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의 근원에서 끌어올린 디자인 네리 옥스만 (Neri Oxman)

미국 경제 전문지 <패스트 컴퍼니›e Fast Company>는 2009년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인물 100명’을 선정하며 커버 인물로 한 젊은 여성을 앞세웠다. 당시 34살의 MIT 건축대학원 박사 과정 학생이던 그녀는 졸업과 함께 곧 MIT 미디어 랩의 최연소 교수로 임용됐다.

생명체의 근원에서 끌어올린 디자인 네리 옥스만 (Neri Oxman)

미국 경제 전문지 <패스트 컴퍼니›e Fast Company>는 2009년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인물 100명’을 선정하며 커버 인물로 한 젊은 여성을 앞세웠다. 당시 34살의 MIT 건축대학원 박사 과정 학생이던 그녀는 졸업과 함께 곧 MIT 미디어 랩의 최연소 교수로 임용됐다. ‘물질 생태학(material ecology)’라는 신조어로 자기 직업의 정체성을 말하는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네리 옥스만(Neri Oxman) 이야기다. 그녀는 생태학, 생물학, 건축, 컴퓨팅, 공학을 토대로 자연의 근본적인 작동 원리를 탐구하고 그 변화와 적응의 프로세스를 디자인 오브제로 풀어내는 독특한 인물이다. 의대를 중퇴하고 도시 공학을 공부한 후 실험적인 건축의 산실, 영국 AA 스쿨을 나와 MIT 건축대학원에서 컴퓨터와 디자인을 활용하는 연구를 하는 등 소위 융합형 인재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이 이끄는 랩, 미디에이트 매터 그룹(Mediated Matter Group)과 함께 물질과 환경 사이에 놓인 사물이 환경에 적응하고 타협하기 위해 어떻게 자신을 뒤바꾸는지에 집중한다. 한 마디로 생명체의 본능적인 대처 능력에서 영감을 얻는 것이다. 그녀의 작업은 켜켜이 쌓인 지식과 직감을 베틀 삼아 아주 이성적이고 구체적인 기능 덕분에 세상에 정말 존재할 것만 같은 무언가를 시적이고 아름다운 하나의 오브제처럼 구현한다. 살아 움직일 듯 복잡한 유기체의 형상을 한 그녀의 작업들은 모든 생김새에 이유가 있다. 생의학적 지식과 방대한 디지털 자료 분석을 토대로 특정 환경과 상황에서 물질이 어떻게 대처하고 진화할 것인지 면밀히 예측한 프로세스의 결과물이기 때문. 자연과 생명체의 근원에서 끌어올린 작업은 괴기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고, 생명이 살아가는 법칙의 비밀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세세하게 변화한 세포 조각들이 엉킨 듯한 오브제는 3D 프린팅을 통해 생생히 재현되며 절정을 맞는다. 그녀가 2012년 파리 퐁피두 센터에 전시한 ‘아직 상상 속의 존재들(Imaniary Beings Not Yet)’ 연작은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상상동물 이야기Book of Imaginary Beings>에 나오는 10여 종류의 신화 속 생명체가 갑옷, 헬멧, 코르셋 등 인간의 몸에 맞게 진화하는 모습을 예측해본다. 상상 속 생명체가 갖출 법한 생김새가 환경과 목적에 맞춰 다시 한 번 모습을 뒤바꾼 ‘상상의 자발적 진화’는 기존의 절삭 가공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3D 프린팅만의 압도감을 선사한다. 제조 혁명이라 불리는 3D 프린터의 경제적 효용보다 생명 그 자체를 다루는 바이오 3D 프린터의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 뉴욕 현대 미술관(MoMA) 큐레이터의 격찬은 올해 40살이 채 안 된 이 천재가 앞으로 어떤 발자취를 남길 수 있을지 기대케 한다. “그녀의 작업은 단순히 아름다운 조각품, 훨씬 그 이상이다. 지난 1000년 동안 인류가 계속 갈망해온 일을 혼자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www.materialecology.com 글: 전종현 기자

카프카, 2012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여러 소설에서 의도적으로 모호한 단어를 사용한 것에 착안한 ‘카프카(kafka)’도 물리적으로 모호한 유연성을 제안한다. 네리 옥스만의 ‘카프카’는 척추를 단단히 지지하는 동시에 부드러운 고무 소재의 유연함 덕에 몸을 감싸기에 용이하다. 껍질의 곡률에 따라 큰 부분은 무늬가 빽빽하고 유연성이 크다. 곤충의 부드러운 내부 껍질 같은 코르셋, 그리고 인간을 위한 딱딱한 갑옷 그 중간 지점의 ‘비현실적 토르소’를 지향한다.

메두사2, 2012
역학적인 강도를 개선하고 구조를 지지하는 형태 생성 공정을 거쳐 만든 보호용 헬멧. 한 덩어리로 인쇄한 구멍, 골, 주름진 표면은 철저한 계산 아래 만들어졌다. 노란색과 검은색의 조화는 가장 눈길을 끄는 색으로 헬멧에 존재감을 실어준다. 계속 보고 싶은 유혹에 빠지는 메두사(Medusa)처럼 말이다.

프뉴마1, 2012
고대 그리스어로 ‘움직이는 공기’를 뜻하는 프뉴마(Pneuma)는 호흡이 발생하는 장소이자 인간의 영혼이 쉬는 안식처라는 맥락과 통한다. 그에 걸맞게 가벼운 재료의 특성을 살린 디자인이 눈길을 끈다. 스펀지 같은 해면 동물에서 착안한 부드러운 갑옷은 신체를 보호하는 동시에 편안하고 유연한 착용감을 선사한다. 몸체에 공기가 순환하는 통로가 뚜렷이 보인다.

도플갱어, 2012
하늘을 나는 배트 슈트(배트맨 옷)를 콘셉트로 공기역학을 이용해 비행 능력을 향상시키는 구조를 디자인했다. 알고리즘 기술을 적용해 도플갱어(Doppelgänger)의 나머지 한쪽에 시각적 환영을 생성했다. 빛 반사나 열 흡수 같은 물리적 속성이 결합된 이 환영은 잠재적으로 의미심장한 기능이 있다. 건물 외벽에 적용했을 때 특정 각도만 햇빛을 받고, 반대 각도에는 그림자가 지도록 만들 수 있다. 곧 공간적인 도플갱어인 셈이다.

봉합선이 있는 미노타우르스 머리, 2012
인간의 몸에 소의 머리가 달린 미노타우르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괴물이다. ‘봉합선이 있는 미노타우르스 머리(Minotaur Head with Sutures)’는 충격 흡수식 보호 헬멧이다. 뿔 형태와 사람 두개골에 있는 봉합부에서 착안한 이 착용형 두개골은, 유연성 있는 봉합선을 삽입해 한 번에 출력했다. 실제 인간의 두개골 결합 공정과 비슷하게 이 헬멧은 봉합선의 두께와 밀도, 곡률을 다양하게 적용해 영역별로 유연한 정도가 다르게 만들었다. 공간을 채우는 프랙탈을 본떠 만든 이 봉합선들은 헬멧 표면에 부피감을 선사해 더 안전하고 편안한 경험을 선사한다.

레모라, 2012
레모라(Remora)는 바다에 사는 괴생물체로 배에 달라붙어 사고를 일으키는 원흉이었다. 빨판상어라고 불리는 레모나의 등지느러미는 빨판과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 골반부에 부착하는 고관절 부목으로 적합한 흡입 능력이 있는 이 생물체는 따개비처럼 움푹 파인 구조로 이뤄져 있다. 피부에 부착하기 위한 세포 ‘흡착컵’은 인체의 곡면을 따라 자연스럽게 붙도록 다양한 크기와 밀도로 구성돼 있다. 거들처럼 생긴 이 오브제는 안쪽으로 입으면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뒤집어서 바깥쪽으로 입으면 거친 표면이 착용자의 골반에 부착되는 원리로 운용된다.

레비아단1, 2012
성경을 보면 고대 바다 괴물 레비아단 (Leviathan)은 육중한 몸집으로 바다에서 빠르게 움직인다고 한다. 레비아단 등에는 촘촘하게 봉인된 방패가 일렬로 있는데, 그 조각들이 너무 촘촘해 공기가 샐 틈도 없다. 떨어지지도 않는다. 가슴마저 돌처럼 단단하다. 네리 옥스만의 ‘레비아단1’은 물속에서 꿈틀대는 레비아단을 인체를 위한 갑옷으로 바꿔본 것이다. 레비아단의 해부학적 구조와 물리적 속성에서 영감을 얻어 얇고 단단한 껍질의 표면을 절단해 움직임과 신축성에 필요한 유연성을 더했다. 하나의 연속된 표면과 얇은 벽의 칸으로 이루어진 이 보디 슈트는 두 가지 재료로 인쇄했다. 각 칸은 양면인데, 안쪽은 부드러운 소재를 사용해 편안하고, 바깥쪽은 보호를 위해 단단한 껍질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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