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와 소재의 숨겨진 스토리를 발굴하다, 페루치오 라비아니

페루초 라비아니Ferrucio Laviani. 가구 디자인으로도 각광받지만, 사실 많은 브랜드가 공간 안에 브랜드의 가치를 깊이 있게 녹이고 싶을 때 이 이탈리아 디자이너의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브랜드와 소재의 숨겨진 스토리를 발굴하다, 페루치오 라비아니
자신이 디자인한 카르텔 조명 ‘가부키Kabuki’에 기댄 페루초 라비아니.

언젠가부터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큰 호응을 얻은 브랜드의 전시에서 유독 같은 디렉터의 이름이 자주 발견된다. 페루초 라비아니Ferrucio Laviani. 가구 디자인으로도 각광받지만, 사실 많은 브랜드가 공간 안에 브랜드의 가치를 깊이 있게 녹이고 싶을 때 이 이탈리아 디자이너의 사무실 문을 두드린다. 이들이 라비아니를 찾는 이유는 소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브랜드의 가치를 감각적으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소재에 대한 관심은 라비아니의 성장 배경과 관련이 있다. 그의 고향은 크레모나. 명품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고장이다. 동년배 디자이너들이 디자인 운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밀라노와 토리노, 피렌체를 중심으로 건축과 최신 디자인을 접할 때 그는 고아한 소도시에서 컨템퍼러리가 아닌 클래식으로 디자인과 조우했다. 소재와 인간의 정신이 결합한 혼이 담긴 디자인을 보고 자랐기에 제품 너머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10대 시절 크레모나 국제 바이올린 및 목공예 장인 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밀라노 폴리테크니코 대학(Politecnico di Milano)에서 건축과 디자인을 전공하고, 아킬레 카스틸리오니Achile Castiglioni와 마르코 차누소Marco Zanuso에게 사사한 후, 1983년부터 미켈레 데 루키Michele De Lucchi의 스튜디오에서 디자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리고 1991년 밀라노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설립한 뒤 그래픽, 제품, 가구, 인테리어, 건축 등 다방면에서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다루는 영역만큼 클라이언트도 다채롭다. 모로소·카르텔·카시나·폴트로나 파리우·폰타나아르테·드리아데 같은 가구 브랜드, 돌체앤가바나·미쏘니·에르메네질도 제냐 등의 명품 패션 브랜드, 삼성·파나소닉 등 전자 브랜드가 라비아니를 찾았고 그는 언제나 성공적인 결과물로 화답했다. 전천후 디자이너답게 라비아니의 작업에선 소재의 미세한 디테일 하나, 공간에 담긴 그래픽 하나까지도 전체적인 콘셉트에 충실하며 치밀하게 고심한 흔적이 묻어난다. 특히 그가 디자인한 전시 공간에서는 창의적 구조의 연출, 시각적 강렬함 등 그래픽적 요소가 돋보인다. 일례로 2011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 기간에 로 피에라 카르텔 전시장에서 선보인 〈디자인 아이콘The Design Icons〉의 경우 카르텔의 우수한 플라스틱 소재 기술과 디자인 능력을 컬러와 소재 스펙트럼으로 표현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9년에는 창조적 연출로 다소 구식처럼 느껴졌던 포스카리니의 브랜드 이미지를 쇄신했다. 사각의 유리 조각을 다각도로 결합한 조명 오브제처럼 공간을 디자인한 것이다. 두 전시 모두 조형에 비해 그간 상대적으로 간과되던 소재 자체의 매력을 부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올해 그가 독일 욕실 브랜드 게베릿Geberit의 전시 디렉터를 맡아 연출한 〈미래 흐름(Future Flow)〉전도 마찬가지다. 욕실 벽 뒤로 숨어 있는 배관을 시각화한 조형물은 ‘소재 스토리텔링의 장인’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디자인계에 새롭게 소재의 가치가 대두된 요즘 푸오리 살로네 브레라 지역의 게베릿 전시장에서 그를 만났다. laviani.com
인터뷰 여미영(D3 대표) 정리 이경희 객원 기자

페루치오 라비아니 FERRUCCIO LAVIANI
“ 보이지 않는 것을 꺼내는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올해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미래 흐름〉전이 많은 관심을 받았다. 프로젝트를 진행한 소감이 궁금하다.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다소 의아했다. 사실 욕실 브랜드와 협업이 처음이기도 했고, 욕실이라는 제품 자체가 내겐 낯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디자이너들이 욕실 회사에 대해 일반 가구 회사보다 관심이 적고 무지한 것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의뢰를 받아들였다. 욕실 공간에 대한 리서치와 함께 게베릿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 브랜드의 최고 가치는 욕실 가구가 아닌 벽 뒤에 숨겨진 무엇이라는 걸 깨달았다. 치밀한 배관 설계와 수자원 계획 등 과학적인 영역 말이다.

이탈리아 디자이너로서 드물게 목공예를 공부했기 때문인지 누구보다 소재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중요시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배관 혹은 그 안의 물이라는 소재와 〈미래 흐름〉전의 관계를 듣고 싶다.

보이지 않는 것을 꺼내는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전시에서는 말 그대로 욕실 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소재, 벽 뒤에 숨어 있는 배관을 사용했다. 간단하고 평범하게, 설비처럼 보이는 욕실 가구 뒤에 숨은 혁신. 게베릿 엔지니어들의 치밀한 연구를 시각화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기능성만 고려한 밋밋한 산업적 오브제인 배관을 설치물로 활용하겠다는 내 아이디어에 게베릿이 당황했다. 흔히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보게 되는 화려한 전시 연출과 전혀 다른 논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설명을 듣고 적극적으로 동의해줬다. 이 전시장에서 선보이는 신기술과 신소재의 화려한 욕실 가구와 배관 설치물은 이질적이면서도 잘 어우러진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조화가 게베릿의 핵심 가치라고 생각한다. 배관을 다이아몬드 커팅같이 정밀하고 완벽한 구조로 구현하면서 게베릿의 섬세한 기술과 전문성을, 그리고 그 배관 안으로 흐르는 물의 움직임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게베릿이 창조해온 미래 흐름이다.

보피Boffi에서 2013년 선보인 목조 가구 ‘좋은 진동(Good Vibrations)’.
전시명에 사용한 단어 ‘Flow’는 몰입과 흐름 두 가지를 의미한다. ‘게베릿의 몰입’과 ‘게베릿 혹은 물 에너지가 만드는 미래의 흐름’이라는 중의적 표현 같다. 당신의 디자인에서는 항상 장인과 전통 기술에 대한 예찬이 드러나는데, 이번 포스터에서 엔지니어를 주인공으로 한 것을 보면 여기서는 게베릿의 엔지니어가 그 장인인 것 같다.

그렇다. 보이지 않는 것의 시각화, 보이는 것 이외의 영역을 관람객이 상상하게 만드는 것을 난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린 시절 목공예를 배웠을 정도로 장인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다. 난 디자이너이지만 언제나 장인의 세계를 동경하고 존경한다.

소재, 장인 정신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깊이 있는 성찰은 고향 크레모나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 같다.

내가 자란 크레모나는 특별한 곳이다. 인구가 7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매우 오래되고 조용한 소도시이지만 도심 곳곳에 외국인이 넘쳐난다. 모두 바이올린에 매료되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외국인 전문가들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대도시에서도 그렇게 많은 외국인 전문가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인구 비율로만 따지면 이탈리아에서 크레모나만큼 국제적인 곳도 없지 않나 싶다. 단지 몇백 년 전 만들어진 바이올린 하나에 매료되어 끊임없이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 그들이 홀린 듯 바이올린을 예찬하는 모습이 어린 내 눈에 신비로웠다. 소재, 목공예, 디자인의 힘에 대해 처음 자각한 순간이다. 수 세기가 지나고 기술이 진보해도 재현할 수 없는 완벽한 과거에 대한 탐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독특한 환경이 주류 문화에서 다소 떨어진 도시에 사는 어린 나에게는 훌륭한 배움의 터전이 되었다.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다양한 외국인과 어울리면서 더 큰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자랐고 말이다.

2019년 포스카리니의 밀라노 디자인 위크 전시장. 투명한 아크릴과 강렬한 로고의 파사드로 무라노 유리를 활용해 혁신적 조명을 디자인하는 브랜드의 가치를 표현했다.
이후 밀라노로 이주해 건축과 디자인을 공부하며 많은 디자이너와 교류했다. 특히 영감을 준 디자이너가 있었나?

내 또래의 많은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그러하듯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s와 아킬레 카스틸리오니의 디자인을 보며 많은 영감을 받았다. 소트사스와 개인적인 인연은 거의 없었지만 카스틸리오니에게는 대학에서 직접 배울 기회가 있었다. 공예 중심의 사고를 가졌던 나에게 산업과 국제화에 대한 이해를 깨우쳐준 인물들이다.

당신의 디자인을 보면 공예와 산업, 전통과 현대, 심미성과 기능성같이 대립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의 조화가 훌륭하다. 디지털 이미지가 연상되는 목가구 ‘좋은 진동(Good Vibrations)’을 보면 특히 그러하다.

사실 나는 산업이라는 측면을 매우 좋아한다. 게베릿 전시에서도 배관이라는 산업적 구조물을 활용할 수 있어 기뻤다. ‘좋은 진동’은 유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전통 목공예 가구를 마치 강한 진동에 의해 흔들리는 것처럼 이미지를 변조해 디자인한 것이다. 전통을 왜곡시킨 이미지이기에 전통 미학을 벗어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 가구의 제작에는 탁월한 전통 공예 기술을 연마한 전문 공예인의 기술이 접목되었다. 디지털화된 이미지를 결합하여 디자인 과정에서 산업화되고 미래적인 기법을 활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통 공예의 힘을 부각했다. 장인 기술을 전통 그 자체의 방식을 복원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만, 계속해서 발전하는 기술을 통해 개선되고 발전하는 현재성을 담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장인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재생 플라스틱을 활용한 카르텔 조명 ‘차(Tea)’.
다방면에서 전천후 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있다. 다양한 주제와 대상의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당신만의 디자인 프로세스가 궁금하다.

내 디자인의 시작점은 어떤 이미지인 것 같다. 보통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대상에 대한 리서치를 진행하는데, 먼저 어떤 시각적 이미지가 떠오른다. 이건 설계처럼 구체적이고 계획적인 이미지라기보다 말 그대로 어떤 그래픽적 이미지다. 때로 간단한 드로잉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진 콜라주와 드로잉이 섞여 만들어지기도 한다. 먼저 이 이미지를 추출하고 그다음 이것을 대상이 되는 제품이나 공간에 맞춰 입체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프로세스 때문인지 공간 작업의 결과물도 일반 건축가의 형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이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때 한층 직접적인 것 같고, 실험적인 결과물로 더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목재, 유리, 금속, 플라스틱 등 다양한 물성의 소재를 대상으로 하면서 항상 그 소재에서 볼 수 없던 독특한 형상을 구현해내는 부분이 이채롭다.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카르텔의 재생 플라스틱 조명 ‘차(Tea)’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소재나 디자인이 있는지 궁금하다.

‘차’ 조명은 플라스틱이라는 소재로 상상하지 못하는 형태, 혹은 재생 플라스틱이라는 어감이 주는 윤리성, 혹은 어떤 고루한 정형성에서 완전히 탈피한 디자인을 하고자 했다. 그 결과 일반 조명의 모습이 아닌 작은 오브제의 형상을 띠게 되었다. 조명 기능을 충분히 갖추고 제조 과정이 산업적으로 적당한 효율성을 갖추면서도 예술적 조명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플라스틱이라는 소재가 주는 유연함과 자유로움을 표현하면서도 ‘재생’이라는 편견을 잊게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사용하는 소재에 따라 디자인 전략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도전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을 의뢰받을 때 설렌다. 물론 이전부터 선호하던 소재를 다루거나 가구를 디자인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결합된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만큼 내가 보지 못했던, 알지 못하는 미지의 것을 만나는 것,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런 프로젝트를 운명적으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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