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동적 설치 공간, 플랏엠
플랏엠은 간편하고 단출한 방법으로 공간을 구현해 불필요한 과정을 줄인다. 이른바 공사 범위 최소화하기. 가구 설치만으로 충분한 공간을 계획하고 꼭 필요한 것을 디자인한다.
바닥, 벽체, 천장을 허물고 다시 세우는 공사 현장에서 디자이너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혹자는 공간을 철거한 민낯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소음과 분진 앞에서 회의를 느끼기도 한다. 플랏엠은 간편하고 단출한 방법으로 공간을 구현해 불필요한 과정을 줄인다. 이른바 공사 범위 최소화하기. 가구 설치만으로 충분한 공간을 계획하고 꼭 필요한 것을 디자인한다. 익숙한 재료와 기본적 구조에서 출발한 이들의 디자인은 일상적이고도 비일상적인,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는 장면으로 수렴한다.
스튜디오를 운영한 지 올해로 17년 됐다. 새로운 공간이 끊임없이 들어서고 또 그만큼의 공간이 사라지는 서울에서 20년 가까이 일하며 플랏엠이 거둔 성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도 궁금하다.
선정현(이하 선) 오래전 작업했던 도면을 최근에 펼쳐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뭐야? 분명 괜찮은 작업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도면 5장만으로 프로젝트가 끝났다. 여기에 담기지 않은 다른 과정도 있었겠지만 지금 우리가 작업하는 프로젝트의 도면은 30~40장씩 두껍게 나오지 않나. 당시에는 공간 디자이너가 가구를 만드는 게 일반적이지 않았기에 대부분 사입해서 썼다. 붙박이장 정도만 만들었달까? 1인칭 시점으로 우리의 성과를 말하는 게 멋쩍지만 2006년쯤 작업한 카페 수카라가 플랏엠의 큰 기점이었다. 그 프로젝트로 인해 김형진 디자이너를 만났고 창성동 1층에 자리한 워크룸 작업실을 디자인할 수 있었다. 그래픽 디자이너나 브랜드가 공간으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게 흔치 않은 시기였는데 이후 국내 스몰 브랜드들이 차츰 활약하기 시작하며 플랏엠도 그 앞단에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물론 플랏엠으로 인해 그런 흐름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키티버니포니, 비아인키노, 에이랜드, 라이프커피, 식스티세컨즈 등 새롭게 전개하는 브랜드와 함께 일하며 공간 디자인 신의 변화와 과정을 목격하고 하나의 표본을 만드는 데 작은 목소리를 더했다고 생각한다.
플랏엠은 일반적인 재료와 구조로 공간과 가구를 만든다. 힘을 잔뜩 뺀, 어찌 보면 평범한 디자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많은 디자이너가 플랏엠의 공간에서 힘을 느낀다.
조규엽(이하 조) 가구든 공간이든 쉬운 재료를 사용해 쉬운 방법으로 만드는 플랏엠의 성향 때문 아닐까. 소설가들도 각기 문체가 다르지 않나. 담백한 문장을 쓰는 사람도 있고 화려한 문체를 구사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는 대체로 미사여구 없이 단어의 조합과 문장의 배치만으로 새로움을 준다. 어려운 문장, 혹은 분위기를 잡거나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도구로써 쓰는 단어는 없다. 가령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어제〉에 “어제는 아름다웠다”라는 문장이 있다. 특별할 것 없는 텍스트지만 맥락에 따라 정말 강력하게 다가온다. 가구와 공간도 마찬가지다. 단순하고 쉽지만 그래서 더 좋은 장면을 발견하기 위해 계속 실험하는 중이다.
플랏엠은 일의 범주를 어떻게 정의하나? 그 기준이 모호해 고민한 적은 없었나?
선 일의 영역은 점점 확장되고 있다. 사실 공간 디자인이라는 말 안에는 정말 많은 게 포함되어 있다. 예전에는 설계, 시공뿐만 아니라 컵이나 오브제를 골라주는 일까지 담당했다. 현재 플랏엠은 시공을 완전히 분리했다. 공간 설계와 가구 디자인에 집중하고 대신 공간 기획까지 아우른다. 좀 더 영역이 넓어진 셈이다. 물론 과거에도 브랜딩을 맡았는데 그것을 일의 영역으로 여기진 않았다. 하지만 공간이 브랜드의 성격을 좌우하고 그 가치에 분명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플랏엠의 일로 흡수하는 게 맞는 듯해 요즘에는 여기에 좀 더 섬세하게 집중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논픽션홈을 가구 브랜드로 오해한다. 브랜드가 아니라 일종의 활동에 가깝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벌이나?
조 일 년에 한 번 ‘설치 개방’이라는 이름의 자리를 마련한다. 어떤 장소를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기 위해 말 그대로 설치를 하고 관객에게 개방하는 것이다. 논픽션홈은 가구로 공간 실험을 해보고자 시작한 프로젝트다. 우리가 하는 일에 접목해서 말하자면 벽체를 세우고, 바 테이블 같은 가구를 만들고, 바닥 타일을 시공하며 벽과 천장을 깔끔하게 마감하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대 계약 기간을 채워 업장을 운영한다는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이런 식으로 공간을 계획하는 것이 과연 현명할까? 의구심이 생겼다. 필요한 만큼만 디자인해도 충분한 방법이 분명 있을 텐데. 논픽션홈은 가구로 공간의 변화를 만들어 그것을 관찰하며 기록하는 활동이다. 가구의 형태나 배열, 이에 따른 사람들의 움직임,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에 주목한다.
선 마치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처럼 클라이언트가 의뢰하는 일만으로는 절대 채울 수 없는 창작 욕구가 있었기에 시작한 활동이기도 하다. 뭘 해야 할지 막연할 때도 많은데 그래서 터득한 방법은 연례행사 같은 ‘설치 개방’의 날짜를 일단 정해놓는 것이다. 디자이너는 어쩔 수 없이 마감이 있어야 한다.
‘설치’는 플랏엠의 공간 디자인 방식을 대변하는 단어 같기도 하다. 만약 클라이언트가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더라도 그대로 가져갈 수 있는 설치 가구가 꽤 많다.
선 사라지는 업장도 어쩔 수 없이 생길 테고, 조금 가슴 아프겠지만 공간에 놓인 가구가 당근마켓에서 돌 수도 있다. 가끔 의자 밑에 사인을 남기기도 한다. 50년 후 빈티지 가구로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웃음).
조 논픽션홈 활동이 있었기에 가구로 공간을 짓는 듯한 디자인이 가능했다. ‘설치 개방’ 방식을 공간 디자인에 적용하는 경우도 늘었고 그 활동으로 인해 더 많은 클라이언트가 플랏엠을 이해하고 좋아했으니까.
공간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에 관여하며 그래픽 디자이너와의 협업도 잦았다. 특히 워크룸과 많은 일을 했는데 또 협업해보고 싶은 디자이너가 있나?
선 2009년에 ‘카페 잇Eat’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처음으로 그래픽 디자이너와 협업했다. 당시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스튜디오 내부에서 깔끔한 서체로 깨끗한 간판을 만들어 걸곤 했지만 이 공간만큼은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잇’이라는 이름이 누구나 알 만한 단어이기도 했고, 런던에서 이미 동명의 카페가 유행하고 있었다. 클라이언트를 어렵게 설득해 워크룸에 일을 의뢰했고 완벽하게 다른 이미지의 ‘잇’을 만들어냈다. 결과물이 너무나 만족스러웠기에 이후 그래픽 디자인은 전문가에게 일을 맡기곤 했다. ‘공간의 모든 요소가 꼭 디자인되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어 한동안 그래픽 디자이너와 전혀 협업하지 않은 시기도 있었는데 최근에는 생각이 다시 바뀌었다. ‘그래픽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 확실한 방향을 정해서 디자인한다’라는 나름의 기준이 생겨서 워크룸뿐 아니라 좀 더 다양한 디자이너와 일하고 있다. 요즘 관심이 가는 디자이너는 오혜진이다. 인간적으로도, 그로부터 나오는 디자인도 궁금하다.
플랏엠은 한창 활발하게 활동할 무렵 여느 스튜디오와는 다른 접근 방식, 작업의 범주, 톤앤매너로 눈에 띄었다. 최근 ‘포스트 플랏엠’ 같은 스튜디오가 부쩍 늘어났는데 선두 주자로서 어떤 고민과 생각을 하나?
선 도구로서의 디자인과 가치로서의 디자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화두다. 디자이너에게 작업을 의뢰한다는 것은 일단 도구로서 디자인이 필요한 것인데 이 작업이 ‘그냥 도구’에만 그친다면 시간이 흐르고 노후했을 때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못한다. 가령 산업화 시대에 디자인한 가구는 지금까지도 가치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 않나. 당시 그것을 디자인한 사람은 어떤 태도와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국내 디자인사에서는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데 플랏엠 작업으로 이를 해내고 싶다. 우리의 디자인이 꼭 한국이나 서울을 대변할 필요는 없지만 플랏엠만의 색깔을 찾는 과정에서 결국 한국적인 디자인을 들여다보지 않을까? 이러한 고민이 요즘 우리에게 가장 뜨거운 감자다. 당장 가시적인 성과로 보여주기보다는 그 변화의 지점이 어디일지 정확하게 찾고 싶다.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차츰 발견한다면 몇 년 후 눈에 띄게 달라진 스튜디오가 될 수도 있겠지.
조 외국 디자이너들도 이런 현상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듯하다. 공간과 가구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디자이너들이 늘어나고, 많은 물건을 만들어낼 여력이 있다는 것을 다양한 관점에서 신기해하고 부러워한다. 수요가 늘어난 만큼 창작자도 많아졌는데, 그래서 더 넓고 탄탄한 문화가 형성되면 좋겠다. 그리고 일단 좀 쉬고 싶다. 6개월, 아니 1년 정도.(웃음)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디자인은 무엇인가?
조 플랏엠이 디자인한 공간이 공원 같기를 바란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것을 넘어서 누구나 자기만의 장소에서 자기만의 활동을 할 수 있는 그런 공간. 좀 과하게 말하면 공간 디자인은 사용자의 삶에 비전을 제시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가구를 만들 땐 조금 관점이 다르다. 물론 공간의 성격에 맞춰 디자인하는 경우도 많지만, 개인적인 놀이와 실험으로서 가구에 접근할 땐 그 디자인이 과연 한 걸음 더 나아간 결과물인지 따져본다. 나의 가구 디자인사를 나열했을 때 퇴보하거나 현상 유지만 하는 작업이라면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고 본다. 디자인은 똑같은데 재료만 바꿔 다른 이미지를 도출하는 식의 변주는 가급적 피한다. 새로운 디자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싶지 않다.
선 공간의 마감재나 세밀한 디자인보다는 그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분위기를 만들어낼지에 관해 좀 더 고심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된 분위기가, 설령 차가운 물체를 쓰더라도 따뜻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혼자 오거나 외로운, 혹은 조금 소외된 사람들도 충분히 스며들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아는 사람들만 모이고, 그래서 무리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왔을 때 설 자리가 없는 분위기가 싫어서 ‘설치 개방’ 때 지인을 특별히 초대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문득 들어왔을 때 섞일 수 없는 분위기를 배척하는데 이런 지점이 여느 스튜디오의 결과물과 다른 모습을 그릴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