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과 예술의 경계에 선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

디자이너 하지훈만큼 팔방미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한샘, 벤텍, 웰즈 등 굵직한 국내 가구 브랜드와 협업한 바 있고 덕수궁 덕홍전에서 선보인 덕수궁 프로젝트와 금호미술관의 설치 작품 ‘자리’ 등으로 산업과 예술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고 있다.

산업과 예술의 경계에 선 가구 디자이너 하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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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생. 계원조형예술대 가구디자인과 부교수. 홍익대 목조형가구학과와 덴마크 디자인 스쿨 가구디자인학과를 졸업했다. 2005년과 2009년 산업자원부가 선정하는 ‘차세대 디자인 리더’에 뽑혔고 2009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수여하는 ‘올해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상하이 번드18(Bund18)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이 외에도 밀라노, 스톡홀름, 도쿄, 쾰른, 뉴욕, 두바이 등지에서 국제 전시를 치렀다. 2011년 대림건설의 프로젝트 디자이너로 활동했고 2013년에는 설화문화전 아트 디렉터를 맡기도 했다. 영국 V&A 뮤지엄, 독일 프랑크푸르트 응용미술관, 국립민속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www.jihoonha.com

디자이너 하지훈만큼 팔방미인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한샘, 벤텍, 웰즈 등 굵직한 국내 가구 브랜드와 협업한 바 있고 덕수궁 덕홍전에서 선보인 덕수궁 프로젝트와 금호미술관의 설치 작품 ‘자리’ 등으로 산업과 예술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고 있다. 두 영역 사이를 잇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었다는 점은 그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그뿐인가, 장인들과 진행한 다양한 협업 프로젝트는 전통 공예에 새 숨결을 불어넣고 있으며 계원조형예술대학교 리빙디자인과 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 역할도 충실히 수행 중이다. 이런 다재다능함에도 불구하고 하지훈은 스스로 “내게 특별한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재능 중 하나가 끈기였을 뿐”이라며 몸을 낮춘다. 하지만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좋은 디자이너는 재능만으로 완성되지만, 위대한 디자이너가 되려면 재능과 노력 모두가 필요하다고. 아직 40대 초반에 불과한 나이지만 소재나 기술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부단히 스스로를 연단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디자이너 하지훈의 내일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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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체어, 2013 클라이언트 아름지기문화재단 창덕궁 가정당에 비치한 의자로 낮은 한옥 천장을 감안해 공간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디자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 한 것은 고등학교 2~3학년 때부터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디자인에 관심 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디자인을 선택할 수 있었던 데는 저보다 앞서 미술을 시작한 친형의 영향이 컸습니다. 맏이인 데다 공부도 잘했던 형이 별안간 미술을 한다고 하니 부모님께서 펄쩍 뛰셨어요. 당시만 하더라도 남자가 미술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반적이지는 않았으니까요.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형이 미술을 시작하고 나니 어느 날 부모님이 제게 “너도 미술 한번 해볼래?”라고 물으시더군요. 어찌 보면 둘째의 특혜를 누린 셈이죠(웃음). 그렇게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형을 따라 같은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저는 순수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부모님이 끝끝내 허락해주지 않았고 절충안으로 홍익대 학교 목공예과(현 목조형가구학과)를 선택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공예를 공부했던 것이 제겐 큰 자양분이 되었던 것 같아요. 덴마크 유학 시절에는 절제되고 엄격한 형식의 디자인을 배웠습니다. 반면 공예는 자유로운 표현을 중시 하는 편인데 이렇게 양극단의 교육을 모두 경험했 던 것이 제 디자인의 폭을 넓혀줬습니다. 그래서인지 심미성과 기능성이 동시에 느껴지는 작품이 많습니다. 역시 덴마크 유학 시절의 경험이 큰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싶어요. 덴마크에서 보낸 3년은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사고방식이나 생활 양식이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였던 것에서 다 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고요,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생각하는 방식에서 많은 차이를 느끼고 이로 인해 좀 더 관대한 마음을 갖게 되었어요.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나가는 그 들의 자세도 훗날 장인들과의 협업에 도움을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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팰리스 라운지, 2012 클라이언트 국립고궁박물관 소반 형태의 라운지 의자. 높이와 지름이 각각 다른 의자를 조합해 사용할 수 있다.
그때만 해도 북유럽으로 유학을 가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데 왜 덴마크를 선택 했나요?

처음 덴마크행을 결정했을 때는 정말 주변 사람들 모두가 다 반대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덴마크는 우리에게 매우 생소한나라였으니까요. 하지만 제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습니다. 당시 제가 좋아하던 디자인이 모두 덴마크에서 나왔거든요. 베르너 판톤(Verner Panton), 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 한스 와그너(Hans J Wegner)…. 1950~1970년대 전성기의 덴마크 디자인이 제 마음을 흔든 것이죠. 후배들이나 제자들이 유학을 간다고 하면 저는 어딜 가도 상관 없다고 이야기해요. 대신 마음의 울림이 있는 곳을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내 색깔이나 스타일을 고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많이 가는 나라라는 이유로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판단력인데 그것이 결여되어 있 다는 반증이니까요.

당시 월간 <디자인> 해외 통신원으로 도 활동하셨는데요.

아르바이트로 통신원 활동을 하면서 번 돈이 꽤 쏠쏠했어요(웃음). 가난한 유학생이 취재를 이유로 전시회나 뮤지엄을 입장할 수 있다는 것도 굉장히 도움이 되었고요. 통신원 활동 기간 동안 꽤 많은 소식을 한국에 전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가구 박람회와 덴마크의 어린이 가구 디자이너 카르스텐 베크케르(Carsten Becker)에 대한 기사를 쓴 것이 기억에 남네요.

덴마크 유학 시절 밀라노 디자인 페어에 도 참가하셨죠?

1999년 대학원 친구들 5명과 함께 가로ㆍ세로 3m짜리 소형 부스에서 전시했던 것이 밀라노와 맺은 첫 인연이었어요. 당시 저는 조명을 전 시했는데 이를 눈여겨본 로마의 조명 회사 아우레아(Aurea)가 이 조명을 제품으로 생산했습니다. 제 인생 첫클라이언트였던 셈이죠. 이듬 해인 2000년에는 방학 기간 동안 한국에 돌아와 라탄(rattan) 제작자에게 배운 기술을 응용해 ‘자리(Jari)’를 선보였습니다. 한국의 좌식 문화를 반영한 이 작품으로 살로네 사텔리테(Salone Satellite)에 참가할 수 있었고이것이 계기가 되어 네덜란드 가구 회사 KSPD와 지그(Zig) 시리즈를 디자인하기도 했습니다. 학생 신분으로 유럽의 가구 회사와 일했던 건 무척 값진 경험이었어요. 자리는 14년이 지난 지난해 V&A 뮤지엄의 영구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첫선을 보인이후 업데이트 버전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죠.

해외 가구업체의 눈에 띌 수 있었던 비결 같은 게 있었나요?

사실 비슷한 질문을 꽤 많이 받는데요,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드러나는 디자인을 꾸준히 이어가는것이야말로 최고의 셀프 프로모션이 아닌가 싶어요. 결국 사람들은 나의 그런 행보를 보고 디자인을 의뢰하는 것이니까요. 요즘은 자기 웹사이트에 작품만 올려도 지구 반대편까지 홍보가 되는 세상이잖아요? ‘자리’의 영구 소장에 관한 일로 V&A 뮤지엄 측 담당자가 절 찾아왔을 때 절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리서치를 하다가 웹 사이트를 보고 알게 됐다고 하더군요. 결국 내실 있게 자신만의 콘텐츠를 채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종종 십수 년간 디자이너로 일하면서도 포트폴리오에 넣을 작품이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내 작품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죠.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일하는 후배나 제자들이 비슷한고민을 토로하면 욕심 내지 말고 1년에 딱 한 작품만 완성해보라고 조언합니다. 개인 작품 활동은 결국 자기만 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거든요.

귀국 후에는 지인과 함께 R&ED 스튜디 오를 열고 제주 한화리조트, 갤러리아 명품관 등 다양한 공간 디자인 프로젝 트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적잖은 인테리어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사실 그리 즐겁지만은 않더군요. 작가주의적 성향이 강한 탓에 상대적으로 정체성을 드러내기 어려운 공간 디자인은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Designed by’가 명확한 가구 디자인과 달리 공간 디자인 분야는 워낙 여러 외부 요인이 개입하다 보니 아무래도 내 작품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던 겁니다. 가로ㆍ세로 3m가 넘어가는 규모의 프로젝트는 아무래도 제 능력 밖인 것 같아요 (웃음). 스튜디오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좀 더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계원조형예술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됐습니다. 디자이너로서 작품 활동에 전념하면서도 후배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할 수 있는 길을 택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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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 체어(Bow Chair), 2013 클라이언트 아모레퍼시픽 설화문화전을 위해 디자인한 의자. 전시 주제가 ‘활’이었던 만큼 활구조에서 모티브를 얻어 가늘면서도 구조적인 형태의 의자를 완성했다.
그렇게 해서 계원조형예술대학교에 온 것이었군요?

계원조형예술대학교에 근무하게 된 것은 제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학교 분위기도 그렇고 디자이너로 활동하기에도 이만한 환경이 없는 것 같아요. 다른 학교와 달리 수업이 철저히 실무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학교 밖에서 경험하며 배운 것을 즉각적으로 학생들에게 전수해줄 수 있거든요. 그 과정에서 제 디자인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되니까 일종의 선순환 구조가만들어지는 것이죠. 디자인이 실용 학문인 만큼 학생들도 학교라는 울타리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교육자 하지훈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 네요.

사실 거창한 교육 철학 같은 것은 없어요. 단지 좋은 조언자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학생들의 스타일에 대해서는 결코 지적하지 않아요. 미감 라는 것은 결국 사람마다 다른 것이니까요. 대신 어떤 생각으로 디자인했는지를 묻습니다. 덴마크의 교수법도 주로 그런 식으로 이뤄집니다. 교수는 그저 질문하는 사람이고 학생은 그에 답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이뤄지죠. 그렇게 학생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야말로 교육자의 역할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 취향이나 생각은 강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내 색깔이나 스타일은 고려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가는 나라라는 이유로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판단력인데 그것이 결여되어 있다는 반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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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반, 2008 강원도의 전통 소반을 재해석한 티 테이블. 영국 V&A 뮤지엄과 프랑크푸르트 응용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 열린 한·아세안 특별 정상회담에서 11개국 정상들에게 준 선물이기도 하다.
은사인 최병훈 교수님의 영향도 컸을 것 같습니다.

최병훈 교수님은 철저한 자기 관리로 정평이 나셨죠. 작품 활동을 한다고 수업을 게을리하는 법이 없으셨어요. 저도 그런 부분을 본받아 수업 시간을 철저히 지키는 편입니다. 또한 디자이너로서도 많은 자극과 귀감이 되었습니다. 교수님이 없었다면 저는 가구 디자이너의 길을 걷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공예 수업이 주를 이루던 학과가 교수님으로 인해 가구 영역으로 확장됐으니까요. 긴밀한 교류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분이 앞서 이 분야를 개척하신 덕분에 제가 조금이나마 평탄한 길을 걸어온 것같습니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시는데 오히려 지금이 전성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훈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 가 바로 장인과의 협업 프로젝트입니다.

2005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무형문화제 제 14호 나주반 장인 김춘식 선생과 협업해 현대식 나주 소반 ‘반’을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매듭장 김은영, 채상장 서한규, 공예가 김영진 등 여러 장인들과 함께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반’은 제 디자인 커리어를 통틀어 베스트셀러에 속하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디자이너와 장인은 기본적으로 궁합이 잘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수십 년간 같은 제품을 만들며 숙련된 장인의 기술과 디자이너의 창의력이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는 겁니다. 덴마크의 가구 디자이너 핀 율(Finn Juhl)이 대표적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가구 디자이너는 곧 목수이기도 했는데 핀 율은 장인 닐스 보더 (Niels Vodder)와 협업해 가구를 만들었습니다. 디자이너와 장인의 협업 시스템을 구축한 셈이죠.

하지만 디자이너와 장인의 성향이 극명 히 나뉘는 만큼 어려운 점도 많을 것 같 아요.

맞습니다. 가장 어려운 것은 결국 커뮤니케이션 이죠. 사람에 따라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제가 협업한 장인 가운데 김춘식 선생이 가장 나이가 많았는데 오히려 가장 적극적으로 유연하게 변화를 수용하셨어요. 전통 공예가 지나치게 정체되어 있고 제대로 된 대접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계신 것이죠. 어쨌든 저는 장인들과 협업할 때면 되도록 그들에게 맞추려고 노력합니 다. 억지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사실 커뮤니케이션에 큰 문제는 없어요. 제 의견을 반영하고 프로젝트에서 이름을 드러내는 것보다 그들과의 관계를 지속하고 영감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장인들과 협업해 만든 결과물은 시작에 불과해요.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제가 받게 되는 인스피레이션이 향후 제 디자인의 자양분이 될 것을 알기에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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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프로젝트, 2012 클라이언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덕홍전 내에 설치했던 작품으로 ABS 진공 성형을 한 후 크롬 도장으로 마무리했다. 아름답지만 슬픈 역사가 깃든 덕홍전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천장의 화려한 단청이 굴곡진 형태의 조형물에 일그러지며 반사되도록 디자인했다. 완벽한 착석감을 주어 관람객이 그곳에 머물며 장소의 의미를 생각해보도록 만들었다.
장인들과 협업을 이어가는 것은 ‘한국적 디자인’에 대한 의무감이나 관심 때문인 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사실 한국적 디자인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제겐 별 의미가 없어요. 밀라노에서 선보인 ‘자리’나 ‘블랙큰’처럼한국의 좌식 문화를 디자인 언어로 풀어낸 경우는 있지만 한 번도 전략적으로 한국적 이미지를 차용해야겠다고 생각 해본 적은 없습니다. 한국적 디자인은 결국 내 성장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나만의 강점이자 아이덴티티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자리’의 경우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10~20배 더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전통적 미감을 ‘우리 것’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선입견을 갖고 바라보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중국 명나라의 미감에서 영향을 한스 와그너의 디자인에는 열광하지만 우리나라 나주 소반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실 두 디자인이 지닌 미감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 한데 말이죠. 전통을 보존하는 것만큼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것은 디자이너의 몫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장인들과 협업하는 것에 다른 이유가 있나요?

장인들과의 협업은 소재나 기술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새로운 소재와 기술은 곧 가능성을 의미하니까요. 사실 저는 디자인 전시보단 소재 전시나 목공기계전을 더 많이 찾습니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내 디자인 언어를 잘 구현할 방법이 무엇인지 를 찾는 게 더 중요한 것 아닌가 싶어요. 학교 안에 있는 제 연구실은 공장을 방불케 합니다. 최선의 디자인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각종 장비가 즐비하죠. 3D 프린터 두 대와 CNC 머신도 보유하고 있고요.

2013년에는 설화문화전 아트 디렉터로 도 활동하셨습니다.

설화문화전은 전통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전시입니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프로젝트를 꾸준히 선보였기에 아트 디렉터로 선정되었는데 처음에는 다른 프로젝트 일정과 겹쳐서 고사하려고 하다가 담당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고 마음을돌린 기억이 있습니다. 워낙 쟁쟁한 분들이 역대 아트 디렉터를 맡았기에 저로서는 무척 영광스러운 일이었죠. 설화문화전은단순한 전시가 아닙니다. 장인과 예술가가 만나고 교감 하면서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프로젝트입니다. 1년 가까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당시 전시는 디자인과 공예뿐 아니라 순수 미술까지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그뿐 아니라처음으로 외국 작가를 참여시키기도 했죠. 결국 변화가 있어야 새로운 전통도 만들어지는 법입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속되는 전시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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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이, 2012 클라이언트 웰즈 전통 소재인 장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캐비닛.
지난해 이도갤러리에서 진행한 개인전에 서는 3D 프린터를 이용한 필통을 선보이기도 하셨죠. 앞으로 3D 프린터가 가구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나요?

글쎄요, 3D 프린터가 세상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실 저는 ‘새로운 가능성 하나가 열렸다’는 정도로받아들입니다. 3D 프린터 하나가 기존의 모든 기술을 대체하긴 어려울 테니까요. 물론 3D 프린터의 도입은 디자이너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줄 것입니다. 사진작가들이 출력소를 거치지 않고 작품을 출력할 수 있게 됐듯 디자이너가 숙련공이나 생산 공정 “전통을 보존하는 것만큼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것은 디자이너의 몫이라고 봅니다.” 을 거치지 않고 직접 제작까지 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죠. 그만큼 사고하는 능력의 비중 이 더욱 커질 것이고요.

실제로 작업실에서 직접 생산할 수 있는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죠?

100개 미만의 제품은 제 손으로 직접 제작까지 합니다. 그것이 가구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가구 회사와 일할 때도생산될 결과물에 99% 가까운 프로토타입을 직접 만들어놓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야 제 의도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개념을 말로 설명하거나 렌더링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한샘, 벤텍, 웰즈 등 국내 가구 브랜드와 도 많은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좋은 상품이 나오는 데는 클라이언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웰즈와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는 좋은 선례를 남겼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해외에서는 디자이너가 페어나 전시 등을 통해 작품을 먼저 선보이면 이를 본 기업이 디자이너에게 프로젝트를 의뢰하곤 합니다. 마크 뉴슨 (Marc Newson)의 록히드 라운지(Lockheed Lounge)도 그렇게 처음 세상에 나왔죠. 국내에서는 웰즈가 이런 절차를 밟은 거의 유일한 회사였습니다. 청담동 카이스 갤러리에서 전시를 할 때 웰즈 대표님과 디자인 실장을 초대했는데 제 작품을 보고 양산해볼 것을 제안한 것이죠. 지금도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매년 꾸준히 로열티를 받고 있어요. 수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좋은 사례를 만들었다는 것이 제게 의미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론 이런 케이스가 좀 더 늘어났으면 해요. 국내 가구 회사들이 검증된 디자이너에게 일을 맡기는 경우는 많아졌지만, 젊고 크리에이티브한 디자이너들의 참신한 작품을 찾아내는 안목은 아직 부족한 것 같아요. 디자이너들도 자신의 작품을 갖고 설득을 하기보다는 클라이언트의 의도에 맞춰주는 편이고. 설득하는 과정이 어렵다는 것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 설득하는 일이야말로 디자이너가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업뿐 아니라 공공 기관 프로젝트에도 다수 참여하셨는데요.

한글박물관, 고궁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민속 박물관 등 제법 많은 공공 기관과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과는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로도 만나고 미술관과 작가로도 만나는 아주 재미있는 관계죠. 사실 공공 기관과 함께 하는프로젝트는 예산이 많지 않기 때문에 수익이 크게 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내 돈을 쏟지 않고도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좋은기회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것 또한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하고 예산에 구애받지 않고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합니다.

대량생산형 가구를 디자인할 뿐 아니라 미술관에선 작가로서의 이력도 착실히 쌓아가고 있습니다. 얼핏 전혀 다른 성격의 프로젝트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사실 생각하는 프로세스는 동일하다고 보기에 영역을 넘나드는 데에서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디자이너 입장에서 보면 갤러리나 미술관도 일종의 클라이언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작가에 대한 존중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제게는 기업보다 더 좋은 클라이언트라고도 할 수 있죠. 디자인계에서는 갑을 관계가 너무 강하게 작용하거든요. 솔직히 저는 무척 게으른 사람이에요(웃음). 너무 늘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원칙을 세우는 편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반드시 정기 미팅을 갖는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멈춰 있지 않고 스스로 계속 고민하고 시도할 수 있는 방아쇠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죠. 전시는 일종의 프로토타입을 완성하는 계기도 마련해줍니다. 모터쇼로 치면 콘셉트카를 발표하는 것과 같아요. 전시 작품을 시초로 디자인을 발전시키는 것이 저만의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새로운 주제나 분야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에요. 설치 작품이든 대량생산 가구든 제게는 다 좋은 경험이자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순수 예술 작가와는 또 성향이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성향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일부 작가들은 작품을 상품화하는 것을 일종의 훼손으로 느끼는 것 같은데 저는 디자인을 기반으로 하는 만큼 언제나 사용성에 대한 고려를 합니다. 또 어떤 작가들은 한 가지 주제나 소재를 고집스럽게 파고들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반면 저는 언제나 새로운 주제나 분야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에요. 설치 작품이든 대량생산 가구든 제게는 다 좋은 경험이자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지도 궁금합니다.

피츠버그 대학이 운영하는 피츠버그 내셔널리티룸(Pittsburgh Nationality Rooms) 한국관에 배치할 의자와 테이블을 디자인했습니다. 아름지기재단이 한옥으로 한국관을 짓고 제가 그 안에 들어가는 의자 30개와 테이블 15개를 직접 제작한 것이죠. 아름지기재단은 훌륭한 안목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저와 추구하는 방향도 일치해 제겐 최고의 클라이언트로 여겨집니다. 또한 요즘에는 금호미술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옅은 공기 속으로>전에 참여하고 있고 객석 의자 제조사인 혜성산업과 3년 넘게 제품 개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불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 릴(Lille)에서 열리는 전시에도 참여할 예정이고요. 이 밖에 아프리카 나미비아 지역의 자수 기술로 제품을 만드는 사회적 기업 펜두카의 아트 디렉터를 맡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를 오갈 수 있는 것이 제겐 가장 큰 축복 같아요.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446호(2015.08)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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