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디자인 방법론으로서의 ‘다성적 디자인’
페미니스트 디자이너의 역사학 2021년 말 플랫폼P 2층 라운지에선 FDSC 신인아 디자이너의 기획으로 플랫폼P 국제 교류 행사인 ‘그리고 우리는 난잡한 변두리에서 의미를 움켜쥐었다
여기, 유의미하게 다시 짚어볼 디자인 행위 혹은 디자인이라는 이름을 빌려 페미니스트 선언과 실천을 수행한 국내의 행동들이 있다. 그 자체가 누락된 역사에 대한 반동과 동시에 반성적 실천이기에 이 행동들에 대한 적절한 기록이 없다면 우리의 시간은 퇴보라는 무한 루프에 갇히고 말 것이다. 두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례를 열거한다.
그리고 우리는 난잡한 변두리에서 의미를 움켜쥐었다: 페미니스트 디자이너의 역사학 2021년 말 플랫폼P 2층 라운지에선 FDSC 신인아 디자이너의 기획으로 플랫폼P 국제 교류 행사인 ‘그리고 우리는 난잡한 변두리에서 의미를 움켜쥐었다: 페미니스트 디자이너의 역사학’이 열렸다. 다양한 프로그램 중 단연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전시였다. 전시장 초입 오른쪽 책상 위에는 타블로이드판 리소 출력물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디스플레이는 관람객의 능동적 행위가 동원되지 않으면 소리를 찾지 못하는 문자들의 무덤이었다. 이 연출이 무덤이 되지 않게 하려면 관람객은 종이 뭉텅이를 뒤져야 한다. 형형색색의 리소 프린트는 단 하나의 디자인이나 서사로 귀결될 수 없는 다종다양한 레이아웃과 서체, 내용으로 가득했다. 여러 차례 뒤져야만 각 프린트에 찍힌 숫자가 일종의 쪽 번호 역할을 한다는 걸 알게 되고, 이를 단서 삼아 약간의 인내심을 가지고 더 뒤지다 보면 12명의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총 23종의 리소 프린트(번역본) 한 세트를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깨닫는다. 이 행위는 마치 고고학자의 태도와도 같다는 것을. 남성 중심적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인해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그 존재조차도 감지할 수 없었던 세계 각지의 여성의 언어를 ‘발굴’했다는 사실을. 목소리들이 복원되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전시가 지닌 또 하나의 덕목이 있으니 ‘페미니스트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서의 공동 생산’이다. 디자인이라는 행위는 대개 하나의 통일된 양식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시에 참여한 12명의 디자이너는 각자의 기질과 재치를 발휘하여 개성 있는 레이아웃을 완성했다. 양식은 제각각이었으나 발언은 함께 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유례없는 페미니스트 역사 쓰기의 한 전범을 현장에서 보고 있었던 셈이다.
일시 2021년 11월 16일~12월 23일
장소 서울 플랫폼 P 2층 라운지
주최·주관 플랫폼 P
기획 신인아(FDSC, 오늘의풍경)
번역 유지원, 이아름(옐로우 펜 클럽)
편집 백희원
번역본 디자인 강진영, 권수진, 김정현, 박수연, 박영신, 안지경, 양민영, 양으뜸, 장윤정, 정명희, 정유미, 한경희(FDSC)
번역본 제작 포푸리
미투운동이 당신에게 건넨 말
행사장 작은 마당에 수직으로 길게 세워진 현수막들이 나부낀다. 좌우로 흔들리는 현수막에는 여러 서체와 크기 그리고 레이아웃의 문구가 배열되어 있다. “우리는 자격 없는 여자들과 세상을 바꾼다”, “이 싸움의 끝은 우리가 바라는 세상과 닮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영혼이 우리가 미워했던 육체를 이기리라”, “우리들의 연대가 너희의 공모를 이긴다” 등 FDSC 소속 총 15명의 디자이너가 미투 운동 관련 문구를 뽑아 각각 현수막으로 디자인했다. 글자들은 우뚝 서 있는 문구이자 고함이었다. 이 우렁찬 현수막들은 미투 운동 토크가 열리는 실내에도 침투해 역할을 이어갔다. 그것은 얼핏 생경한 풍경이었는데, 15종의 다양한 디자인이 그 자체로 전시이자 행사 브랜딩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통일되고 체계화된 언어를 추구하게 되는 디자인 행위에서 FDSC가 실천한 그래픽 디자인은 불협화음이라는 조화를 이뤄내고 있었다. 불균질한 타이포그래피적 질감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이벤트 디자인’보다도 기능적이고 효율적이었다. 바깥에 서 있는 훤칠한 현수막들이 행사의 취지를 암시했다면, 실내에서는 당일의 취지를 끝없이 상기시키며 망각할 수 있는 과거 미투 운동의 외침을 재생하고 있었다.
미투 운동 중간 결산: 지금 여기에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한 행사로 2018년 미투운동 이후의 5년을 중간 점검했다. 토크와 이랑의 공연 외에도 FDSC가 참여한 전시 ‘미투운동이 당신에게 건넨 말’이 열렸다.
두 행사에서 FDSC가 실천한 디자인은 그 자체가 하나의 ‘디자인 방법론’이자 ‘디자인’이라는 이름을 빌린 운동이었다.
곧 ‘다성적 디자인’이었다. 서구 모더니즘 디자인이 지닌 미덕은 분명 존재한다. 21세기 동시대 디자인 또한 여전히 모더니즘을 개념적 토대로 삼는다. 그러나 이 이론과 태도는 기능주의와 보편성이라는 목적에 따라 표준화와 단순화 그리고 기계화를 일방적으로 미화했다. 20세기 초 모더니스트들의 발언에서도 쉽게 볼 수 있듯이 모더니즘은 다양성보다는 통일성을, 개인성보다는 보편성을 추구했다.
그 과정에서 파생된 균질화는 울퉁불퉁한 표면은 ‘난잡하다’는 이유로 제거해버린 인식의 결과물 아니었는가. 그런데 FDSC는 이 디자인의 관성과 관행에 반박하고 저항한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스트 디자인 방법론(feminist design methodology)을 제안하고 실천한다. 모더니즘 디자인이 ‘노이즈 캔슬링’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면 FDSC는 제거된 ‘노이즈’를 환영하고 수용하고, 대안적 디자인 방법론으로 채택한다. 불협화음, 이질감, 불균질로 수식될 수 있는 것들이 표면에 떠오르면서 역사와 현재의 수면은 불편할 만큼 ‘난잡’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성적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소음이자 잡음 혹은 묵음으로 치부됐던 목소리들을 복구하는 것이라면? 이 실천이야말로 근미래로 이행하기 위한 지금의 언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원고를 쓰는 오늘, 또 하나의 뉴스를 접했다. 서울 신당역 화장실에서 20대 여성 역무원이 입사 동기 남자 직원에게 살해당했다. 인사동 코트 마당의 한 플래카드에 적힌 문자들이 목소리가 되어 호소한다. “당신이 바뀔 때까지 미투는 멈추지 않는다.” ‘다성적 디자인’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거세된 존재들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되돌려주는 디자인 실천이다. FDSC의 이 실천이 실행되는 곳마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다져진 그간의 서사에 균열이 일어난다. 그 모습은 충분히 더 지저분하고 어지럽고 시끄러워도 좋다. “당신이 바뀔 때까지.”
일시 2022년 8월 20일
장소 서울 인사동 KOTE
주최 한국성폭력상담소
함께하는 이들 FDSC(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클럽), 다큐멘터리 〈애프터미투〉 프로젝트 팀
참여 디자이너 고혜림, 김리원, 김수영, 김헵시바, 도한결, 박영신, 성윤주, 안지경, 양으뜸, 양민영, 양지은, 이지원, 장지영, 정연수, 최슬기, 포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