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경 모나미 대표

필기류 제조업에서 출발해 교육 사업 분야에 진출하고 명품 펜과 산업 현장의 도구로까지 지평을 넓힌 비결을 들어보자.

송하경 모나미 대표
1959년생. 연세대학교에서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로체스터대학원에서 경영을 공부했다. 1984년 모나미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 1993년 최고경영자에 올라 지금까지 모나미를 이끌고 있다. 지략이 뛰어나고 도전 의식이 강해 모나미의 해외 진출과 고급화 전략을 진두지휘했다. 노사 간의 합의를 위해 꼬박 1년 동안 새벽 5시에 안산 공장을 드나들며 아무런 충돌 없이 당시 회사의 자금 사정을 압박하던 퇴직금 누진제의 합의를 끌어냈던 일화가 있다.

전 국민의 가방 속에 하나씩 들어 있음 직한 153 볼펜, 마술처럼 써진다는 매직, 술술 잘 나가는 사인펜, 절대 지워지지 않는 네임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쓰는 행위를 탐구하는 모나미의 제품은 우리나라 필기류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종이와 펜의 밀월관계가 느슨해진 분위기에도 모나미는 글로벌 진출과 고급화를 내세우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본질을 탐구하고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기 위해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송하경 모나미 대표를 만났다. 필기류 제조업에서 출발해 교육 사업 분야에 진출하고 명품 펜과 산업 현장의 도구로까지 지평을 넓힌 비결을 들어보자. 인터뷰 최민관 기자, 사진 김정한(예 스튜디오)

모나미 153 볼펜
1963년 5월 1일 시장에 선보인 모나미 153 볼펜은 15원(현재 300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과 네이밍은 물론 판매량에서도 독보적인 제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디자이너에 관한 얘기는 들리지 않습니다. 153 볼펜의 디자인 개발 내막을 듣고 싶습니다.

맞습니다. 153 볼펜이 출시된 지 53년이 흘렀네요. 요즘 다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거나 “미니 멀리즘의 극치”라고 말해주지만 사실을 얘기한다면 ‘꿈보다 해몽’인 셈입니다. 153 제작 과정을 돌이켜보면 디자이너가 누구라고 말할 수조차 없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으니까요. 1953년 전쟁이 끝났고 10년이 흘렀지만 모든 것이 무너진 뒤 복구하는 일만으로도 힘든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기능과 재료만 써서 만든 게 모나미 153 볼펜입니다. 결국 환경이 제품을 만든 셈이지요. 우리는 지금도 본질에 충실하고 단순한 디자인을 전면에 내겁니다. 태생부터 그러니까요. 단순한 디자인이 전부거든요. 게다가 환경보호를 위해서도 멋진 선택이지요. 단순하면 재활용하기도 편합니다.

153 리미티드 버전에서 시작된 153 ID, 153 리스펙트, 153 블랙 & 화이트 등 고급 펜 제품들은 모나미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한 전략인가요?

실제 153 리미티드 에디션을 시작할 때 내부적으로 반대가 무척 심했습니다. 대중적인 153을 비싸게 판매하는 것도 그렇고 마케팅 전략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게 중론이었지요. 난 거꾸로 생각해 모나미 153을 소중하게 간직하고픈 사람이 있을 것이라 여겼고 일단 밀어붙였습니다. 이후 결과는 아시는 대로입니다. 너무 잘 팔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애초 한정수량으로 1만 개를 만들었는데 난리가 난 것이지요.

많은 마케팅 전문가는 브랜드가 성공하려면 어느 정도 판타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순차적으로 제조업 이미지와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동의하나요?

우리는 현재 300원짜리 153 볼펜을 만듭니다. 누구나 알고 평생 기억하는 제품이지요. 볼펜 하나로 까만 선을 무려 1km나 그을 수 있으니 쉽게 잃어버릴 수 있지만 자주 교체하는 아이템도 아닙니다. 거기에서 착안한 제품이 153 고급 버전입니다. 펜에 대한 뚜렷한 애착을 지닌 이들, 특히 젊은 세대에 맞는 제품을 내놓은 것이지요.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펜이자 갖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면서도 가격은 합리적인, 그런 제품 말입니다. 이니셜을 새겨주는 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같은 전략입니다. 동의를 떠나 마케팅은 당연한 것이지요. 다만 본질적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나미 제품 외에 어떤 필기구를 사용하시는지, 혹은 멋지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내 돈 주고 갖고 싶은 펜은 타사에서 수입하는 모델인데 파버카스텔의 그라폰입니다.(웃음) 단순하면서도 정교한 디자인의 표본이지요. 기능적이면서도 멋이 넘칩니다. 제가 생각하는 펜이 갖춰야 할 모든 걸 담아낸 수작입니다. 그게 바로 명품의 멋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명품이란 무엇입니까?

명품에 대한 개념부터 정리할까요? 명품이란 값비싼 제품이라기보다 소유자의 퍼스낼리티를 만들어주는 그 무엇입니다. 이를테면 예전에는 남들 일할 때 여행 다니는 사람이 부자였기에 가방이나 시계 같은 아이템이 선망의 대상이 됐습니다. 전에 손잡이가 새까매진 자그마한 루이 비통백을 들고 있는 사람을 공항에서 봤습니다. 수십 년이 흐른 듯했지만 새들 스티치는 견고하고 가죽 또한 제대로 유지되어 있었습니다. 단적으로 그게 바로 명품 아닌가 싶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동일시되는, 그런 존재 아닐까요?

“펜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기록하는 고귀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나미의 슬로건이 ‘터치 오브 휴머니티’가 된 겁니다.”

손에 쥐는 모든 필기구에 관심이 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필기구의 수요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자펜은 어떨까 요? 디자인을 강화한 터치펜 같은 제품을 개발할 계획은 있으신지요? 이를테면 와콤과의 협업 같은?

물론 개념은 같을 수 있습니다. ‘펜으로 뭔가를 쓴다’는 건 비슷합니다만 결국 그건 역량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스갯소리 하나 할까요?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나보다 덩치가 크거나 머리 좋은 놈과는 경쟁하지 않는다’였어요. 모나미는 우리가 가장 돋보일 수 있는 분야에서 더욱 잘하고 싶습니다. 끊임없는 지속성을 염두에 두며 오래가는 가치가 중요합니다.

필기구의 본질에만 집중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

글쎄요, 한마디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겁니다. 고객이 원하는 걸 제시하는 것이죠. 현상보다는 그 안에 내재된 본질을 봐야 합니다. 요즘 무척 덥습니다. 에어컨을 팔면 돈은 벌겠죠. 하지만 사후 수리를 비롯한 신경 써야 할 디테일이 무척 많아집니다. 본질은 에어컨을 팔자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사업입니다. 한층 깊게 들어가는 개념이지요. 우리는 사람들이 펜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는지를 연구하는데 집중합니다. 쓴다는 기본 개념에 어디에, 어떻게 라는 걸 더했을 때 무엇을 개발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 나옵니다.

모나미 볼펜은 1km에 달하는 내구성 테스트를 통해 품질을 검수한다.
대표님이 구상하는 펜의 미래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펜은 쓰고 마카는 표시합니다. 펜은 언제나 문제 해결의 도구였지만 디지털 세상에서 위상이 바뀐 건 사실이죠. 대신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기록하는 고귀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나미의 슬로건이 ‘터치 오브 휴머니티’가 된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때, 중요한 계약서에 사인할 때, 주택 매매 계약서에 서명할 때 가장 중요한 도구는 다름 아닌 펜입니다. 자신을 표현하는 최고의 수단인 셈이지요. 펜이 지닌 상징적 가치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라운드테이블 미팅을 주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소통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세요.

제 원칙이 ‘가능하면 회의는 열지 말자’입니다. 회의를 소집하는 건 결정을 위한 과정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회의 시간에 정보를 교환하고 토론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회의가 곧 결정의 순간입니다. 이를 위해 전 사원에게 에버노트 교육을 시켰습니다. 멋진 디지털 툴이지요. 의견을 공유하고 토론하며 뭔가를 공지할 때 쓰는 수단입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회의는 곧 결론을 내는 과정이며 회의록을 써서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대표님은 기업 SNS를 통한 소통에 힘쓰시나요?

스스로 드러내는 걸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모나미에는 훌륭한 자질을 갖춘 마케터들이 있습니다. 난 취향이 확고한 사람이지만 그걸 모나미 애호가들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볼펜의 팁을 확대해 정밀하게 기능성을 분석하는 테스트.
모나미의 경쟁사는 어디인가요?

경쟁업체의 개념부터 살펴볼까요? 대상을 바라볼 때 전체를 아우르는 것과 세세한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가령 이메일이 등장했을 때, 카카오톡이 나타났을 때 우리의 대응 방안은 어떤 것인가 고민하곤 했고, 결국 깨달았죠.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존재하는 시장을 나누어 뺏어 오는 게 아니라 새로운 걸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가치의 창조야말로 우리의 궁극적 목표이자 원동력입니다. 눈에 보이는 시장의 라이벌을 의식하는 것보다는 우리 자신의 게으름을 경계해야 합니다.

표시하는 마카, 그러니까 모나미의 신제품인 주방 세제로 지워지는 키친 마카나 타일 틈새 마카, 가든 마카 같은 독특한 제품은 어떻게 개발했나요?

새벽 수산시장에 가보면 물기 묻은 스티로폼에 뜨거운 불로 녹인 크레파스로 글자를 씁디다.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물기 있는 표면에 매끄럽게 써지는 마카를 개발했지요. 보톡스 같은 수술을 할 때 얼굴 표면에 라인을 잡지요? 그래서 무독성 스킨 마카를 개발했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혁신적인 의료 기술인 셈이지요. 자동차 제조 라인의 최종 단계는 검수입니다. 제품의 표면이나 조립 단차의 불량을 표시하기 위한 마카가 필요한 거지요. 우리 제품은 수용성이라 물로 깔끔하게 지워집니다. 그 외에 신발 가죽에 표시하는 마카도 개발했지요. 현장에 답이 있습니다. 문의가 오면 철저하게 연구해 해결합니다. 마카는 표시라고 얘기했는데, 표기 방법은 무궁무진합니다. 매직이라고 들어보셨지요? 모나미가 만든 제품 이 고유명사가 됐습니다. 어떤 표면이라도 쓸 수 있다고 해서 매직인 겁니다. 왕자 크레파스 기억나세요? 우리는 펜 외에도 뭔가를 그리는 데 필요한 도구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5개의 부품으로 나눠지는 153 볼펜의 단순한 디자인. 색상별로 내 스타일에 맞게 조립하는 즐거움을 담은 킷트도 시장에 출시했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가 설 자리가 아직 충분하다는 얘기인가요?

물론 직접 손으로 그리는 시장은 줄어듭니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미술 대신 영어를 배우니까요. 하지만 가치 면에서 바라보면 분명 다릅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 같은 음악 교육은 열심히 시키면서 왜 미술 교육에는 신경 쓰지 않을까요? 부모들의 막연한 생각에서 비롯한 겁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그래요. 고흐 전시회를 찾으면 해바라기만 보고 좋아하며 나갑니다. 그 외에 가치 있는 작품은 그저 지나치지요. 미술만 봤을 때 체계적인 교육이 아쉬울 뿐입니다. 음악 교육에서는 바이엘이나 체르니를 통해 점진적인 프로그램을 운용합니다. 미술이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9등급 미술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만든 체계적 교재를 통해 미술사와 미술 테크닉에 대한 점진적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모나미가 가칭 미술 교육 연구소를 설립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객관성을 담보한 시스템을 만들면 결국 시장은 한층 커지게 됩니다. 스케치펜과 크레파스, 사인펜을 파는 건 그 이후의 얘기죠. 미술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불러서 모든 도구를 주고 관찰합니다. 타깃 유저가 우리 제품을 활용하는 걸 보면서 개발 방식을 체크하지요.

인터뷰 전 모나미의 사업 영역을 보니 단순한 필기구 생산업체가 아니더군요. 교육 사업이라는 업태를 추가한 걸 보고 살짝 놀라긴 했습니다.

우스갯소리 하나 더 할까요? 한가위나 크리스마 스, 추석 같은 때 축하하는 문화를 바꿔보고 싶어요.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 이메일로 축하 인사를 보내면 사람들이 감동할까요? 솔직히 스팸 같은 느낌만 들 겁니다. 직접 만지고 쓰고 만드는 과정을 통해 보여준 진정성에 감동하게 마련입니다. 저는 비용을 1만 원으로 정하고 그 안에서 뭔가를 직접 만들어 선물하는 문화를 제안합니다. 신선한 재료로 직접 만든 피클을 선물하는 건 어떨까요? 직접 다듬고 졸인 뒤 예쁜 병에 넣고 정성스레 쓴 카드와 함께 보내는 겁니다. 저는 수정과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네요. 모나미가 제시하는 패키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펜을 비롯해 직접 내 손으로 만드는 카드를 묶어 패키지로 내놓는 거죠.

모나미 콘셉트 스토어 홍대점의 전경.
고급 브랜드를 선보이는 자회사인 항소를 설립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토종 브랜드가 외국의 사무용품을 수입한 동기 말입니까? 단순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어차피 그들은 국내에 진출합니다. 그럴 바에는 우리 스스로가 그들의 노하우를 직접 배우고 글로벌 기업의 움직임을 체크하는 게 한결 낫겠지요. 현재 항소는 파커와 워터맨 같은 브랜드를 수입해 공급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마케팅 팀과 디자인 팀을 대표 직속 본부로 통합하는 조직 개편을 완성했습니다.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조직은 위로 올라갈수록 관료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마케팅과 디자인은 트렌드에 민감하게 마련인데 단계가 많아지면 책임이 분산됩니다. 빠르게 움직일 수도 없겠지요. 예를 들면 모나미 콘셉트 스토어의 개장을 준비하며 느낀 사실인데 요즘은 이미지의 시대입니다. 제품을 파는 문구점이 아닌 고객의 사진 촬영을 위한 스폿으로 꾸몄죠. 조명을 세팅하고 무대 디자인처럼 가구를 배치합니다. 고객은 스스로 스타일리스트가 되어 촬영을 하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립니다. 모나미 153 조립을 통해 즐거움을 찾기도 하지요. 콘셉트 스토어는 한류 마케팅을 통해 중국과 동남아시아에도 진출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해내는 건 디자이너입니다. 조직을 꾸려나가려면 항상 의심해야 합니다. 합리적인 방식인지, 지금 하는 일이 맞는 일인지, 고객을 위한 디자인인지를 말이지요. 우리는 팀장이나 본부장에게는 시간을 여유롭게 쓰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70% 정도만 일해야 합니다. 모든 흐름을 파악하고 누군가의 결원이 생겼을 때 백업을 하는 것이 중역의 역할입니다.

최근에는 모나미와 쌤소나이트, 문학동네, 아모레퍼시픽과의 리미티드 에디션 협업이 세간에 잘 알려졌는데, 이러한 마케팅 전략은 어떻게 기획합니까?

내가 기획하기도, 마케팅 실무진에서 만들기도 합니다. 제겐 도전을 즐기고 사업에 대한 논의를 나누며 새로운 전략을 함께 나누는 지인이 많습니다.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학창 시절 제 후배고, 테디베어 박물관의 사장은 제 선배지요. 어느 날 뭔가를 물으며 하는 말씀이, “수출에 보내는 테디베어의 플라스틱 눈에 칠하는 지워지지 않는 페인트 어디 없나?”였습니다. 바로 거기서부터 생산적인 시너지가 일어납니다. 본업을 한층 확장하고 새로운 분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입니다. 문구용 펜을 만드는 우리 회사가 인형 눈을 칠하는 페인트를 만드는 계기가 생기는 거지요.

모나미가 원하는 디자이너 인재상을 알려주세요.

논리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을 원합니다. 합리적 사고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열정은 곧 도전 의식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영국에 갔을 때 나무판에 적 힌 글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우리 회사 식당에써서 붙여둔 적이 있습니다. 이런 문장이었습니다. “모든 성취는 도전에서 비롯한다.”

종이를 형상화한 테이블 디자인과 시그니처 펜을 비롯한 모나미의 다양한 제품을 만날 수 있다.

“모나미는 논리적이고 열정적인 디자이너를 원합니다. 합리적 사고의 소유자여야 합니다. 열정은 곧 도전 의식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경영자 입장에서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결국 디자인이란 개인적 영감이 아닙니다. 과학적 통계 기법을 이용해 고객이 이해하고자 하는 콘셉트를 눈으로 표현하는 과정입니다. 제조 회사에서는 품질을 1순위로 놓습니다만 막상 시장조사를 해보면 고객이 생각하는 품질과 우리가 상정하는 품질의 기준은 다릅니다. 고객은 실제 써보지도 않고 품질을 판단하지요. 단단하고 멋지고 예쁘다는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는 테스트를 1만 번 거치면서 품질을 평가하지요. 제품의 품질은 기본으로 하되 “고객의 눈으로 바라본다” 는 원칙입니다. 제가 가장 즐기고 추천하는 책인 <인텔의 경영 기법>을 읽어보세요.

모나미의 사풍은 어떤가요?

직장인으로서 회사에서 일하는 순간은 무척 중요합니다. 하루 24시간 중 회사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니까요.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의 행복, 자신의 일을 인정받고 즐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요? 대표이사로서 저는 우리 직원들의 복지를 신경 써야 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회사 식당을 외주업체에 맡겼는데 콘셉트가 맞지 않아 이제는 우리가 직접 운영합니다. 우리 식당에서 식사 한 번 해보시죠. 가끔 삼겹살도 굽는답니다. 직원들의 건강을 위해 보건소와 공동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담배를 끊도록 이끌고 체지방을 관리하도록 마라톤과 등산 프로그램을 만들고 사내 헬스클럽을 운영합니다. 다소 강압적일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건강하고 즐겁게 원하는 일을 하는 환경을 만드는 건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그 바탕에서 자신을 개발하고 부가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사옥 위에 모나미 153이 위풍당당하게 걸려 있더군요. 사옥은 어떤 과정을 거쳐 디자인했나요?

성수동 시절을 지나 1992년 청담동에 입주한 첫번째 현대적인 사옥은 전형적인 네모난 건축물이었습니다. 2006년 판교 시대를 연 이번 사옥은 겉모습보다 내부의 동선과 업무 효율성을 중시했습니다. 예를 들면 건물 2층에 베란다가 있어요. 예술품을 놓고 나무를 심어 푸르게 가꾼 정원인데 식당 옆에 있지요. 식사 후 건물 바깥으로 나가지 않아도 편하게 쉴 수 있는 동선으로 설계했습니다. 그곳에서 가끔 회식을 진행하기도 합니다. 지하에는 사원들의 건강을 위해 헬스클럽을 만들어뒀습니다.

1968년 KS 마크를 획득한 기념 광고.
예전에 몇몇 임원과 실무진을 대동하고 IDEO를 방문해 ‘디자인 싱킹’을 체험하고 모나미에 적용했다고 들었습니다. 이후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모나미가 고급 볼펜을 만들기 위해 시장조사를 할 때였습니다. 우리 생각대로 고급 볼펜을 해석 해서 만들었는데, 그들은 한층 섬세하게 타깃을 정하더군요. 우리의 의뢰를 듣고는 단박에 “고급이란 게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정밀하고 단순하며 내구성이 좋은 펜이 아닐까 싶었지요. 그들은 디자인 과정을 관찰하고 콘셉트를 정밀하게 잡으며 목업 제품을 만들어 타깃 소비자의 피드백을 조사했습니다. 누구나 하는 방식이지만 매 과정을 철저하게 조사하더군요. 이를테면 시장 조사에서는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관찰을 합디다. 마니아, 중간층, 무관심한 고객을 나누어 확인하더군요. IDEO가 컨설팅한 병원은 프로젝트 이후 미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병원으로 거듭 났지요. 이 모든 것은 고객, 즉 환자가 되어보는 관찰에서 비롯합니다. 그 결과 초진 담당 의사는 모두 3명으로 늘어났고, 병실 청소는 입원 환자가 진료를 받으려고 나간 시간에 맞춰 이뤄집니다. 응급실은 말 그대로 환자를 위한 철저한 서비스 리셉션으로 변신했지요. IDEO 최고경영자인 팀 브라운에게 제품을 의뢰했을 때 일주일 동안 마케팅 기법과 디자인 관련 과정을 통해 많은 걸 깨달았죠. 섬세한 인터뷰 노하우, 사람들이 생각하는 디자인의 정의,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 등 소비자를 90% 이해하고 요구를 완벽하게 뽑아내는 단계별 과정을 수립하고 검증하면 큰 실패는 없습니다.

개인적인 질문 하나. 애견, 말 등 동물을 무척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애견, 승마 등의 취미가 대표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모나미는 온 국민이 쓰는 펜을 만드는 회사입니다. 저는 직원들에게 언제나 마음을 열고 실생활에 뛰어들라고 얘기합니다. 건설 현장에 가봐야 마카로 대리석에 표식을 그리는 걸 알 수 있겠죠. 수산 시장에 갔더니 스티로폼 박스의 젖은 표면에 크레파스를 불로 녹여가며 글씨를 쓰더라고요.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모나미가 웨트 서피스 마카를 개발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경영학 서적을 볼 때 곧바로 실제 생활에 접목합니다. 최신 유행보다는 기본적인 본질을 중요시하죠. 6 시그마 기법이라고 아십니까? 문제를 정확하게 디파잉하고 원인을 분석한 뒤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 그 과정은 개나 말을 키우거나 가드닝을 할 때 똑같이 적용됩니다. 아까 제 서재에 가드닝 책들이 있는 걸 의아해하셨지요? 정원을 가꾸면서 느낀 점이 많습니다. 모나미는 펜이 주력 제품이지만 정원에서 쓰는 펜은 완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정원 일을 도와주는 다른 도구를 개발할 수도 있지요. 낚시나 등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게 바로 모토입니다. 본질을 보자는 얘기지요.

마지막으로 경영인으로서 디자이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예술가와 디자이너는 다릅니다. 자신만의 인생관과 철학을 보여주는 예술가와 달리 디자이너는 세상(소비자)과 타협해야 합니다. 고유의 성능에 독특한 색깔을 입혀 사용자를 ‘혹’하게 만들어야 하지요. 저는 항상 디자이너에게 “이 제품의 부품 가격은 얼마일 것 같아?”라고 물어봅니다. 디자이너는 시장을 분석하고 한계점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한 뒤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모든 디자이너가 그런 마인드를 갖도록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459호(2016.09)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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