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제품과 시각적 경험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들이 선보이는 오브제는 강렬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은은한 존재감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조용한 힘은 우리가 생각해온 럭셔리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이탈리아&프랑스 디자인 유산, 스위스에서 결합하다

두 사람은 스위스 로잔 예술대학교(École cantonale d’art de Lausanne, ECAL)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던 시절 처음으로 만났다. 이탈리아 출신의 판테로토와 프랑스 출신의 투롱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디자인이라는 분야에서 각자의 개성을 함께 발전시켜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2016년, 두 사람의 이름을 딴 디자인 스튜디오 ‘판터 앤 투롱’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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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알렉시스 투롱(Alexis Tourron)과 (오른쪽)스테파노 판테로토(Stefano Panterotto) 출처 판터 앤 투롱 인스타그램

풍부한 디자인 유산을 지닌 두 나라 출신들이 중립국이자 시계와 디자인 분야에서 강국으로 꼽히는 스위스에서 만나 세계적인 디자인 회사로 발돋움했다는 서사는 이들의 작업을 더욱 흥미롭게 느끼게 한다. 이들은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스위스의 산업 디자인 문화와 접근 방식이 자신들의 디자인적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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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판터 앤 투롱 인스타그램

초창기에 이들은 유명 인사나 부유한 구매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부동산 업계를 중심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스위스를 기반으로 활동한 만큼 시계 브랜드와의 협업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들이 경험한 럭셔리 산업은 스위스 은행이 고객의 금융 정보를 엄격하게 보호하는 것처럼 외부에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적인 세계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경험은 이들에게 럭셔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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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판터 앤 투롱 인스타그램

초기에 이들은 희소성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럭셔리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년간의 경험을 기반으로 이들은 그 기준을 다시 바라보고,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재정의하기에 이른다. 소재와 성능, 품질에 대한 본질적인 가치를 탐구하는 동시에 제품이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생산되는지에 주목했다. 이러한 태도와 꾸준한 탐구를 통해 판터 앤 투롱만의 독창적인 디자인 언어가 만들어졌고, 그들의 작업은 점차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럭셔리 브랜드와의 대표 협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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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판터 앤 투롱 인스타그램

스튜디오는 에르메스 쇼윈도 디스플레이 디자인을 여러 차례 작업하며 자신들만의 감성을 선보여왔다.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매장 안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증을 자아내도록 꾸미는 쇼윈도 작업은 그들의 커리어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들은 이전에 테크 업계 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자주 실패하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에르메스와의 작업을 통해 럭셔리 업계에서는 작은 부분 하나까지 꼼꼼하게 검토하고, 이중 삼중으로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협업하는 장인의 자질은 물론이고 재료를 조달하는 과정과 조립 과정에서 드러나는 세부적인 디테일 등 모든 것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현장에서 두 사람은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바로 스토리텔링이 제품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훌륭한 제품을 만들 수 있지만, 높은 가치를 지닌 럭셔리 제품이 되기 위해서는 완벽한 완성도 그 이상이 필요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후 판터 앤 투롱의 작업에는 높은 완성도와 이에 어울리는 서사가 함께 자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디자인 철학을 잘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는 세계적인 스위스 가구 브랜드 비트라와 함께 선보인 ‘애너그램 소파(Anagram Sofa)’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크기의 플랫폼과 두 가지 크기의 패널, 세 가지 크기의 백 쿠션, 두 가지 형태의 테이블 등 다양한 모듈로 구성된 이 가구는 사용자의 상황과 공간에 따라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애너그램’이 철자를 바꾸어 배열해도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 단어를 뜻하듯, 이 가구 컬렉션 또한 개별 구성 요소를 계속해서 재배열하며 새로운 형태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우아한 휴식을 제공한다는 아이디어는 가구의 기능과 디자인을 하나의 서사로 묶는다. 단순히 여러 요소를 조합할 수 있는 모듈형 가구를 넘어서 가구를 이용하는 이의 삶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는 하나의 시스템을 제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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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판터 앤 투롱 인스타그램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디자인 브랜드 카펠리니가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선보인 프로젝트 ‘카펠리니 인터내셔널 인테리어(Cappellini International Interiors)’에서도 브랜드의 정체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판터 앤 투롱의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아트 디렉터 줄리오 카펠리니(Giulio Cappellini)와 그래픽 디자인 회사 스튜디오 템프(Studio Temp)와의 협업을 통해 완성한 이 프로젝트에서는 일상생활을 형성하는 조용한 이야기들에 주목했다. 친밀한 순간들과 자연스러운 상호작용, 그리고 조용히 남겨진 흔적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카펠리니의 감성을 오롯이 느끼게 했다.

현대 생활을 탐구하는 일련의 감각적인 환경들은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 안에서 사물들은 그저 기능을 수행하는 물건이 아니라 삶의 리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로 제시되었다. 하나의 무대 장치처럼 구성된 공간의 공중에는 스크린이 설치되었고, 그 위로 현대적인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문구들이 흘러나오며 공간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이처럼 서사적 긴장감이 두드러지는 공간 디자인은 카펠리니의 디자인 컬렉션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새롭게 구축된 시각적 아이덴티티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다. 카펠리니가 그동안 시도해온 혁신적인 시각적 실험들을 하나의 일관된 시스템으로 통합하여 앞으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점은 과거의 유산을 현재의 언어로 다시 해석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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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판터 앤 투롱 인스타그램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마르티나 티펜탈러(Martina Tiefenthaler)가 CCO로 활동했던 2022년 발렌시아가를 위해 여러 홈 오브제를 디자인했던 작업 역시 이들의 대표적인 협업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발렌시아가는 전형적인 패션 미학과는 거리를 두고 아이러니하면서도 실용적인 요소들을 혼합하여 자신들만의 독특한 럭셔리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러한 발렌시아가의 방향성은 판터 앤 투롱의 가치관과 어느 정도 일치했고, 그 결과 새로운 형태의 럭셔리 제품이 탄생했다.

도시락 세트, 식기류, 여행용 사이즈로 나온 향초 등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다양한 제품에 발렌시아가 로고가 새겨져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소박하고 실용적인 물건들이지만 브랜드의 정체성과 디자인적인 완성도가 더해지면서 새로운 의미가 더해지게 되었다. 익숙한 사물에 낯선 가치를 부여하는 방식은 판터 앤 투롱이 생각하는 현대적인 럭셔리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일상에서 만나는 판터 앤 투롱의 미학

이들은 명품 브랜드와의 협업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리가 친근하게 느끼는 이케아와 협업을 통해 간편하게 접히는 소파를 선보이기도 했으며, 스마트 기기와 잠시 거리를 둘 수 있도록 돕는 독특한 감성의 기기를 제안하기도 했다. 여러 디자인 위크와 박람회에서도 이들의 감각은 눈부시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높은 완성도는 물론이고 누구나 쉽게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를 작품에 담아낸 덕분에, 이들의 작품은 공개될 때마다 큰 관심을 받았다.

이케아의 리서치 랩 스페이스10(Space10)과 협업을 통해서 선보인 ‘봉투 속 소파(Couch in an Envelope)’는 기존 소파의 형태와 유통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다. 이들은 소파를 간편하게 운반하고 조립할 수 있으면서도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제품을 제조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여기에 인공지능을 활용하며 새로운 시대의 도구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또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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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판터 앤 투롱 인스타그램

주머니 크기의 AI 나침반 ‘테라(Terra)’는 이들이 단순히 가구나 조명만 디자인하는 스튜디오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디자인 스튜디오 모뎀 웍스(Modem Works)와의 협업으로 완성한 이 기기는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스마트폰과 거리를 두는 일상을 보내도록 돕는다. 스마트폰과 연결되지 않는 시간이 오히려 하나의 럭셔리로 여겨지는 현재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이들의 아이디어는 변화하는 생활 방식을 선제적으로 제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에 역설적으로 디지털 기기에서 벗어나는 시간을 하나의 가치 있는 경험으로 바라보고 이를 디자인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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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판터 앤 투롱 인스타그램

무엇보다 이들의 작업이 주목받는 이유는 꾸준하게 쌓아온 철학과 서사,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완성도에 있다. 여기에 동시대의 변화를 섬세하게 읽어내는 시선까지 더해져 화제성을 더했다. 럭셔리 브랜드와 협업하며 작은 부분 하나까지 꼼꼼하게 살피는 태도가 작업 전체에 확장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사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경험되는지에 주목하는 이들만의 디자인 언어는 일상적인 사물에서도 낯선 감각을 발견하게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디자인 언어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저 보기 좋은 제품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소재와 기술, 사용 방식,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까지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들은 럭셔리가 특별한 사람만이 소유하는 희소한 물건이 아니라, 더 나은 경험과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앞으로 판터 앤 투롱의 디자인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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