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영국적인, 가장 현대적인 조너선 반브룩
지난 9월 롯데월드타워의 브랜드 아이덴티티 프로젝트를 위해 한국을 찾은 조너선 반브룩을 만났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디자이너로서 각 시기마다 어떻게 적응하며 활동했는지 그 비법을 물었다
“디자이너에게 새로운 프로젝트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반응하는 것.”
서로 별개의 분야라고 할 수 있는 그래픽 디자인과 곤충 분류학은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다. 종들의 차이가 아주 미세해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만 한다는 점과 전문가만이 어떤 종이 멸종 위기에 처했는지를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 그렇다. 두 분야 모두 적응과 진화는 다소 느리게 진행되며 둘 다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 이들이 선택할 만한 직업도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조너선 반브룩(Jonathan Barnbrook)은 조금 특별한 존재다. 그와 시대를 함께한 유명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서서히 장식장 속 표본처럼 되어가는 지금, 얼마 전 그가 디자인한 영국 뮤지션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새 앨범과 바이러스 폰트사에서 출시한 서체 독트린(Doctrine) 등은 여전히 혈기 왕성한 디자이너임을 자랑이라도 하듯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지난 9월 롯데월드타워의 브랜드 아이덴티티 프로젝트를 위해 한국을 찾은 조너선 반브룩을 만났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디자이너로서 각 시기마다 어떻게 적응하며 활동했는지 그 비법을 물었다. 인터뷰·정리: 김지석, 인물 촬영: 한도희(스튜디오 얼리 스프링), 담당: 박은영 기자
가장 최근 작인 데이비드 보위의 30번째 앨범 <넥스트 데이>의 재킷과 포스터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이 트위터에서 자신만의 <넥스트 데이> 커버 패러디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기대치 않았는데 반응이 좋아 기쁘다. 지면 가운데 흰색 정사각형만 유지한다면 누구나 다른 디자인을 적용해 변형시킬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다. 이런 디자인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클라이언트의 용감한 선택, 즉 데이비드 보위의 안목이 수준 높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넥스트 데이>의 콘셉트와 디자인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했고 그 과정에서 200개가 넘는 시안이 나왔다. 수많은 논의 끝에 선택한 것이 ‘가장 디자인되지 않은(undesigned)’ 디자인이다. 요즘 음반 디자인은 아이튠즈 속 작은 사각형 섬네일이 가장 중요한 디자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데이비드 보위는 이 프로젝트를 단순한 앨범 디자인이 아니라 특별한 이벤트처럼 만들고 싶었다. 앨범의 비주얼 콘셉트는 단순히 앨범뿐만 아니라 수많은 곳에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대표 작들은 색채와 그래픽적 요소가 매우 강렬하고 도발적이었다. 반면 <넥스트 데이>는 지금껏 보여준 당신의 스타일에서 탈피했다. 앞으로 당신이 계속 추구하고 싶은 방향인가?
<넥스트 데이>가 그런 인상을 주었다니 일단 성공한 것 같다. 나의 디자인이 점점 단순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맞다. 한때 나의 디자인은 매우 강렬하고 감정적이며 표현주의에 가까웠다. 하지만 디자이너에게 새로운 프로젝트란 언제나 이전에 했던 결과물들과 현재 살고 있는 시대에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난 내 디자인이 구식처럼 보이는 것이 싫다. 늘 시대가 요구하는 디자인을 선보이며 진화하고 싶다.
내년에 완공될 123층 높이의 롯데월드타워의 브랜딩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사실 ‘브랜딩’은 꽤 수상한 단어인 것 같다. ‘디자인 에이전시’라고 부르던 회사들이 어느 날 갑자기 ‘브랜딩 에이전시’라고 말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브랜드’라는 단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는 것 같다. 하지만 시장에서 우리가 하는 일을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내가 브랜딩한 롯폰기 힐스를 예로 들면 ‘우리가 풀어볼 가치가 있는 흥미로운 문제인가?’라는 질문에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시장조사나 기업 아이덴티티를 이해해야 한다는 규칙 같은 건 크게 상관없었다. 남들과 다른 해결책을 원하는 회사들이 우리를 찾아온다. 나는 그것을 해결해주는 게 바로 마케팅 전략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은 디자이너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일 뿐이다.
당신은 학창 시절 영감을 얻기 위해 헬게이트 묘지(Hellgate Cemetery)를 자주 찾았고 그것이 타이포그래퍼로서 당신만의 리서치 방법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묘지는 디자인계에서 무시하는 주제 중 하나다. 런던에는 빅토리아 시대에 건립한 7개의 큰 묘지가 있는데 그 묘지들의 묘비에는 모두 아름다운 서체로 가득하다.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묘지는 여자친구와 함께 데이트하기 좋은 낭만적인 장소이다. 삶의 유한함, 문명의 쇠퇴와 폐허, 그리고 대량생산품에 반하는 개인화된 공간이라는 것이 매력적이다.
묘지 방문은 매우 독창적인 리서치 방법임에 틀림없다. 당신이 영국인이라는 사실이 서체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다른 사람의 디자인을 보고 영감을 얻는 것은 낡은 방식이다. 그건 그저 중고일 뿐이다. 특히 요즘처럼 인터넷을 통해 여러 나라의 정보를 쉽게 접하고 전 세계의 디자인 수준이 비슷해지는 시점에서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디자인한 메이슨(Mason) 서체를 예로 들면 그건 오직 런던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인터넷 덕분에 세계 어디에서든 일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난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당신이 현재 살고 있는 환경에서만 받을 수 있는 에너지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디자인을 통해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2000년에 발표한 퍼스트 싱 퍼스트 선언문(First things first manifesto)이나 최근 런던 오큐파이(occupy London)의 익명 공모전에서 당신의 디자인이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공식 로고로 선정되었다. 디자이너로서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장 경제 시스템이 지금처럼 영원히 지속될 순 없을 것이다.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그렇다. 하지만 부정적인 방향이더라도 어떤 시스템이 오래 지속되면 사람들은 그 틀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런던 오큐파이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지금 사회에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운동이었다. 사람들은 이 시위가 노숙자나 노동자들이 주도한 운동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누가 시위를 일으켰든 그게 무슨상관인가? 우리 모두가 진작부터 알고 있어야 할 문제에 대해 알려준 것뿐이다. 거리에 약간의 쓰레기가 남았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이 불공정한 시스템 때문에 피해를 입었고, 우리는 그것이 귀찮아서 등 돌리고 있었다. 나는 시위를 일으킨 이들의 생각에 절대적으로 공감하며 내가 이 운동에 참여했다는 것을 매우 영광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