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후추 없이도 충분한 북 디자인 유현선

사진을 찍는 유현선과 책을 만드는 유현선은 얼핏 동일 인물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소금, 후추 없이도 충분한 북 디자인 유현선

사진을 찍는 유현선과 책을 만드는 유현선은 얼핏 동일 인물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디자인하는 태도를 설명할 때 그에게서 책을 면밀히 관찰하는 카메라 렌즈의 시선이 느껴진다. 글을 쓰고 전시도 기획하는 등 다방면에 재능 있는 그를 만나 이번에는 북 디자이너로서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워크룸의 넘버 16을 맡고 있다. 메일 계정 아이디 말이다.

워크룸에 2020년 7월에 입사했는데 입사 순번대로 번호가 정해지는 거라 들었다. 좀 특이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다. 02를 사용하는 김형진 실장을 비롯해 워크룸 공동 창업자들이 04번까지 채우고 있고 지금은 18번까지 합류했다. 15번이 사람들이 외우기에 더 좋을 텐데 16이라는 숫자는 조금 애매한 느낌이다.(웃음)

파일드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대학 시절 사진 소모임에서 만난 동기 4명과 함께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이다. 2017년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나가려고 준비했던 책 이름에서 그룹명을 따왔다. 이후 사진 관련 각종 행사에 참여할 기회를 얻어 꾸준히 활동하게 됐다. 2019년에는 성수동에서 첫 전시 〈파일드 SS 2020〉을 열기도 했다.

파일드 활동이 북 디자인 작업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

책을 이미지의 맥락에서 대하게 된다. 이는 내가 사진 찍는 그래픽 디자이너라서 더 그런 것 같다. 늘 어디에 놓을지, 어떻게 사진을 찍을지 상상하며 책을 디자인한다.

원래도 북 디자인에 관심이 있었나?

BI, 포스터 디자인, 북 디자인, 사진 작업 가릴 것 없이 시각적으로 아름답고 쾌적하면 다 좋아한다. BI나 포스터 같은 경우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중요하다. 요즘에는 인쇄물보다 웹상에서 이미지가 소비되기 때문에 만들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공중분해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반면 북 디자인은 물리적으로 손에 잡히는 실체가 있다는 점이 좋다.

워크룸은 본문용 조판을 잘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좋은 조판이란 무엇인가?

작업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편이다. 예컨대 자주 사용하는 서체를 활용해 같은 조합으로 본문용 조판을 짜면 쉽고 안정적이지만 한편으론 지루하고 낡아 보이기 쉽다. ‘이번에도 그냥 같은 서체를 써볼까’ 하다가 ‘여기서는 왜 이 서체를 당연하게 썼던 거지?’, ‘사용해본 적 없지만 다른 서체를 적용해볼까?’라고 질문하며 계속 바꿔보려고 한다. 이런 시도가 디자인을 더 살아 있게 만드는 것 같다. 무엇이 좋은 조판인지 정의하기란 어렵다. 대신 나는 더 좋아질 가능성을 열어두고 늘 새로운 시도를 한다.

우문현답이다. 최근 작업한 북 디자인이 궁금하다.

워크룸 프레스에서 펴낸 핼 포스터Hal Foster의 〈소극 다음은 무엇?〉 한국어판을 디자인했다. 저자는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그다음은 소극笑劇으로 반복된다는 마르크스의 논리를 지나 현실의 질서와 제도를 깨부수는 힘을 통해 소극 다음에 올 시간을 내다본다. 그래서 책 전체적으로 ‘다음’ 또는 ‘이후’가 궁금한 장치를 적용했다. 표지에는 일부가 잘린 그림을 넣고 책날개와 뒤표지에서 그림의 나머지 부분이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이후에 나올 이미지가 일부 드러나는 구조는 본문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된다. 원서에는 없는 장치지만 시퀀스가 있는 이미지나 크롭했을 때 무엇인지 예측이 어려운 이미지를 퍼블릭 도메인에서 찾아 일종의 그래픽 각주처럼 곳곳에 삽입했다. 이때 도판을 절반으로 잘라 책의 우수에 왼쪽 절반을, 페이지를 넘겨 등장하는 좌수에 오른쪽 절반을 배치했다. 사실 이런 장치를 넣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번역가가 우려했지만 다행히 초기 콘셉트를 살릴 수 있었다. (웃음)

워크룸 프레스가 아닌 다른 출판사였다면 이런 시도가 어려웠을 것 같다. 출판과 디자인을 한곳에서 하는 데다 디자이너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한몫한 건가?

이전에 몸담았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는 실무를 하나씩 익혀나가는 데 치중했다. 반면 워크룸에서는 배운다기보다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간 경험이 쌓인 덕분도 있겠지만. 워크룸에서 처음 디자인한 책은 〈첫 번째 팝 아트 시대〉다. 그때는 김형진 실장에게 궁금한 것을 많이 물어가며 작업했다. 나보다 경험이 훨씬 많기 때문에 지금도 제작에 대해서는 도움을 받고 있다. 〈소극 다음 무엇?〉 표지에 바니시 후가공을 할 때 종이에 흡수될 수 있으니 두 번 코팅해야 광택이 난다든지, 〈고어 자본주의〉 표지에 조각박으로 후가공하는 것이 좋겠다든지 하는 조언을 얻었다.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의 바다〉, 국립현대미술관, 2022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히토 슈타이얼의 개인전 도록. 커미션 작품인 ‘야생적 충동’을 표지로 사용했다. 표지 이미지가 책 옆면까지 입체적으로 이어지도록 인쇄한 것이 특징이다.

“ 북 디자인을 할 때 늘 책을 어디에 놓을지, 어떻게 사진을 찍을지를 상상하며 작업한다.”

〈고어 자본주의〉는 강렬한 일러스트레이션이 들어간 표지와 책등의 제목 서체가 인상적이다.

영화나 만화에서 고어물이라고 하면 혈흔이 난무하는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장르를 말한다. 〈고어 자본주의〉의 저자 사야크 발렌시아Sayak Valencia는 자본주의를 고어gore라는 용어로 표현한다.• 여기서 착안해 책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서 산돌 카리스마 서체를 골랐다. 원서를 보면 이탤릭체로 표기된 부분이 있는데 제목과 목차를 비롯해 이탤릭체 부분까지 모두 이 서체를 적용했다. 표지 일러스트레이션은 러시아 작가 우시코프 셰묜 블라디미로비치의 작품이다. 이 작가의 작업을 원래 좋아했는데 이번 디자인 콘셉트와 잘 어울릴 것 같아 연락했고 흔쾌히 2장을 그려줘 앞뒤 표지에 사용했다.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행위로서 고어는 영화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지금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93쪽)

북 디자인을 할 때 특별히 선호하는 서체가 있나?

중성적인 느낌을 좋아해서 SM 계열 서체를 많이 쓴다. 최정호체와 지백도 자주 쓰는 편이다. 최근에 작업한 전시 도록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의 바다〉에서는 평소 사용하지 않던 직지 고딕을 제목용 서체로 사용했다. 직지 고딕의 ‘ㅈ’과 같은 형태가 수치적으로 제도해 그린 느낌이 있어 데이터의 맥락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지에서는 각주 정보가 일종의 정보 데이터 같다고 생각해 각주 텍스트가 본문을 파고들어가는 형태로 레이아웃했다. 마침 오늘 독일에서 책을 받아본 작가가 무척 좋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타이포잔치 2021: 문자와 생명〉, 안그라픽스, 2021
기존 전시 도록과 동일한 포맷으로 제작하는 대신 표지의 행사 로고를 자수로 표현해 차별화를 꾀했다.
〈타이포잔치 2021: 문자와 생명〉 전시 도록도 디자인했다.

비엔날레 특성상 2년마다 도록이 나오는데 이전 레퍼런스를 참고해 양장으로 통일했다. 표지에 자수로 행사 로고를 넣은 것은 이번에 처음 시도해봤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거북이와 두루미’ 타이포그래피는 유광 먹박으로 표지에 적용해 각도에 따라 보일 듯 말 듯한 느낌을 주었다. 타이포잔치는 두성종이의 후원을 받고 있기에 두성종이의 친환경 종이 ‘리시코’를 처음 사용해봤다. 친환경 종이가 퀄리티까지 좋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다양하게 인쇄 테스트를 해본 결과 컬러가 쨍하게 인쇄되는 느낌이 좋았다. 타이포잔치 전시 도록이 사이즈나 형식 면에서 기존 도록의 아이덴티티를 크게 깨뜨리지 않고 맞춰가려고 했던 반면,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에서 1년에 두 번 발행하는 저널 〈글짜씨〉는 좀 더 실험적인 성격이 강했다.

어떤 부분에서 〈글짜씨〉가 실험적이었나?

2020년부터 1년간 출판국장을 맡으면서 18호부터 21호까지 디자인했는데 판형 사이즈는 맞추되 제호 디자인을 리뉴얼했다. 또 본문에 국영문을 함께 배치했던 기존 형식에서 벗어나 앞에서 보면 한국어로, 뒤집어서 보면 영어로 읽는 구조를 짰다. 앞뒤 표지에는 각각 다른 컬러를 사용했는데 이 두 컬러는 책등에서 그러데이션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책꽂이에 4권을 꽂아놓았을 때 컬러가 연결되는 느낌을 의도한 것이다.

〈글짜씨〉 18~21호, 안그라픽스, 2020~2021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에서 연 2회 발간하는 저널. 18호부터 21호까지 디자인을 맡았다. 그러데이션을 적용한 책등이 포인트다.
책은 주제나 내용만큼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디자인도 중요하다.

책은 공간을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디자인이 아름답지 않으면 거의 e북으로 읽는다. 올해 2월부터 월간 〈출판문화〉에 글을 연재하고 있는데 가장 처음 쓴 글이 띠지에 관한 생각을 담은 ‘소금, 후추, 띠지’다. 서점에 가보면 표지랑 어울리지 않게 홍보용 문구로 가득 채운 띠지가 무척 거슬리기 때문이다.(웃음) 요즘에는 인테리어용 책에 관심이 많다. 표지와 만듦새가 아름다워 공간을 장식하는 용도로도 쓰이는 책을 말한다. 책을 눕혀서 꽂는 형태의 책장은 기능적이지 않지만 이런 인테리어용 책을 디스플레이하기에 효과적이다. 일부러 그런 책장을 구입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흥미롭다. 그래서 인테리어용 책에 대한 이야기를 〈출판문화〉 다음 호에 풀어낼 생각이다.

글 서민경 기자 인물 사진 박현성(폴스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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