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제조가 구축한 그로테스크의 미학 아이리스 반 헤르펜 (Iris Van Herpen)

단지 기하학적 디자인으로 둘러싸인 ‘퓨처리즘’의 과용이라는 느낌보다 디지털 기술의 믿을 수 없는 섬세함이 인체의 굴곡과 만나 ‘전에 느끼지 못한 경험’을 선사한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게 진정 그녀의 매력 아닐까.

디지털 제조가 구축한 그로테스크의 미학 아이리스 반 헤르펜 (Iris Van Herpen)

“기괴한 테크놀로지를 앞세운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의 후계자가 나타났다!” 아른험 예술 대학(ArtEZ)을 졸업하고 2007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레이블로 모국인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던 20대 중반의 패션 디자이너가 2011월 1월 파리 패션 위크의 오트 쿠튀르 초청 패션쇼를 마치고, 그해 6월 정식 멤버로 처음으로 선보인 데뷔 무대 ‘캐프리올(Capriole)’을 본 패션계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특히 모델 리우 웬이 인체의 골격을 그대로 빼 닮은 3D 프린팅 의상을 입고 캣워크를 시작하는 순간 디자이너, 아이리스 반 헤르펜(Iris Van Herpen)의 존재감은 컬렉션의 원래 의미처럼 국제적으로 단숨에 ‘도약’했다. 그로테스크하고 파격적인 인체 골격 의상이 그해 <타임Time>이 꼽은 ‘올해의 발명 50’에 선정됐으니 말이다. 그녀는 현재 패션계에서 독특한 속성을 가진 새로운 재료를 디지털 방식과 결합해 상상력의 한계를 구현하는 가장 진보적인 디자이너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비결은 바로 3D 프린터. 실리콘, 플라스틱 등 보통 패션 디자이너들이 쉽사리 사용하지 않는 재료를 전면적으로 활용한다. 특히 2010년부터 매 컬렉션에서 전문가와 협업해 구조적이고 건축적인 디자인의 완성도를 높인 것이 비결. 2011년 아티스트 다니에우 위드리그(Daniel Widrig), 2012년에는 건축가 줄리아 코너(Julia Koerner), 네리 옥스만(Neri Oxman) MIT 미디어 랩 교수 등 3D 프린팅 디자인을 구현하는 최고의 전문가들은 그녀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디자이너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이게 정말 될까?”라는 머릿 속의 유리 천장을 부숴왔다. 작년에는 신발 브랜드 유나이티드 누드(United Nude)를 시작한 건축계의 거장 렘 콜하스 (Rem Koolhaas)와 유기적으로 엉킨 나무뿌리에서 영감받은 12켤레의 구두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구두도 3D 프린터로! 사람 피부와 비슷한 실리콘으로 이리저리 실험한 의상들과 렘 콜하스의 구두는 ‘야생의 구현(Wilderness Embodied)’이라는 컬렉션 이름에 꽤나 들어맞지 않는가. 단지 3D 프린터 하나로 뜬 것 아니냐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은 그녀의 컬렉션 중 하나라도 먼저 보길 권유한다. 3D 프린터는 단지 도구일 뿐 그 상상력의 원천은 사람이다. 경계가 없고 실험성이 강한 자신의 미래주의적 에고를 구현하기 위해 3D 프린터는 대체 불가능한 도구이지만 그녀는 디지털로 제조한 오브제를 다시 수작업을 통한 장인 기술로 재가공해 최종적으로 작업을 마무리한다. 단지 기하학적 디자인으로 둘러싸인 ‘퓨처리즘’의 과용이라는 느낌보다 디지털 기술의 믿을 수 없는 섬세함이 인체의 굴곡과 만나 ‘전에 느끼지 못한 경험’을 선사한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게 진정 그녀의 매력 아닐까. www.irisvanherpen.com 글: 전종현 기자

2012 A/W ‘캐프리올(Capriole)’ 컬렉션, 파리 오트 쿠튀르
파리 오트 쿠튀르의 정식 회원으로 데뷔한 무대에서 아이리스 반 헤르펜은 3D 프린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퓨처리즘 작업들을 선보이며 패션 중심지 파리에서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이름이 회자되게 만들었다. 특히 3D 프린터를 이용해 구현한 괴 생명체의 표본 같은 하얀색 뼈 드레스는 파격적인 모습으로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크리스탈리제이션’ 컬렉션

2011 S/S ‘크리스탈리제이션 (Crystallization)’ 컬렉션, 암스테르담 패션 위크
암스테르담 스타델릭 뮤지엄(Stedelijk Museum)의 별명 ‘목욕통’에서 영감을 받아 첨벙거리는 물을 컬렉션의 모티브로 삼았다. 3D 프린터를 이용한 그녀의 첫 번째 작업으로 아티스트 다니얼 위드리그(Daniel Widrig), 벨기에의 3D 프린터 업체 머터리얼라이즈와 협업했다.

2013 S/S ‘볼티지(Voltage)’ 컬렉션, 파리 오트 쿠튀르
볼티지 컬렉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체의 전기 에너지가 내뿜는 힘과 운동감을 주제로 많은 전문가와의 협업을 통해 체감할 수 있는 시각적 오브제로 구현한 경우였다. 특히 MIT 미디어랩의 네리 옥스만 교수와 함께 작업한 생명체 비늘 모양의 유연한 드레스는 기괴한 아름다움과 완성도 면에서 역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이번 컬렉션의 하이라이트였다. 볼티지 컬렉션을 계기로 아이리스 반 헤르펜은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하는 대표적인 실험적 디자이너로 인정받았다. 그렇게 해서 생긴 별칭이 연금술사다.

2013 A/W ‘야생의 구현(Wilderness embodied)’ 컬렉션, 파리 오트 쿠튀르
‘야생의 구현’ 컬렉션은 아이리스 반 헤르펜이 또 다른 동료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신발 브랜드 ‘유나이티드 누드(United Nude)’를 만든 건축계의 거장 렘 콜하스와 협업하며 마치 나무뿌리와 줄기가 뒤엉킨 듯한 모습을 선보였기 때문. 또한 인체와 재질이 비슷한 실리콘을 활용해 몸에 달라붙은 듯 표현한 의복도 매력적이었다. 마치 외계 생명체를 보는 듯한 액세서리뿐 아니라 털 끝에 달린 새 머리까지 표현하는 디테일은 관람객에게 놀라움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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