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붐> 공동 설립자의 역사, 비르기트 로만(Birgit Lohmann)

세계 최초의 디자인·건축 웹진 〈디자인붐Designboom〉의 공동 설립자 비르기트 로만 이야기다.

<디자인붐> 공동 설립자의 역사, 비르기트 로만(Birgit Lohmann)
독일 함부르크 출신으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산업 디자인을 공부했다. 이때 훗날 남편이자 〈디자인붐〉 공동 설립자가 되는 마시모 미니Massimo Mini와 만난다. 〈디자인붐〉을 시작하기 전 그는 아킬레 카스틸리오니Achille Castiglioni, 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 엔초 마리 Enzo Mari, 렌초 피아노Renzo Piano 등의 스튜디오에서 디자이너와 제품 개발 매니저로 일했다. 1999년 마시모 미니와 설립한 〈디자인붐〉에서 25년 가까이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거대 온라인 매거진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2022년 아키토닉 아크데일리Architonic ArchDaily가 〈디자인붐〉을 인수했고 이듬해 2월 편집장 자리를 내려놓았다.

깊게 파인 주름에는 관록이 각인되어 있다. 손목 위에서 빛나는 금빛 뱅글과 깃털처럼 가벼운 원피스에선 여유가 흐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20년 넘게 지켜온 편집장 자리를 내려놨건만 여전히 생기 넘치는 ‘현역의 눈빛’이다. 세계 최초의 디자인·건축 웹진 〈디자인붐Designboom〉의 공동 설립자 비르기트 로만 이야기다. 웹 시장이 움트던 1999년에 시작한 〈디자인붐〉은 2023년 기준 350만 명 이상의 독자를 거느린 거대 플랫폼으로 성장했다. 2007년 〈타임〉지는 ‘Top 100 Design Influencer’에 〈디자인붐〉의 이름을 올렸고, 〈포브스〉는 “건축을 위한 모든 것을 위한 종착지”라고 소개했다. 킥스타터 공동 설립자 찰스 애들러Charles Adler가 “〈디자인붐〉이 없었다면 킥스타터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이니 디자인계를 넘어 크리에이티브 비즈니스 신 전반에 미친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있다. 이 모든 역사의 출발선상에 있던 비르기트 로만이 지난 10월 서울디자인어워드 2023 심사위원이자 서울디자인컨퍼런스 특별 좌담 패널로 한국을 찾았다. 디자인 미디어 생태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그와 디자인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해 이야기 나눴다.
글 최명환 편집장 인물 사진 한도희(스튜디오 얼리스프링)

1999년 〈디자인붐〉 메인 페이지. 제호와 레이아웃의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다.
1999년은 웹 기반 비즈니스 종사자에게 여러모로 각별한 한 해였습니다. 웹 2.0의 원년이기도 했고, 한국에서는 네이버, 다음 등 대형 포털이 본격적으로 서비스를 시작한 해이기도 했죠. 〈디자인붐〉이 태어난 이탈리아는 어땠나요?

온라인 비즈니스를 시작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가정용 PC가 보편화되기 전이었고, 일터에선 컴퓨터를 사용했지만 업무 시간에 웹진을 들여다볼 정도로 여유가 있진 않았어요. 알다시피 디자인 매거진에선 텍스트만큼이나 이미지가 중요한데 전화기에 모뎀을 연결해 인터넷을 사용하던 시절이라 사진 한 장 띄우기도 쉽지 않았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디자인붐〉도 초창기에는 정말 독자•가 극소수였습니다.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전무하다 보니 온라인 태생의 매거진을 운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죠. 투자를 받는 것도 녹록지 않았고요.
•비르기트 로만은 인터뷰에서 ‘청중(audience)’이라고 표현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본지에서는 ‘독자’로 번역했다.

그렇다면 온라인 웹진을 본격적으로 사업화하는 데 심리적 부담이 크지 않았나요?

솔직히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이미 이탈리아에서 디자이너이자 아트 디렉터로 20년 정도 활동했기 때문에 이 사업에 생계를 걸 필요는 없었습니다. 약간은 취미 생활에 가까웠다고 할까요?(웃음) 이제 갓 베타 버전을 출시한 구글 창업자들을 비롯해 온라인 비즈니스를 하던 사람들끼리 사적으로도 교류하던 시기였어요. 당시 많은 사람이 〈디자인붐〉을 미국 웹진이라고 생각했어요. 기사가 영어로 되어 있기도 했고, 당시 인터넷 비즈니스가 가장 활성화된 나라가 미국이었기 때문이죠. 그만큼 시장이 작았습니다. 하지만 인터넷 붐이 일면서 〈디자인붐〉도 단기간에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운도 어느 정도 따랐던 셈이죠. 어떤 마음가짐으로 〈디자인붐〉을 시작했는지 궁금하군요. 그저 훌륭한 디자이너를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오랫동안 필드에서 활동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디자이너가 무척 제한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타 반열에 올라선 디자이너 외에도 잠재력 있는 플레이어가 많았는데 말이죠. 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좀 더 표출하고 싶었어요. 이탈리아 국경 밖으로까지. 소통의 외연도 넓히고 싶었습니다. 디자이너든 건축가든 너무 자기 영역 안에서만 소통한다고 느꼈어요. 우리는 변호사나 치과 의사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고 싶었습니다.

이미 이탈리아에는 〈도무스〉 〈인테르니〉 등 저명한 종이 매체가 존재하던 상황이었죠. 그것과 차별화하는 전략이 필요하지 않았나요?

우리는 디자이너이지 저널리스트가 아니었습니다. 건축가이지 저널리스트가 아니었죠. 아티스트이지 저널리스트가 아니었습니다. 요컨대 디자인 프로세스와 생태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단 뜻입니다. 플라스틱 체어가 어떤 공정을 거쳐 탄생하는지, 압형에 드는 비용이 얼마인지 꿰고 있었죠. 보통 저널리스트가 그렇게까지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기사를 쓰진 못하죠. 무엇보다 우리는 디자인 저변에 깔린 배경을 설명할 수 있었어요. 이것이 〈디자인붐〉의 차별점이었습니다. 기존 매체가 의견을 개진하는 데 방점을 뒀다면 우리는 지식 공유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기사 자체가 일방적인 메시지 전달보다 대화에 좀 더 가까웠죠.

2009년 〈디자인붐〉 메인 페이지. 제호와 레이아웃의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월 편집장 자리를 내려놓으면서 비코 마지스트레티, 아킬레 카스틸리오니, 브루노 무나리, 엔초 마리 등 디자인 거장들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디자이너로서 그들과 협업했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디자인붐〉도 그 자체가 하나의 디자인 프로젝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부 프로세스를 매체에 그대로 적용하기도 했죠. 그런데 사실 디자인 거장들이 우리에게 늘 호의적인 건 아니었습니다. 특히 이미지 저작권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기술에 내재된 위험 요소를 경계해야 한다고 누누이 조언해주었죠. 돌이켜봤을 때 그들에게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디자인붐〉의 성장기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군요.

2003~2004년쯤이었습니다. 매체 인지도가 올라가고 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매체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디자인 작업은 하지 않고 미디어를 성장시키는 데 초점을 맞췄죠. 통계 자료를 통해 독자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게 도움이 됐습니다.

매체의 영향력이 글로벌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요소도 늘어났을 것 같습니다.

〈디자인붐〉이 국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여러 나라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했습니다. 인터넷 보급 실정을 감안해 최선의 기술을 적용해야 했고 문화의 다양성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독일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저는 유럽의 디자인 산업이나 문화는 잘 알고 있었지만 한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습니다. 콘텐츠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감이 오지 않았죠. 그래서 최대한 여러 나라의 전시와 디자인 마켓에 참가하며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온라인 미디어라고 웹상에만 머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무엇이었죠?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방식 말이에요.

단순함과 커뮤니케이션입니다.

2016년의 〈디자인붐〉 메인 페이지. 제호와 레이아웃의 변천사를 확인할 수 있다.
온라인 미디어의 미덕은 역시 빠른 발행 속도와 콘텐츠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 채워갔는지 궁금하네요.

처음에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미디어였기에 우리는 자체적으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글을 쓰기도 하지만 필요하면 사진 촬영도 직접 해야 했고요. 웹사이트에 들어가는 그래픽 요소도 만들었습니다. 아웃소싱 비용을 최소화하는 게 관건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미디어가 성장하면서 그런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됐습니다. 이때 우리가 취한 성장 전략은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디자이너가 미디어에 접촉하길 원했고 자신들의 디자인이 소개되길 바랐죠. 종이 매체에 한 번 소개되려면 3개월가량 걸리지만 웹진은 즉각적인 반응이 가능합니다. 제보하면 일주일 안에 콘텐츠가 발행되니 속도 면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죠. 독자 제보 시스템도 도입했습니다. 독자들이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직접 사진과 설명 글을 정리해 업로드하는 방식입니다. 하루에 50개에서 100개까지 올라오는데 그중 10~20개를 선정해 에디팅 후 콘텐츠를 발행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거의 실시간으로 목도할 수 있다는 게 이 시스템의 장점입니다.

물론 큐레이션과 에디팅이 들어가지만, 그럼에도 콘텐츠 질의 저하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군요. 어찌 됐든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것은 위험이 따르니까요.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내 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죠. 제보받은 프로젝트 대부분 수준이 상당했거든요. 우리가 전통적인 콘텐츠 제작 방식을 고수했다면 알 수 없었을 실력 있는 디자이너도 발굴할 수 있었기에 실보다 득이 컸습니다. 게다가 〈디자인붐〉에서 선행적으로 발행하는 콘텐츠가 많다 보니 다른 매체에서 이미지를 제공받기 위해 저희에게 연락하는 경우도 생겼습니다. 자연스레 프레스 에이전시 같은 역할까지 하게 되었죠. 심지어 〈타임스〉 같은 저명한 매체도 저희에게 연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콘텐츠 제공 방식에 창조적 파괴를 가져와 디자이너와 타 매체 모두에게 도움을 준 셈입니다. 웹사이트 내 ‘Shop’ 탭도 같은 방식으로 운영합니다. 수수료 없이 운영하는데 솔직히 아직까진 기대에 미치지 못했어요. 아무래도 아마존이나 엣시Etsy 같은 플랫폼이 이미 대중화되어 있는 만큼 활성화되기까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 보급과 맞물려 콘텐츠를 모바일로 소비하는 비중 역시 늘었습니다. 이런 변화에 발맞춰 콘텐츠를 보여주는 방식에도 변화를 줘야 했을 것 같습니다.

〈디자인붐〉은 현재 건축가와 디자이너 외에도 엔지니어 등 다양한 배경의 독자들이 있습니다. 성비로 따지면 50 대 50인데 개인적으로 여기에 굉장히 큰 의미를 둡니다. 미디어 초창기만 하더라도 독자가 대부분 남성이었기 때문이죠. 본론으로 돌아와 현재 모바일 접속자 수는 PC 접속자 수를 넘어서 전체의 60% 정도를 차지합니다. 〈디자인붐〉은 2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리뉴얼을 합니다. 대대적인 변화는 아니고 독자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작은 개선이죠. 모바일 중심으로 재편하면서부터 콘텐츠 구성 방식도 바꿔야 했습니다. 기사는 좀 더 간결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작성했고, 이미지 비중을 대폭 늘렸습니다. 시장의 변화에 맞게 미디어가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지난해 아키토닉 아크데일리가 〈디자인붐〉을 인수해 화제가 됐습니다.

〈디자인붐〉, 아키토닉, 아크데일리로 이뤄진 ‘DAAily’는 현재 스위스의 미디어 그룹 NZZ(Neue Zürcher Zeitung)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룹의 모태가 되는 일간지는 프랑스혁명 이전에 창간해 역사가 유구하죠. 레거시 미디어의 선구자였던 NZZ와 온라인 미디어의 선구자 격인 〈디자인붐〉은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수년 전부터 이미 여러 차례 인수 건을 협의했지만, 당시에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미디어 시장의 지각변동이 일어나면서 니치한 시장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서울디자인컨퍼런스 특별 좌담에서 발표 중인 비르기트 로만. 이날 행사에는 디자인하우스 이영혜 대표, 일본의 건축가 반 시게루가 함께 했다.
변한 건 미디어만이 아닙니다. 디자인계도 큰 변화를 겪었죠. 20여 년간 미디어를 운영하면서 감지한 변화에 관해 이야기해볼까요?

너무 방대한 내용이네요.(웃음) 지난 50년간 우리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이야기하는 것만큼 거대한 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딱 한 가지 꼽으라면 역시 국제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탈리아는 자국 시장만 보면 작은 시장이지만 국제적으로 무대를 넓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산업과 시장 모두 국제화된 셈인데 이에 따라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좀 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성향을 띠게 된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좀 더 주관적으로 디자인을 풀어갔죠. 하지만 무조건 객관적 지표가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창작자 입장에선 자기 작업에서 무엇을 우위에 둬야 할지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보편적이고 객관화된 룰을 따를지, 자기 내면의 목소리와 감각을 믿을지 말이에요. 둘 사이에 우열을 가릴 순 없습니다.

현재 디자인계의 변화 중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지속 가능성입니다. 이번 서울디자인컨퍼런스 특별 좌담의 주제도 지속 가능성이었던 만큼 이에 대한 생각도 듣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과잉 생산의 덫에 걸려 있었습니다. 맹목적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지속 가능성이 낮아졌죠. 20세기 후반에 생산하던 플라스틱 의자가 대표적입니다. 당시에는 아름답고 혁신적이며 미래지향적이라고 여겼지만 지금 플라스틱 의자를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들어 리사이클링 제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 과연 이것이 근본적으로 지속 가능한지 저는 조금 의문입니다. 15년 전쯤 이와 관련된 연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재활용에 드는 비용이 상당하고 품질 역시 떨어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코카콜라가 리사이클링에 소극적이라고 비판하지만, 기업 운영자 입장에선 생산 단가나 품질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쉽지 않은 선택일 것입니다. 저는 비관론자가 아닙니다. 다만 이런 불편한 진실도 마주해야 궁극적인 변화가 일어난다고 봅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관점의 변화라고 봅니다. 앞서 산업과 시장 둘 다 국제화되었다고 말했죠. 이탈리아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생산한 물건을 소비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탄소발자국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지속 가능성을 저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부터 바꿔야 합니다. 또 거대한 변화가 아니더라도 작은 실험과 성공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작은 단위의 성공이 모일 수 있도록 하고, 다른 산업에서도 이를 참고하며 지속 가능성의 크기를 키워나가야 합니다.

편집장직을 내려놓은 당신의 다음 스텝이 궁금합니다.

편집장을 그만둔 지 몇 달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그동안 너무 쉼 없이 달려왔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비슷한 시기에 CEO 자리에서 내려온 마시모 미니와 함께 느리게 흘러가는 삶을 충분히 즐기고 있습니다.(웃음) 하지만 완전히 업계를 떠난 것은 아닙니다. 공식적으로는 〈디자인붐〉을 떠났지만 여전히 고문으로 여러 도움을 주고 있죠. 동시에 세계 곳곳을 누비며 우리의 이야기를 알리고 있고요. 향후 2~3년 정도는 이런 일을 계속할 것 같습니다. 여전히 저는 다양한 문화와 역사, 공예에 관심이 많아요. 누가 아나요? 이렇게 꾸준히 관심을 두다 보면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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