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디자인의 실험들

전시 디자인은 지금 어디쯤 왔고, 미래에는 어떤 전시 디자인이 펼쳐질까? 지금껏 보지 못했던 전시 디자인의 다양한 시도를 살펴봤다.

전시 디자인의 실험들

관람객과 전시 콘텐츠 간의 거리가 어느 때보다 가까워지고 있다. “만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은 이제 전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오히려 만져보거나 체험해보도록 관람객을 유도하는 콘텐츠가 많아졌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전시 디자인도 재료나 형태에 대한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전시 디자인은 지금 어디쯤 왔고, 미래에는 어떤 전시 디자인이 펼쳐질까? 지금껏 보지 못했던 전시 디자인의 다양한 시도를 살펴봤다. 글 서민경 기자

‘새로운 전망으로 가득 채운 파빌리온(Pavilions Full of New Perspectives)’. 8개의 파빌리온 안에서 인간과 자연의 대안적 관계를 이야기하는 영상이 펼쳐진다.

〈자연. 그리고 우리?(Nature. And Us?)〉전
스위스의 슈타퍼하우스Stapferhaus는 ‘2020 올해의 유럽 뮤지엄’으로 선정될 만큼 수준 높은 전시를 선보이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하는 전시와 프로그램을 주로 운영하는 이곳에서 〈자연. 그리고 우리?〉전이 열린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지는 오늘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검토하며 ‘과연 인간이 돌이나 식물, 동물보다 우월한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전시다. 전시명의 물음표는 인간이 ‘우리’라고 인식하는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의문을 품게 한다. 전시 디자인을 총괄한 네덜란드 디자인 스튜디오 코스만데용Kossmanndejong(이하 KDJ)은 전시장 전체를 일종의 ‘도구 상자’로 상정했다. 이전 전시에서 사용한 자원을 재활용하고 다음 전시에서 재사용할 수 있도록 고려한 것이다. 모듈식 벤치를 사용하고 나사와 기술적 장치를 의도적으로 드러낸 것도 그 때문이다. 한편 관람객이 전시 콘텐츠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비인간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연과의 연결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한 미학적이면서도 유희적인 전시 디자인이다. 먼저 전시장에 입장할 때 자연과 단절시키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맨발로 들어서는 방 안에는 모래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곳에 일종의 탄소 ‘발자국’을 남기면서 관람객은 전시의 일부분이 된다. 벽이 아닌 천장에 매단 반투명 커튼에 빔 프로젝션 영상을 투사한 8개의 파빌리온도 스펙터클한 장면을 연출한다. 적당히 시선을 차단하면서도 개방감을 주는 커튼을 통해 거대한 오픈 스페이스를 구현했다. KDJ의 전시 디자이너 로빈 스헤이프스Robin Schijfs는 전시 투어에서 “공간과 콘텐츠를 함께 연결시키는 작업이었다.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자극하기 위해 전시 공간을 열어두는 것이 기본 방향이었다”라고 설명하며 “좋은 전시 디자인에 대한 마법의 공식은 없다. 전시마다 해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라고 덧붙였다. stapferhaus.ch

인간이 남기는 탄소발자국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는 ‘지울 수 있는(없는) 발자국((In)Erasable Footsteps)’.

기간 2022년 10월 30일~2023년 10월 29일
장소 슈타퍼하우스
전시 기획 Lisa Gnirss 외
전시 디자인 및 그래픽 디자인 Kossmanndejong, kossmanndejong.nl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린 같은 전시에서 전시장 특성에 맞게 디자인도 변주되었다.

〈묘한 감각이 좋다: ASMR의 세계(Weird Sensation Feels Good: The World of ASMR)〉전
‘자율 감각 쾌감 반응’이라는 뜻을 가진 ASMR은 오감으로 인한 감각을 뇌에 전달함으로써 심리적 안정을 주는 치료법이다. 불안, 스트레스, 불면증, 외로움 등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증상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 파도 소리, 풀벌레 소리 등 청각을 자극하는 ASMR은 유튜브를 통해 급격하게 퍼졌다. 그런데 런던의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ASMR의 세계〉전은 온라인이 아닌 전시장에서 ASMR 사운드를 즐길 수 있어 눈길을 끈다. 런던 디자인 뮤지엄과 스웨덴 국립건축디자인센터 아르크데스ArkDes가 협력한 이번 전시는 12명의 작가(일명 ASMRtist)를 초대해 흥미로운 ASMR의 세계를 소개했다(동명의 전시는 2020년 스웨덴에서 먼저 개최된 바 있다). 주제뿐 아니라 전시 디자인도 흥미롭다. 건축 스튜디오 TER는 ‘타원형 ASMR 아레나’를 테마로 부드러운 쿠션 소재를 사용해 사람들이 편안하게 기댄 채 ASMR을 즐길 수 있는 전시장 환경을 조성했다. “ASMR 자극에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을 관찰함으로써 공간에서 휴식하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쿠션으로 주름을 만들어 물이 흐르는 스파를 연상시키도록 디자인한 전시장에서 ASMR 사운드의 흐름이 시각적으로 느껴진다. 쿠션의 주름이 벽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듯한 연출을 한 2020년 전시와는 달리, 이번 전시에서는 파티션처럼 쿠션으로 구조를 잡은 것이 특징이다. 이 프로젝트는 2022 〈디진〉 어워드 전시 디자인 부문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심사위원들은 “실재하는 전시 공간에 유튜브 세대의 현상을 성공적으로 옮겨놓았다”며, “디지털의 촉각화를 만들어낸 디지털 경험의 신체적 메니페스토”라고 높게 평가했다. designmuseum.org

2020년 스웨덴 국립건축디자인센터 아르크데스에서 개최한 〈묘한 감각이 좋다: ASMR의 세계〉전.

기간 2022년 5월 13일~2023년 4월 10일
장소 디자인 뮤지엄
전시 기획 James Taylor-Foster, Esme Hawes
전시 디자인 TER, eeter.net
그래픽 디자인 Agga Mette Stage, Alexander S der,

〈미래는 현재다(The Future is Present)〉전
2년간의 레노베이션을 마친 덴마크 디자인 뮤지엄이 지난해 6월 재개관하며 선보인 전시 중 하나다. ‘인간(Human)’, ‘사회(Society)’, ‘행성+(Planet+)’, ‘미래를 상상하기(Shaping the Future)’라는 섹션 구성 아래 미래 시나리오와 디자인 프로젝트, 인스털레이션 등을 전시했다. 코펜하겐에서 활동하는 디자인·건축 스튜디오 스파콘 & X는 덴마크 디자인을 잘 드러내는 동시에 현대적으로 전시 디자인을 풀어갔다. 이들은 ‘전통과 현대의 대비’를 콘셉트로 ‘혁신적이고 지속 가능한 소재’를 사용하는 것을 전시 디자인의 기본 방향으로 제시했다. 특히 로컬 덴마크 회사와 협력해 친환경 텍스타일과 조명 기술로 각 조닝을 구분하고 테마별 분위기를 환기시킨 점이 두드러진다. 현대적 재료로 연출한 전시장은 대리석 바닥으로 고전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뮤지엄 건축물과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이를테면 소재 회사 크바드라트Kvadrat에서 개발한 반투명 실버 텍스타일로 주름을 만들고 조명으로 미래적 분위기를 연출한 공간에서는 ‘리모트 워크’를 주제로 2030년에는 업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에 대한 미래 시나리오 네 가지를 조곤조곤 들려준다. 또 H+H의 기포 콘크리트 소재는 모서리가 깨진 채로 전시대로 활용되었고, 바이오 플라스틱 소재는 뱀처럼 플렉시블하게 구불거리는 형태의 모듈 의자 형태로 제시됐다. 마지막 섹션에서 생분해성 유골 단지 등을 올려놓은 전시대의 소재는 덴마크의 해조류 생산 회사 쇠울Søuld과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미래는 현재다〉전은 ‘긍정적으로 도래할 미래’를 콘텐츠뿐만 아니라 로컬 소재 회사와 협업한 전시 디자인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시도로 눈길을 끈다. designmuseum.dk

고전적인 느낌을 주는 덴마크 디자인 뮤지엄과 조화롭게 어울리는 전시 디자인. 조명 아래 전시대는 해조류를 활용한 소재로 제작했다.

기간 2022년 6월 19일~2023년 6월 1일
장소 덴마크 디자인 뮤지엄
전시 기획 Pernille Stockmarr
전시 디자인 Spacon & X, spaconandx.com

공간 중앙을 가로지르면서 조닝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전시대.

〈평화를 디자인하기(Designing Peace)〉전
디자인이 평화와 사회 치유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전시다. 전 세계 25개국의 디자인 프로젝트 중 40건을 선별해 실물, 모델, 인스털레이션, 지도, 이미지, 영상 등으로 제시했다. 전시는 “디자인은 안전, 건강, 그리고 서로를 존중하는 환경을 만드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디자인은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디자인은 어떻게 대립에 창의적인 관여를 할 수 있을까?”, “디자인은 평화와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진실과 존엄을 어떻게 포용할 수 있을까?”, “디자인은 불안정성에서 평화로 이행하는 과정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는 다섯 가지 질문으로 각 섹션을 구성했다. 전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전시대다. 양 끝이 높이 솟아오른 이 전시대는 측면에 전시 키 컬러인 노란색을 적용해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탈출할 때 사용하는 카누를 연상시킨다. 관람객들이 앉아서 도록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한 전시대를 중심으로 양쪽에는 대표 작품을 배치했다. 전시대 위에서 빛나는 구 형태의 작품은 2012년 콜롬비아에서 전개한 ‘크리스마스 오퍼레이션Christmas Operations’ 캠페인에 활용된 사물이다. 게릴라 용병으로 전투 중인 군인들에게 가족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집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담아 강에 띄우는 용도로 사용했다. 다른 한쪽 끝에는 건축 스튜디오 라엘 산 프라텔로Rael San Fratello의 ‘시소 장벽(Teeter-Totter Wall)’을 전시대 구조를 이용해 실제 사이즈로 설치했다. 이 프로젝트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시절 미국과 멕시코 국경 사이에 불법 이민을 막기 위해 세운 장벽을 유쾌하게 전유하는 인스털레이션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시 디자인을 맡은 미국 보스턴 기반의 건축 스튜디오 하월러+윤 아키텍처 Höweler+Yoon Architecture는 이 전시대가 전시의 주제를 잘 드러내는 디자인이면서도 작품과 시각적 연결성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cooperhewitt.org

공간 중앙을 가로지르면서 조닝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는 전시대.

기간 2022년 6월 10일~2023년 9월 4일
장소 쿠퍼 휴잇 스미소니언 디자인 뮤지엄
전시 기획 Cynthia E. Smith, Caroline O’Connell
전시 디자인 Höweler + Yoon Architecture
그래픽 디자인 Common Name, common-name.com

‘무버’ 위에서 패션쇼 런웨이를 하는 작품

〈써킷 서울(Circuit Seoul)〉전 #2 Omnipresent
〈써킷 서울〉전은 관람객과 작품의 관계를 완전히 바꿔버린 획기적인 전시 형식으로 화제를 몰고 왔다. 일반 전시장에서는 전시대 위에 작품이 올려져 있고 관람객이 동선에 따라 전시대 사이를 이동하며 작품을 관람하는 식이라면, 〈써킷 서울〉전에서는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그러니까 관람객이 앉아 있고 작품이 전시장을 활보한다. 〈써킷 서울〉전을 기획한 오아에이전시는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크리에이터들의 신작을 패션쇼 형식을 차용해 선보이는 플랫폼으로 성장하고 있다. 2021년 무신사테라스에서 첫선을 보였고, 작년 8월 루프스테이션 익선에서 두 번째로 열린 〈써킷 서울〉전은 여느 패션쇼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아티스트별 ‘컬렉션 쇼’를 시작한다. ‘무버Mover’라고 부르는 압도적인 사이즈의 컨베이어 벨트가 시간에 맞춰 작동하면 커튼 뒤에서 스태프들이 흰 장갑을 낀 채 작품을 순서대로 올려놓는다. 무버 맞은편에 앉은 관람객들은 호기심과 긴장감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다음 작품의 런어웨이를 기다린다. 그런데 〈써킷 서울〉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버’에서 작품들의 패션쇼를 지켜봤다면 다음은 ‘캡처’ 섹션으로, 관람한 작품을 주문하고 구매할 수 있는 곳이다. 칸막이로 짜인 각 선반에는 무버에서 감상한 작품이 디스플레이되어 있는데 미술관 오픈형 수장고를 연상시킨다. 마지막 ‘버퍼’ 공간은 실감형 콘텐츠를 감상하는 체험 전시 형태다. 오아에이전시의 다음 전시는 3월 24일부터 4월 8일까지 열리는 〈페이스 피스 페이스 피스〉로, 6명의 작가가 참여해 ‘마스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에도 무버에 버금가는 파격적인 전시 디자인이 기대된다. circuit-seoul.kr

‘무버’ 위에서 패션쇼 런웨이를 하는 작품과 숨 죽인 채 이를 지켜보는 관람객.

기간 2022년 8월 24~28일
장소 루프스테이션 익선
전시 기획 오아에이전시(윤영빈, 신수정)
전시 디자인 김화리(오아에이전시)
아트 디렉팅 필립 킴, p-kim.info

©우란문화재단

〈밤이 선생이다(Strolling Along the Night)〉전
황현산의 저서 〈밤이 선생이다〉에서 전시명을 따왔다. 프랑스 속담인 ‘밤이 좋은 생각을 가져오지(La nuit porte conseil)’를 의역한 제목이다. 전시는 옛사람들이 술을 즐기던 태도에서 영감을 얻어 ‘한잔의 술과 함께 푹 자면’ 나아질 거라는 위로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 전시는 ‘한국 술 문화’를 조명하는 기획 의도로 시작됐지만 의외로 전시장에선 전통주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깜깜한 밤을 연상시키는 블랙 박스 공간 한가운데에 ‘유포리아’라는 원형의 공간을 펼쳐놓고 공예가 김경찬, 박성극의 잔과 주병 등을 배치했다. 스포트라이트 조명이 작품을 비추면서 어두운 공간 속 은은하게 빛나는 작품으로 시선이 집중되는 극적 효과를 연출했다.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몰입형 인터랙티브 설치 작업을 선보이는 아트 & 디자인 스튜디오 오마 스페이스는 이번 전시에서 ‘유포리아’의 아트 디렉팅을 맡았다. “전시 오브제와 함께 한 폭의 산수화처럼 조화롭게 어울리는 감각적 체험 공간이다. 원형 테이블을 따라 걷는 관람객의 몰입적 경험을 이끌어내길 바랐다.” 유포리아를 감싸는 삼베 소재의 스크린에 붉은 칠면초가 바람에 흔들리는 영상이 투과되고, 감정을 고조시키는 잔잔한 음악이 흐르면서 시간이 정지한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신체의 움직임에 따라 360도 달라지는 뷰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 디자인이기에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전시 인증샷 중 어느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 wooranfdn.org

기간 2022년 12월 23일~2023년 2월 24일
장소 우란문화재단
전시 기획 정지영, 백승의
‘유포리아’ 아트 디렉팅 오마 스페이스, omaspace.com
그래픽 디자인 메이저 마이너리티(윤현학) tedh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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