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조형 감각을 벼리는 방법, 이상철

이상철에게는 한국 최초의 잡지 아트 디렉터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디자인 조형 감각을 벼리는 방법, 이상철
1944년생으로 한국산업은행에 입사한 1962년부터 디자이너로 활동하기 시작해 1973년 이가솜씨 어소시에이츠(지금의 디자인 이가스퀘어)를 창립했다.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은 물론 월간 〈디자인〉 1980년 3월호 리뉴얼 당시 아트 디렉팅을 맡으며 편집 디자인의 새 지평을 열었다. 2011~2016년 예올 ‘올해의 장인’ 프로젝트 총감독, 2011~2012년 공예트렌드페어 예술 감독, 2016년 대한민국무형문화재대전 총감독을 역임했고 2020년 KIDP 디자이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이상철에게는 한국 최초의 잡지 아트 디렉터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가 상품 개발, 전시, 공간 디렉팅 영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점, 그리고 그 이면에는 디자이너로서 스스로 지닌 감각을 확인하기 위한 꾸준한 수집 활동이 있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서울 필동에 위치한 디자인 이가스퀘어 사무실은 여느 디자인 박물관 수장고가 부럽지 않다. 해외 디자이너의 마스터피스부터 전통 공예품, 일상용품이 각종 디자인 서적과 함께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스푼, 포크, 나이프, 촛대, 가위, 집게 등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작은 물건을 주로 모은다.
사무실에 보유하고 있는 물건의 양이 엄청나다.

나는 전문 컬렉터는 아니다. 오해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체계적으로 뭔가를 모으는 것은 아니고 그때그때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수집한다. 유명한 디자이너의 작품도 있지만 누가 디자인했는지 모르는 작은 옷핀이나 핀셋도 모은다. 오렌지 컬러 상자에 들어 있는 이케아 픽사Fixa 공구는 내가 좋아하는 물건 중 하나다.

어떤 계기로 수집을 시작했나?

한국산업은행에 입사한 1962년, 해외에 한국 산업의 현황을 소개하는 책자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전문적인 디자인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국내에는 마땅히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었기에 전 세계 산업 은행에 손편지를 써 보냈다. 홍보 책자를 만드는 데 레퍼런스로 삼을 자료를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는데 놀랍게도 많은 은행에서 회신이 왔다. 그들이 보낸 인쇄물을 참고해서 1년 뒤 완성한 결과물이 〈A Decade of Korean Industry〉다. 이후에도 계속 해외 자료를 찾아보면서 지면 레이아웃과 편집 디자인을 참고해 나만의 감각을 기르고자 했다.

디자인 이가스퀘어 사무실에 있는 군용 책상 겸용 서랍장. 그 위에 카스틸리오니의 메차르도 체어가 놓여 있다.
책뿐만 아니라 가구도 수집 품목에 들어 있다.

편집 디자인부터 가구, 공간 등 관심사가 확장된 것은 얼마 전 작고한 엘리건스 인티어리어스(지금의 계선) 설립자 장충섭 회장의 영향이 컸다. 가구 브랜드 놀Knoll의 몇몇 가구에 대한 국내 생산권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 사무실에서 바르셀로나 체어, 임스 체어, LC 체어 시리즈 등을 접했다. 거기서 〈도무스〉 잡지를 뒤적이며 사고 싶은 가구를 점찍어두곤 했다. 그러다 장충섭 회장을 통해 한국브리태니커 한창기 대표를 알게 됐고, 그 인연으로 한국브리태니커로 이직해 〈뿌리깊은나무〉 창간 준비를 하게 됐다. 1970년대 초는 아직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기 이전인데 그 시절 출판인 20~30명이 모여서 일본 출장을 다녀왔다. 일본 서점에는 해외 디자인 서적이 많아 캐리어 가득 담아 왔던 기억이 있다. 또 한창기 대표가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면 책과 문구류를 한 보따리 사다 주곤 했다.

가장 아끼는 수집품은 무엇인가?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물건은 빈티지 군수용품이다.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기능을 순수하게 드러내는 형태가 마음을 끈다. 또 손으로 만든 공예품도 좋아한다. 〈뿌리깊은나무〉 아트 디렉터로 일하던 시절인 1977년, 보성 잎차를 상품화하는 작업부터 시작해 장인과 협업해 찻그릇 세트, 백자 칠첩반상기, 유기 칠첩반상기, 다양한 옹기 제품을 현대적으로 개발한 일은 평소 전통문화와 공예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잉고 마우러의 ‘골든 리본’을 설치한 씨마크 호텔 로비. 사진 제공 디자인 이가스퀘어
전주 ‘온Onn’ 브랜드 론칭을 지휘하고 여러 기관, 단체와 협업해 전시를 기획하는 등 공예 영역에서 굵직한 활동을 해온 것도 그 영향일 것이다.

지금껏 다양한 자리에서 한국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해왔다. 사람들은 내가 〈뿌리깊은나무〉 아트 디렉터라는 것은 기억하지만 미국 뉴욕 UN 본부에서 열린 〈한국전통공예전〉, 미국 LA 한국문화원 민속관 리뉴얼, 폴란드 바르샤바 한국문화원 개관전 등 각종 전시를 디자인 이가스퀘어가 기획하거나 디자인 총괄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2011~2012년 공예트렌드페어 총감독을 맡았을 당시에는 민예, 그리고 지역의 전통 공예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자 평소 모아둔 공예품을 대거 공개하기도 했다.

디터 람스를 조명한 대림미술관의 〈레스 앤드 모어Less and More〉전과 DDP 개관 특별전 〈엔조 마리 디자인〉 개최를 성사시키기도 했다.

〈레스 앤드 모어〉전은 당시 프랑크푸르트 응용예술박물관(MAK Frankfurt) 학예실장이었던 클라우스 클렘프Klaus Klemp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디터 람스 순회전이 오사카, 도쿄, 런던,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기로 계획되어 있었는데 서울에 유치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엔조 마리 디자인〉전은 일본의 건축가이자 전문 컬렉터인 나가이 게이지의 도움이 컸다. 엔조 마리조차 자신보다 그가 작품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인정할 정도였으니까. 나가이 게이지는 처음에는 작품 대여를 주저했지만 우리 사무실에 방문해 내가 모아놓은 수많은 엔조 마리의 작품을 보고는 마음을 바꿨다. 아마도 내가 자신과 닮은 수집광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웃음) 지금껏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디자이너의 마스터피스로는 어떤 것이 있나?

‘백설공주의 관’ 등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브라운 제품부터 백열전구에 날개를 단 잉고 마우러의 루첼리노 조명, 엔조 마리의 티모르 캘린더 블랙 & 화이트, 아킬레 카스틸리오니의 메차드로Mezzardo 체어, 임스 부부가 디자인한 군용 부목과 임스 몰디드 플라이우드 라운지체어 등 20세기 디자인 제품이 주를 이룬다. 1994년 장 누벨이 파리 까르띠에 재단을 위해 디자인한 스위블링Swiveling 캐비닛과 테이블, 책장 등이 있다.

강릉에 위치한 씨마크 호텔 로비에도 잉고 마우러의 대형 작품이 공중에 걸려 있다. 그간 수집하면서 쌓인 안목이 빛을 발했다.

해변을 향해 전망이 탁 트여 있는 씨마크 호텔 로비에는 잉고 마우러에게 의뢰한 대형 조명을 설치했다. 잉고 마우러의 작품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작품 ‘골든 리본’의 탄생 배경이다. 그 아래에 16m 길이의 긴 우드 테이블을 배치해 바다를 보며 사색에 잠길 수 있도록 했다. 사무실에 씨마크 호텔 로비의 미니어처 모형을 전시해놓았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결과물이다.

이상철에게 아카이빙이란?

디자인 조형 감각을 벼리는 작업이다. 작은 것, 일상적인 것, 누가 디자인했는지 모르는 것에서도 배움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디자이너가 안목을 키우려면 주변의 디자인을 잘 관찰하고 좋은 것을 골라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글 서민경 기자 인터뷰 도움 강승연 한국디자인사학회 부회장
사진 박순애(스튜디오 수달)

“디자이너가 안목을 키우려면 주변의 디자인을 잘 관찰하고 좋은 것을 골라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44호(202310)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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