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더치 디자인 위크

지난 10월 22일부터 30일까지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 2022 더치 디자인 위크가 열렸다. 올해의 주제 ‘Get Set’는 인류가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 디자인의 의미를 돌아보게 했다.

2022 더치 디자인 위크
스트레이프 S 지역에서 진행한 야외 전시. 본래 필립스의 대규모 공장 부지였던 이곳은 도 계획 전문가이자 디자이너인 아드리안 회저Adriaan Geuze의 주도하에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지난 10월 22일부터 30일까지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 2022 더치 디자인 위크가 열렸다. 올해의 주제 ‘Get Set’는 인류가 위기에 직면한 오늘날, 디자인의 의미를 돌아보게 했다.

2022 더치 디자인 위크
기간 10월 22~30일
장소 에인트호번 전역
주제 Get Set
크리에이티브 헤드 미리암 판데르 뤼버 (Miriam van der Lubbe)
앰배서더 포르마판타스마(Formafantasma), 마르얀 판아우벌(Marjan van Aubel)
참관객 35만 명 이상
참가 디자이너 약 2600명
웹사이트 ddw.nl

암스테르담 기반의 태양열 조명 브랜드 서니Sunne 부스. DDW 메인 행사장의 말미를 장식했다.

우려와 달리 10월 하순 에인트호번의 날씨는 제법 쾌청했다. 멀리서 불어오는 겨울의 스산한 기운이 코끝에 감돌기는 했지만, 이 멋진 디자인 행사를 치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에인트호번 시민들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미디어, 2600여 명의 참가 디자이너들로 도시는 활력이 넘쳤다. 더치 디자인 위크(이하 DDW)는 유럽 북부에서 열리는 디자인 행사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매년 국내외 35만 명 이상이 이곳을 찾고 110여 개의 크고 작은 전시가 도시 전역에서 열린다. 재미있는 점은 행사 성격이 여타 디자인 페어와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미국 메이커 페어를 방불케 할 만큼 작품이 투박하다고 느껴졌는데 이는 행사의 목적이 상품 판매보다 순수한 창작성과 디자인의 실험 정신을 보여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올해 DDW의 주제는 ‘Get Set’. 육상 시합의 준비 구호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주제는 기후 위기, 난민 문제, 전쟁 등 전 인류가 위기에 처한 현대사회에서 디자이너가 새롭게 전열을 가다듬고 전진해야 한다는 일종의 매니페스토였다. 올해 새로 부임한 DDW의 크리에이티브 헤드 미리암 판데르 뤼버는 행사의 취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DDW의 처음 10년이 디자인 자체를 보여주는 데 목적을 뒀다면 그다음 10년은 디자인과 공공 영역을 연결하는 데 주력했다. 앞으로 맞이할 10년은 연결을 넘어 결실을 맺는 데 집중할 것이다.” 미션 드라이븐Mission-Driven 파트에서는 이러한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사회적 이슈와 결부된 공통의 미션을 놓고 여러 디자이너가 독자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는 것이 프로젝트의 골자. 예를 들어 에인트호번 스트레이프 S Strijp-S 지역에서는 슈퍼마켓의 미래를 주제로 기획전을 열었는데 메를러 베르허르스Merle Bergers 등 디자인 스튜디오가 에인트호번 공과대학교 학생들과 시나리오를 설계하고 대체육, 배송 시스템, 디지털 다이닝 등 슈퍼마켓 상품과 유통을 둘러싼 디자인을 선보였다. 이 밖에도 도심 곳곳에서 다양한 디자인 실험이 펼쳐졌다. 그중 몇 가지 경향과 특징을 톺아봤다.

21세기 산업 혁명의 서막? CMF의 진화
디지털 시대의 도래 이후 우리는 종종 물성의 가치를 망각한다. 올해 DDW는 이런 흐름에 반기를 들었다. 특히 전 인류의 공통 과제로 부상한 쓰레기 문제를 환기하는 독창적인 리사이클링 디자인이 눈에 띄었다. 버려진 어망과 파라슈트, 플라스틱 패키지 등을 활용한 소재가 등장하는 한편 폐유리와 재, 심지어 음식물 쓰레기에서 추출한 염료와 색소 등도 선보였다. 글로벌 디자인 커뮤니티 아이솔라Isola 역시 시내 중심가에서 〈No Space for Waste〉전을 열어 폐자재와 폐기물로만 제작한 제품들을 전시했다.

밀라노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제품 디자이너 미헬라 파니자 Michela Panizza가 〈No Space for Waste〉전에서 선보인 운동 기구 시리즈 ‘페소Peso’. 폐마스크를 활용해 만들었다.

20세기 디자이너의 재료에서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전락한 플라스틱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에인트호번 기반의 디자인 플랫폼 이크시 엑스포Yksi Expo는 〈Rethinking Plastic〉전을 통해 플라스틱의 대체품을 찾고, 플라스틱을 사용하더라도 다른 쓰임을 모색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렇다고 DDW에서 선보인 모든 소재가 환경 문제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소재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는 데 역점을 둔 작품도 있었다. 이를테면 바이오 소재를 활용한 디자인이 돋보였는데 균사체를 활용한 푸드 디자인이나 말미잘을 활용한 조명 등이 있었다. 특히 젊은 디자이너들은 달걀 껍데기나 소의 혈액, 미세 조류를 활용한 염색 방식 등 다양한 재료와 발색 방식을 실험하며 소재의 한계를 실험했다.

디자인 신에 발을 디딘 뉴 크래프트맨십
이번 행사에서 또 한 가지 눈길을 끈 것은 장인 정신이 깃든 작품이었다. 이는 디자인과 공예 사이의 경계가 점차 흐릿해지고 있는 현상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이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한다는 뜻은 아니다. 디자이너들은 제작 기술에 실험적 요소를 가미해 21세기형 공예를 선보였다. 네덜란드 디자이너 브라이언 스툴Bryan Stoel은 섬유 몰드를 사용해 의도적으로 찌그러진 유리 그릇을 제작했다. 네덜란드 공예청과 유럽 공예청은 디지털 메이커와 공예가를 매칭해 직조, 뜨개질, 제지, 도자기 등 전통 기술과 3D 프린팅을 결합하는 시도를 했다.

또 네덜란드 헤이저Heeze 지역에 본사를 둔 유서 깊은 텍스타일 회사 EE 라벨스EE Labels는 여러 장인 및 아티스트와 협업한 리미티드 컬렉션 WEEEF를 전시했다. 1900년에 설립한 이 회사는 지금까지 마르셀 반더스 Marcel Wanders, 빅터 & 롤프Viktor & Rolf, 키키 판에이크Kiki van Eijk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협업했다. 한편 디자인 리서처 오리 오리쉰 메르하프Ori Orisun Merhav는 디자인 아카데미 에인트호번의 졸업 전시에서 천연 수지 셸락shellac을 활용한 염색 공예 기술을 선보이며 화제를 모았다. 락깍지벌레가 고치를 지을 때 분비되는 이 물질은 화학 코팅 기술에 밀려 차츰 설 자리를 잃었는데 디자이너는 이 기술을 현대적으로 복원했다.

사회적 메시지로서의 디자인
일찍이 조너선 반브룩Jonathan Banbrook은 디자인이 “인간의 고통과 희망, 사랑을 인류에 전달함으로써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때 디자인은 기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물론 모든 디자인은 나름의 사회적 의미를 갖지만, 일부 디자인은 좀 더 직접적이고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표출한다. 올해 DDW에서도 이러한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때로 사회적 통념에 반기를 들거나 그릇된 시스템을 꼬집기도 했고, 온정 어린 시선으로 사회적 약자를 보듬기도 했다. 게리트 리트벨트 아카데미Gerrit Rietveld Academy 출신의 디자이너 알마 테이르Alma Teer는 ‘여성이 걸칠 수 있는 최고의 주얼리는 그녀의 미소다(The Best Jewellery a Woman Can Wear Is Her Smile)’라는 다소 긴 이름의 액세서리 시리즈를 발표했는데 졸업 작품으로 만든 이 액세서리는 고문 도구에 가까운 모습이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게 만드는 디자인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을 암시했다. 디자인 스튜디오 LABAA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이들이 심리적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의자 ‘OTO 허깅 체어’를 전시했다. 디자인의 사회적 메시지는 때로 제3세계의 정체성 문제로 연결되기도 한다. 더치 디자인 재단이 운영하는 2022 더치 디자인 어워드 전시작 가운데 이런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이슬람이나 동유럽권의 의복 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패션 디자인이 전시장 곳곳에 대거 포진했다.

서문섭의 ‘Passage to the Lake’.

한국 디자이너들의 활약
이번 DDW에서는 한국 출신 디자이너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스튜디오 페시의 공동 창업자로 디자인 아카데미 에인트호번에서 수학한 송승준은 DMZ 생태계를 은유한 테라리엄과 가상의 생물 드로잉을 전시해 현지에서 호평을 얻었다. 오픈 스튜디오 형식으로 진행한 섹티 시Sectie-C의 전시는 디자인 아카데미 에인트호번의 졸업 전시와 더불어 이번 행사의 백미라 불렸는데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한국 디자이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의 입주 작가인 서문섭은 호수를 집에 들인다는 상상으로 디자인한 작품 ‘Passage to the Lake’를, 같은 입주 작가인 박찬별은 평이한 세라믹에 드리운 그림자 형태를 재가공한 도자기 시리즈를 전시했다. 그녀는 졸업 동기들과 함께 ‘컬렉티브 도’라는 그룹을 만들어 활동 중이기도 한데 이들은 에인트호번 외곽에 위치한 문화 공간 플랜 비Plan-B에서 단체전을 열기도 했다.

이 밖에 네덜란드의 유명 디자인 편집매장 프로즌 파운틴Frozen Fountain이 〈디자인 페론Design Perron〉전에서 선보인 디자이너 정선우의 미니어처 세라믹 의자 시리즈 ‘타이니 프렌즈’를 전량 구매해 작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리암 판데르 뤼버
DDW 크리에이티브 헤드
“ DDW는 디자인이 어떻게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논의하는 장이다.”

당신은 DDW의 공동 창업자이기도 하다. 지난 20년간 네덜란드 디자인 생태계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

이른바 ‘더치 디자인’이라고 하면 크게 두 가지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 같다. 하나는 견고한 제조 인프라를 바탕으로 한 창조적 산업, 또 하나는 전위적이고 강렬한 작가주의다. 후자는 디자인 그룹 드로흐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네덜란드 디자인 생태계 안에서 소셜 디자인이라는 영역이 새롭게 부상 중이다. 사회를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에 대한 많은 논의가 오가는 중이다.

크리에이티브 헤드를 맡으면서 지속 가능성과 더불어 네트워크와 커뮤니티를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봐도 무방할까?

그렇다. 기존의 디자인 영역과는 다소 다른 성격을 띠는데 소셜 디자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무엇보다 일련의 작업은 디자이너 혼자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관련이 있는 유관 단체나 이해관계자와 소통하는 게 필요하다. DDW는 명징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자리는 아니다.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함께 알아보고 탐구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디자인이 어떻게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논의하는 장인 셈이다. 이는 디자인 영역의 확장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시각적 결과물을 넘어 시스템을 설계하는 차원의 디자인이 늘고 있다.

WEEEF 컬렉션.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네트워크가 중요한 건 인정하지만, 사실 설득과 공감은 언제나 어렵다. 상대가 내 뜻에 공감해줄 것이라고 예단하는 건 순진한 발상 같다. 커뮤니티를 공고히 하기 위한 노하우가 있을까?

디자이너가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데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그 미래는 혼자 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일단 명확한 하나의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연대할 수 있는 목표 말이다. 나의 필요뿐 아니라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태도도 갖추어야 한다. 미션을 공유하고 나서 다음 단계는 효과적인 해결책을 고민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정책이나 제도, 체제 등 인프라 개선도 포함될 수 있다.

더치 디자인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는 실험과 혁신이다. 때로는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런 실험 정신의 근간에는 네덜란드의 역사나 국민성이 작용했다고 보나?

재미있는 질문이다.(웃음) 나라 자체가 간척을 통해 태어났기에 탄생부터 인위적인 요소, 즉 디자인과 결부되어 있다. 게다가 이런 결과는 소수의 힘에서는 나올 수 없다. 더치 디자인의 DNA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코크리에이션co-creation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네덜란드의 또 다른 특징은 기업가 정신이다. 이른바 황금시대•에 우리는 해상 무역로를 개척하고 세계 최초로 주식 시장을 출범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국민성 또한 더치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실 더치 디자인이 미드센추리 모던이나 일본의 젠처럼 스타일로 정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더치 디자인의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질문에 질문을 더하는 것. 누군가 던진 질문에 곧바로 답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새로이 파악하고, 새로운 관점을 교환하고, 맥락의 의미를 탐문해 새롭게 질문하는 것이 곧 더치 디자인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지금은 이러한 사고방식과 표면적인 양식을 분별하지 않고 모두 디자인이라고 부르는데 솔직히 새로운 단어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컬렉티브 도의 첫 전시 〈Ways to See a Spinning Top〉.
크리에이티브 헤드로서 올해 DDW에서 주안점을 둔 부분은?

직면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떻게 대비할 것인지 논의하고 스마트한 연대를 통해 답을 찾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부 디자인은 매우 논쟁적인 사회적 이슈를 담고 있다. 이를테면 슈퍼마켓을 주제로 한 전시장에서는 현재 유통 시스템이 우리 지구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확실히 지속 가능성은 전 인류의 공통 과제가 됐다. 하지만 솔직히 미심쩍은 부분도 있다. 아름답지 않은 디자인을 윤리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은 디자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좋은 질문이다. 나 역시 미학과 윤리 사이의 갈등 구조를 잘 이해하고 있다. 취지가 좋다고 사람들이 절로 돌아봐주는 것은 아니니까. 다시 말해 아름다움과 선량함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찾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올해 DDW에서는 아마 미감에만 초점을 맞춘 디자인은 찾기 힘들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고, 이것을 건드리는 게 필요하기에 미감만 강조할 수 없다.

앞으로 DDW를 어떻게 이끌 생각인가? 미션 드라이븐 프로젝트를 강화해

나가려고 한다. 향후 5년 내에 단순 관람을 넘어 사람들이 스스로 문제 해결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되묻고 행동하는 행사로 발전시켜나갈 것이다.

글 최명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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