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잡지에서 시작해 디자인의 영토를 넓혀온 50년
월간 〈디자인〉 창간 50주년을 기념해 이영헤 발행인과 특별 인터뷰를 진행했다.

월간 〈디자인〉의 50년을 이야기할 때 이영혜라는 이름을 빼놓기 어렵다. 젊은 나이에 매체를 인수한 뒤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매체 곁에서 보냈다. 언론 통폐합 위기 때는 직접 복간의 문을 두드렸고, 잡지에서 시작한 디자인에 대한 믿음을 출판과 전시, 페어와 비즈니스의 영역으로 끊임없이 확장해 왔다. 그에게 디자인은 아름다움을 만드는 기술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과 시대를 읽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을 먼저 발견하는 방법에 가깝다. 창간 50주년, 월간 〈디자인〉의 지난 시간을 가장 오래 지켜본 이 작은 거인에게 귀 기울였다.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1 20261003073444 20261003 073444](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3450/20261003073444-20261003_073444-832x1247.jpg)
명을 운전하다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2 20261003073741 IMG 6293](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3747/20261003073741-IMG_6293-832x1095.jpg)
첫 질문부터 조금 버릇없게 시작해 보겠습니다. 월간 〈디자인〉 그리고 디자인하우스가 50년이나 살아남은 건 정말 잘해서였을까요, 아니면 그저 운이 좋았던 걸까요?
사실 ‘잘’이라는 부사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죠. 쉽지않은 상황에서 생존한 것만으로도 잘했다고 평한다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겠지만 그 영향력이 디자인계 바깥으로 충분히 뻗지 못한 것 같아서 선뜻 ‘그렇다’고 답하긴 어렵네요.
알겠습니다. 저부터 더 노력해야겠군요.(웃음) 앞서 ‘운’을 운운한 건 때로 운명이 우리를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대표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을 텐데요.
운명이라는 게 분명 있다고 믿지만 그 전에 의지가 있어야 하죠. 운명은 내가 명을 운전한다는 뜻이니. 문을 열어 젖히고 저쪽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또 한 가지는 호기심이에요. 대학생 때 나는 늘 다른 학교가 어떻게 디자인을 가르치는지 궁금했죠. 학창 시절 〈도무스〉를 접하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런데 잡지 내용이나 만듦새 때문이 아니었어요. 이탈리아에 대한 단순한 동경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고요. ‘어떻게 지구 반대편에서 만든 잡지를 한국의 대학생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게 만들 수 있었을까?’ 그 매체의 존재와 영향력에 대한 호기심을 느낀 거죠.
월간 〈디자인〉을 만난 것도 운명과 의지의 교차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잡지사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 무역 회사에 근무하셨죠.
동서양행이라는 회사에 근무할 당시 옆에 앉은 직장 동료가 ‘월간 〈디자인〉이라는 잡지가 나왔더라’고 알려줬어요. 이야기를 듣고 바로 교보문고로 향했지. 사실 당시 월간 〈디자인〉은 그리 주목받는 잡지는 아니었어요. 서점에 가보니 비닐 끈도 풀지 않은 창간호가 쌓여 있더군요. 그래도 판권에 나온 주소를 찾아가 발행인을 만났습니다. 면접을 보고 4호부터 책을 만들기 시작했죠.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3 20261003074308 D005 1977 05](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4315/20261003074308-D005_1977-05-832x1182.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4 20261003074307 D023 1979 02](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4314/20261003074307-D023-1979-02-832x1182.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5 20261003074308 20261003 074308](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4315/20261003074308-20261003_074308-832x1170.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6 20261003074310 D100 1986 10](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4319/20261003074310-D100-1986-10-832x1184.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7 20261003074311 D123 1988 09](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4319/20261003074311-D123-1988-09-832x1173.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8 20261003074316 D130 1989 04](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4324/20261003074316-D130-1989-04-832x1181.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9 20261003074307 D132 1989 06](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4313/20261003074307-D132-1989-06-832x1181.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10 20261003074311 D165 1992 03](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4319/20261003074311-D165-1992-03-832x1140.jpg)
그렇잖아도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과월호 판권을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대표님 직무가 계속 바뀌어 있더군요. 어느 호에는 디자이너, 어느 호에는 아트 디렉터, 어느 호에는 편집 직군으로요.
당시에는 업무 구분이 좀 애매했죠. 실제로 취재부터 디자인까지 여러 일을 도맡기도 했고요. 인쇄소까지 쫓아가 감리도 봤어요. 수육과 소주를 사 들고 가서 인쇄소 직원들을 달래가며 책을 만들었죠. 당시 발행인도 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결국 그런 애정으로 매체를 인수하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어린 여성이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았죠. 당시 미디어 시장은 특정 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주의가 강했어요. 심지어 어떤 디자이너는 “당신이 월간 〈디자인〉을 인수한 것은 한국 디자인 생태계의 불행”이라고 말하더군요. 또 회사 운영이 어려워 찾아간 교수님은 “그냥 시집이나 가시라”고 조언하더군요.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네요.
거기서 꺾이진 않았어요. 와신상담했죠. 결국 나를 서운하게 하는 게 나를 가르친다고 생각해. 지금도 누군가 내게 박한 평가를 내릴 때면 ‘나는 부족하다. 저 사람이 그렇게 볼 만했지. 그러니까 여기서 벗어나 더 성장해야 한다’고 되뇝니다. 이렇게 달래면서도 한편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었어요. 내가 보이는 것 이상으로 큰 그릇이라는 확신이죠. 원래 작은 사람이 나폴레옹 콤플렉스가 있어요.(웃음) 그런 시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죠.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11 20261003074916 D228 1997 06](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4924/20261003074916-D228-1997-06-832x1132.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12 20261003075027 D322 2005 04](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5034/20261003075027-D322-2005-04-832x1010.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13 20261003074932 D437 2014 11](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4939/20261003074932-D437-2014-11-832x1003.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14 20261003074838 D500 2020 02](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4840/20261003074838-D500-2020-02-832x1003.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15 20261003074803 20261003 074803](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4810/20261003074803-20261003_074803-832x1103.jpg)
위기를 딛고 성장하다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16 20261003075649 KakaoTalk Photo 2026 06 17 16 29 39 001](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65653/20261003075649-KakaoTalk_Photo_2026-06-17-16-29-39-001-832x832.jpeg)
1980년 언론 통폐합 상황에서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월간 〈디자인〉을 복간시킨 것은 여전히 회자되는 일화입니다.
그때 사업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부모님은 “우리가 그렇게 말려도 안 듣더니 이제 나라까지 나서서 네 사업을 말린다”고 하셨어요.(웃음) 이쯤에서 포기하란 이야기였는데 그때 제가 “정부가 시멘트나 벽돌로 만든 건물이냐”라며 맞받아친 기억도 납니다. 정부 안에도 사람이 있고, 진정성을 갖고 소통한다면 통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당시에 출간한 수십 권의 월간 〈디자인〉을 공병우 타자기 옆에 펼쳐놓고 이 기사가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이 내용이 우리 사회에 어떤 좋은 메시지를 남겼는지를 일일이 타이핑해 편지를 썼죠.
결국 그 정성이 통한 건가요?
사실 제가 취한 행동은 더 적극적이었어요. 실제로 대통령이 당시 그 편지를 읽었는지는 알 길이 없죠. 그때 저는 사회정화위원회, 계엄사령부, 문화관광부를 쫓아다니며 복간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세 조직이 너무 강한 한편 너무 힘이 없었어요. 서로 책임을 떠넘기더군요. 그때 이원홍 전 KBS 사장이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찾아갔어요. 제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수화기를 들고 당시 문광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더군. 그것이 결정적이었어요. 국풍81 같은 행사를 만들어서 한편으로 비판도 받은 인물이지만 제 인생에서 잊지 못할 분 중 한 명이죠.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17 20261003080101 20261003 080101](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0104/20261003080101-20261003_080101-832x832.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18 20261003080119 20261003 080119](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0121/20261003080119-20261003_080119-832x832.jpg)
그런 에피소드가 있는 줄 몰랐네요.
이원홍 사장은 복간에만 도움을 준 게 아니었어요. 1984년 세계 최초의 위성 생중계 아트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미디어 아트 개념을 국내에 소개한 백남준 작가나 2000년이 시작될 때 ‘즈믄둥이 탄생’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어령 선생이 모이는 자리에 저를 자주 데려갔어요. 시대를 읽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 느낌이었습니다. 나중에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긴 것도 이원홍 사장이었어요. 저에게 “백남준은 나라가 키워줘도 모자랄 인물이다. 정부에 제안해서 백남준 로드라도 하나 만들라”고 하셨죠. 결국 만들진 못했지만.
이어령 선생과의 인연도 참 깊습니다.
회사에서 이어령 선생이 저술한 〈한국인의 손 한국인의 마음〉을 펴냈는데 지금도 글을 읽으면 감탄이 나와요. 전통 갓을 정신을 표현하는 언어이자 양반의 시니피앙으로 바라보거나, 골무를 ‘손가락의 투구’라고 표현하는 등 사유의 방식이나 관점이 참 아름다웠죠. 선생과 저는 여러 면에서 아이디어를 주고받았습니다. 예컨대 서울올림픽 기획 당시 이어령 선생이 굴렁쇠 소년 아이디어를 냈을 때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고 거들기도 했죠. 원래 아이디어를 꺼냈을 때 주변 반응에 따라 살기도, 죽기도 하잖아. 그런 점에서 작게나마 일조했다고 할 수 있죠. 반대로 제가 제5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으로서 ‘거시기 머시기’라는 타이틀을 만들고 여쭤봤더니 그거 좋다며 힘을 실어준 사람이 이어령 선생이었죠.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19 20261003080142 20261003 080142](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0145/20261003080142-20261003_080142-832x1076.jpg)
그 외에도 정신적,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분이 많을 텐데요.
고마운 사람들을 나열하자면 책 한 권은 써야 할 거예요.(웃음) 그래도 몇 명만 이야기해 보죠. 공병우 박사를 빼놓을 수 없네요. 월간 〈디자인〉의 판매 수익만으로는 회사 운영이 어려워 달력, 명함, 브로슈어 제작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할 때가 있었어요. 그때 우리에게 제일 일을 많이 준 게 공병우 박사였어. 저는 지금도 박사가 고안한 세벌식 타자기를 갖고 있어요. 비록 표준 자판으로 채택되진 못했지만 두벌식보다 속도나 효율성 면에서 더 탁월하다고 생각해. 하루는 박사가 저에게 세벌식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쉽게 납득하지 못하자 조용히 창가로 데리고가더니 창 너머에 있던 조흥은행 간판을 가리켰어요. 그리고 “저기 보이는 ‘흥’ 자가 ‘흥’으로도 ‘홍’으로도 보이지 않냐”고 묻더군요. ‘리더빌리티(readability)’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매체에 꾸준히 광고를 실어줬던 한샘 조창걸 전 회장이나 퍼시스 손동창 명예회장도 잊을 수 없는 분들이죠. 순간순간마다 힘이 된 사람들이 없었다면 디자인하우스도, 월간 〈디자인〉도 세월을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인터뷰 서두에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눴는데, 돌이켜보니 적절한 시기에 도움을 준 그분들이 제 운이었네요.
1987년 창간한 자매지 〈행복이 가득한 집〉은 디자인하우스의 성장에 기폭제가 됩니다.
월간 〈디자인〉을 오래 발행하다 보니 문득 ‘집 안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이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이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디자인 매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고요. 결국 깨끗하고 아름답고 따뜻하고 남다른 집, 그것이 행복이 아닌가 싶어 〈행복이 가득한 집〉을 창간했습니다. 아주 건강한 여성지, 가십거리나 정치 뒷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는 여성지를 만들고자 했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돈이 없잖아. 투자를 받기 위해 몇몇 출판사 문을 두드렸어요. 그때 찾은 곳 중 하나가 금성출판사야. 당시 회사를 운영하던 김낙준 회장님이 제 이야기를 가만히 듣더니 조용히 1000만 원짜리 수표를 한 장 써주더군요.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합니다. 한림출판사도 마찬가지예요. 사실 처음에는 〈행복이 가득한 집〉에 실을 광고를 제안했는데 광고는 하지 않지만 돈을 꿔주겠다고 하더군요. 창간한 이듬해 2월까지만 갚으라고 했는데 〈행복이 가득한 집〉
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익분기점을 넘겼기 때문에 빚은 금방 다 갚았어요. 그런데 당시 도움을 줬던 임인수 회장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어요. 애석한 일이죠.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20 20261003080722 20261003 080722](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0729/20261003080722-20261003_080722-832x1019.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21 20261003080718 20261003 080717](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0719/20261003080718-20261003_080717-832x1111.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22 20261003080726 20261003 080726](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0733/20261003080726-20261003_080726-832x1102.jpg)
최초의 기록을 세우다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23 20261003081250 20261003 081250](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1253/20261003081250-20261003_081250-832x550.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24 20261003081308 3 11](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1312/20261003081308-3_11-832x555.jpg)
디자인하우스는 여러 ‘최초’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기업 사외보 시장으로 사업 영역을 넓힌 최초의 사례(하나은행)였고, 국내 최초로 잡지 시장에서 M&A를 체결하기도 했죠.
당시에도 많은 도움이 있었죠. 웅진출판사로부터 〈럭셔리〉 〈마이웨딩〉 〈맘앤앙팡〉을 인수했는데 그중 〈럭셔리〉는 지금도 여전히 내고 있죠. 웅진출판사를 연결해 준 사람이 컨설턴트 출신인 서영택 씨였어요. 밀리의서재를 기획하고 대표까지 하셨었죠. 우리를 많이 도와줬는데 그때는 생각이 짧아 미처 고마움을 충분히 표하지 못했어요. 아무쪼록 이 인터뷰로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믿고 매체를 내준 웅진출판사 윤석금 회장께도 물론 감사하고요.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25 20261003081611 160108000000094](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1618/20261003081611-160108000000094-832x1095.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26 20261003081610 170628000000257](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1618/20261003081610-170628000000257-832x1096.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27 20261003081607 150930000000092](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1613/20261003081607-150930000000092-832x1090.jpg)
국내 출판업계 최초로 유럽 미디어 기업의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습니다.
2000년 독일 부르다(Burda)사와 이탈리아 리촐리(Rizzoli) 사가 합작한 다국적 미디어 그룹 BRIH사로부터 당시 돈으로 100억 원 대규모 투자를 받았어요. 그때 BRIH 측의 핵심 인사가 잔니 단젤로(Gianni D’Angelo) 부사장이었습니다. 지금도 출판 사업가로서 딱 한 사람을 닮고자 한다면 그를 닮고 싶어요. 숫자를 보는 정확한 눈도, 콘텐츠에 관한 이해도 있었거든. 양수겸장! 한국에 오면 항상〈행복이 가득한 집〉을 꼼꼼히 살폈어요. 꼭 인사동에 들러 골동품도 사고. 한국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거죠. 숫자 게임만 하는 여타 경영진과 달랐지. 무엇이든 자기가 하는 일에 정신이 깃들어 있어야 해요. 잔니 단젤로에겐 그것이 있었어.
그런데 왜 다시 지분을 찾아온 거죠?
시간이 흐르고 경영진이 금융계 출신들로 바뀌었어요. 그들은 진짜 재미가 없더라고. 문화나 콘텐츠에 관한 이해 없이 회사를 그저 숫자로만 바라봤죠. 투자라는 것은 원래 함께 고민하면서 회사를 키워나가야 하는 것인데 말이지. 그래서 결국 투자 관계를 종료했어요. 100억 원을 받고 양도했던 지분율 49.9%를 240억 원 주고 다시 사왔으니 그들 입장에선 너무 좋은 투자였던 셈이죠.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28 20261003082010 20261003 082010](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2011/20261003082010-20261003_082010.jpg)
우여곡절에도 반세기를 이어온 데에는 매체, 아니, 디자인을 향한 발행인의 신념이 가장 큰 힘이 됐습니다. 종종 그 맹신에 가까운 신념이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할 때가 있어요.
모든 조건이 같다면 더 아름다운 것, 더 편리한 것을 고르는 건 사람의 본능이죠. 그리고 세상에 그런 것이 많아지면 점차 취향에 따라 선택지가 분화하고요. 그런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어요. 사람을 읽고 시대를 읽었다고 할 수 있죠. 디자인은 미학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경영의 영역이자 심리학의 영역이요, 행동학의 영역이기도 하잖아요. 이런 다학제적 측면이 끝없이 저를 매료시켰어요. 평생을 파도 끝을 알 수 없는 분야라고 생각했죠.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종종 대중이 여전히 디자인을 단순히 아름다움의 차원으로 바라보는 게 아쉬워요.
맞아요. 그런데 ‘아름답다’는 말 속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매끈한 유선형의 스포츠 카도 아름답지만 어린아이는 거친 외관의 소방차를 보고 흥분해요. 자전거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기능성 때문일 것이고, 곰 인형이 아름다운 것은 포근함이 연상되기 때문이죠. 디자인 안에 나를 감동시키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들어 있어요. 그래서 디자이너는 정말 공부를 많이 해야 해. 디자이너야말로 ‘T자형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뜻이군요. 한 수 배웠습니다.(웃음) 50년사에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디자인하우스 30주년 기념 프로젝트인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입니다.
독일 하노버 엑스포를 둘러본 적이 있어요. 그때 유독 눈에 띈 부스가 일본 건축가 시게루 반이 디자인한 일본관이었습니다. 이후 뉴욕에서 열린 글로벌 미디어 콘퍼런스에 참석했을 때 다시 그의 작품을 마주했어요. 이름이 노매딕 뮤지엄이었는데 내용도 좋았지만 건축이 정말 훌륭했어요. 당시 투자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디자인하우스 30주년 프로젝트의 디자인을 그에게 의뢰했죠.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29 20261003082538 6 10](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2541/20261003082538-6_10-832x555.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30 20261003082455 5 8](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2459/20261003082455-5_8-832x555.jpg)
여전히 더 큰 사업가를 꿈꾼다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31 20261003082933 20261003 082933](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2938/20261003082933-20261003_082933-832x555.jpg)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다 승마협회 홍보이사까지 지내셨다는 것을 알았어요. 솔직히 조금 뜬금없다고 생각했습니다.(웃음)
오래전 일인데, 인쇄비를 받으러 회사에 온 한 대표님이 저를 승마장으로 데리고 간 적이 있어요. 월간 〈디자인〉을 만드느라 늘 녹초가 된 제가 안쓰럽다며. 승마는 높이 앉아 가슴 좍 펴는 진취적인 운동이라며 강력히 권하더군요. 그런데 승마에 입문하고 3개월도 안 되어 승마협회 홍보이사까지 맡게 됐어요. 잡지를 하니까. 승마협회는 삼성그룹의 고 이건희 회장이 전략적으로 만든 단체였어요. 삼성전자는 막 국제 무대로 진출하던 시기였지만 처음에는 쉽지 않았죠.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국제 전시에서 삼성전자가 찬밥 신세였던 시절이 있었어요. 이미 골프 대회를 개최하고 있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던 거야. 그때 이건희 회장의 눈에 들어온 게 승마였대요. 예나 지금이나 승마는 고급 스포츠지. 삼성 브랜드를 타깃층에 어필하기에 적절한 운동이었던 거죠. 당시 세상을 날카롭게 읽는 삼성의 눈이나 세계 일류가 되겠다는 여망에선 정말 남다름이 있었어요. 삼성은 그냥 만들어진 회사가 아니야. 리더의 끝없는 열정으로 견인해 온 회사지.
발행인께는 모든 것이 배울 거리인가 봅니다. 혹시 승마로 깨달은 것도 있나요?
물론이죠. 승마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존재와 호흡하는 스포츠입니다. 말은 예민한 동물이에요. 지금 자기 등허리에 앉아 있는 기수가 긴장하고 있는지 아닌지 쉽게 분간하죠. 기수가 떨고 있으면 말은 자기 살길만 찾아요. 이때는 귀가 앞을 향해 있지. 긴장했다는 뜻이야. 반면 기수가 믿을 만하다고 판단되면 귀가 옆으로 젖혀져요. 안정이 된 것입니다. 말을 타면서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배웠어요. 사업가로서 승마를 하기 전후가 나뉜다고 할 만큼 깨달음이 컸죠.
그렇죠. 리더의 불안은 조직에 쉽게 전염된다고 하죠.
그것도 그렇고 지시를 내릴 때 언제나 명확해야 해요. 고삐를 잡고 우왕좌왕하면 안 되지. 강약을 조절하는 것은 개인의 습관이지만. 말에겐 언제나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인지시켜야 해. 하물며 조직은 더하지.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32 20261003083331 SDF 4](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3334/20261003083331-SDF_4-832x555.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33 20261003083431 SDF 2](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3437/20261003083431-SDF_2-832x555.jpg)
편집장이 된 뒤로 이런 생각도 합니다. ‘월간 〈디자인〉은 한국 디자인을 기록한 잡지인가, 아니면 한국 디자인을 만들어온 잡지인가.’ 발행인께서는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세요?
글쎄, 그래도 기록이 먼저 아닐까? 기록은 우리의 기본이죠. 물론 월간 〈디자인〉이나 지면에서 파생한 각종 온·오프라인 프로젝트들이 디자인계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긴 했지만 ‘만들었다’고 자부하긴 힘들지. 다만 몇몇 지점에선 만들어나간 부분이 있어. 1994년 시작한 서울리빙디자인페어나 2002년에 시작한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이 대표적이지. 특히 서울리빙디자인페어가 런던 100% 디자인보다 한 해 일찍 시작한 건 어떻게 생각해요? 사실 늘 그랬어. 우리의 비즈니스엔 레퍼런스라는 게 없었지.
그렇다면 어디서 그런 촉이 발동하는 건가요?
종이 잡지는 생각의 지평을 넓혀주죠. 그런 면에서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봐. 하지만 결국 2D로 모든 것을 접한다는 한계 또한 분명하잖아. 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더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가 서울디자인페스티벌 같은 행사도 연 것이죠. 내 최종 목표는 디벨로퍼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건 〈행복이 가득한 집〉창간 때부터 꿔온 꿈이에요. 사람들은 부동산이 그냥 땅이나 건물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 전에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한다고 봐. 우리 회사가 그걸 잘할 수 있다는 확신도 있고요. 무엇보다 여러 분야 디자이너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장이죠.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34 20261003083741 living fair 9253 5 1](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3747/20261003083741-living-fair-9253-5-1-832x547.jpg)
올해 베트남에서 첫선을 보일 ‘서울리빙디자인페어 인 하노이’도 그러한 촉에서 비롯한 것이겠죠?
베트남은 여러모로 잠재력이 있는 시장입니다. 현지 제조 산업 시설이나 생산연령인구층만 봐도 그렇지. 물론 아직 개발도상국으로 발전해야 할 부분도 많지만 말이죠. 국내 가구 브랜드나 디자이너들이 특히 이 나라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베트남 시장에 관심 있는 디자이너들과 가급적 많이 동행하고 싶어. 현지 제조 시설도 연결해 주고. 우리 회사 슬로건이잖아, ‘남 잘되게 해주는 회사’. 그것을 실천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끝없이 이어가는 모습에 디자인하우스 50주년 캠페인 ‘막, 크리에이티브!’를 떠올렸습니다. 이 캠페인을 시작한 배경도 말씀해주시죠.
50주년을 준비하면서 한국인의 정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어요. 막춤, 막걸리, 막사발… ‘막’은 때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달리 보면 엄청나게 생동감 있는 부사입니다. 생명력이 있죠. 한국인의 DNA에는 막 정신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 회장이 영국의 해양 엔지니어링 회사를 찾아가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를 들이밀며 “우리는 16세기에 이미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하잖아. 그렇게 대한민국의 조선소 신화를 일궜지. 그게 바로 막 정신이라고 봐요.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35 20261003084340 mak poster 260720 RGB Type C](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4351/20261003084340-mak_poster_260720_RGB_Type-C-832x1178.jpg)
‘막’처럼 변치 않는 고유의 성질도 있지만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도 있습니다. 지난 50년 역사를 복기할 때 디자인계에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요?
예전에 디자인은 전문가의 전유물에 가까웠죠. 전문 교육 과정을 거친 디자이너만이 디자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하지만 디자인이 일상에 가까워지면서 개인 창작자가 들어올 여지가 많아졌어요. 작은 스타들이 엄청나게 나타난 거지. 누구든지 디자인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대가 오고 있어. 나는 요즘 세대의 생각을 알고 싶어서 젊은 소설가들이 쓴 작품을 한 달에 두어 권씩 챙겨 봐요. 어떤 소설가는 자신을 ‘독특한 방식으로 깻잎을 앉은 자리에서 스무 장까지 먹을 수 있고, 그것을 과시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더라고. 작가의 약력치곤 너무 소소해 보일 수 있지만 그런 점에 요즘 사람들이 공감하잖아. 디자인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를 꺼내 보일 수 있는 용기죠. 위축된 나, 가난한 나, 상처받은 나라도 그것을 꺼내는 순간 남다른 특징이 되니까. AI 같은 기술이 그것을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시인이고 디자이너야. 그걸 잊어선 안 되죠.
2024년 월간 〈디자인〉 리뉴얼 당시 인터뷰했던 송길영 작가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요. 핵개인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의미였죠.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개인의 시대가 일상화되면 소득 자체는 줄어들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대에 필요한 게 공공성이라고 생각해요. 내 집은 7평에 불과해도 문밖을 나가면 훌륭한 공원이 있어야 해. 조금 돈을 모으면 전시회도 가고 연극도 볼 수 있어야 하죠. 인간이 소득에 갇혀선 안 돼. 좋은 것을 보고 누려야 꿈을 꿀 수 있고 자신을 살필 수 있죠. 일상에서 감동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져야 합니다.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36 20261003084835 GI 1095](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4837/20261003084835-_GI_1095-832x555.jpg)
![[창간 50주년 특별 인터뷰] 월간 〈디자인〉 이영혜 발행인 37 20261003084902 GI 1031](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10/03174905/20261003084902-_GI_1031-832x555.jpg)
맞습니다. 오늘날 공공 디자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부쩍 늘어난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사실 저는 종종 헷갈립니다. 이영혜라는 사람이 사업가인지, 기자인지, 디자이너인지. 그래서 많이 배우지만 그만큼 힘들기도 하죠(웃음). 발행인께선 이 셋 중에 어떤 자리에 가장 어울리고, 어떤 자리를 꿈꾸나요?
글쎄, 디자인 공부를 했던 게 많은 도움을 줬지만 이제 디자이너라고 말하긴 어렵죠. 대신 디자인을 빠르게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도와줄 수 있다는 점에서 디자인 해설사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여전히 내 안에 기자 정신도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제일 하고 싶은 것은 역시 사업이야. 물론 디자인이라는 화두는 놓지 않을 겁니다. 직접 디자인하진 않아도 훌륭한 창작자들을 연결해 주고, 디자인계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비즈니스를 하는 거죠. 디자인하우스가 비즈니스를 위한 다리, 광장, 마켓이 되자고. 저는 더 큰 사업가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