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의 전시 시노그래퍼 위베르 르 갈

현재 프랑스에서 디자이너이자 조각가로 활동하며 일상적 사물에 추상적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위베르 르 갈을 직접 만나보았다.

에르메스의 전시 시노그래퍼 위베르 르 갈
지팡이를 선보인 방에서 포즈를 취한 위베르 르 갈. 아티스트 위고 가토니(Ugo Gattoni)가 디자인한 벽지의 지팡이와 로맹 로랑(Romain Laurent)이 연출한 단편 영화, 에밀 에르메스 컬렉션에서 가져온 지팡이가 조화를 이룬다. 위베르 르 갈은 이 방에 들어서면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그림 속에 들어온 것 같다고 했다.

“도시를 걷는 경험은 우리 몸 전체의 반응을 촉발한다. 매 순간 몸의 센스와 감각이 끊임없이 작동한다. 도시는 이리하여 인간의 몸 밖이 아니라 몸 안에 존재하는 셈이다.” 프랑스의 사회 철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에 나오는 대목이다. 2016년 11월 19일부터 12월 11일까지 디뮤지엄에서 열린 에르메스의 <Wanderland 파리지앵의 산책>은 바로 이러한 산책을 경험할 수 있는 전시다. 에르메스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컬렉션, 오브제와 다양한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어우러진 전시 공간을 산책하듯 천천히 거닐다 보면 삶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흘러가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다. 이국적인 상점들이 줄지어 있는 아케이드부터 산책 중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카페, 거리 곳곳의 광고판과 가로등, 작은 집들의 창문 너머 활짝 열린 창까지. 거리를 걷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자유로운 예술이다. 이번 전시는 에르메스의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인 피에르알렉시 뒤마(Pierre-Alexis Dumas)가 기획한 가운데 브뤼노 고디숑(Bruno Gaudichon)이 큐레이터를, 위베르 르 갈(Hubert Le Gall)이 무대 디자이너와 시노그래퍼(scenographer)를 맡았다. 특히 위베르 르 갈은 작품과 오브제의 가치가 효과적으로 보이도록 전시 공간을 연출한 것은 물론, 전체적인 스토리 라인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데에서 아티스트적인 면모도 발휘했다. 19세기 말 다크우드와 상아로 만든 지팡이부터 2015년 골드 브라운 컬러를 조합한 패브릭까지 소소한 물건에 장인의 가치를 더한 에르메스처럼, 진부한 것을 놀라운 것으로 변하게 하는 산책의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디자인한 것이다. 현재 프랑스에서 디자이너이자 조각가로 활동하며 일상적 사물에 추상적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위베르 르 갈을 직접 만나보았다. 인터뷰·글: 김민정 기자, 어시스턴트: 최지민 인턴 기자, 인물 사진: 김정한(예 스튜디오)

엠마누엘 피에르(Emmanuel Pierre)의 ‘상속 콘서트’와 에르메스의 형형색색 가방으로 구성되어 천천히 돌아가는 모리스 칼럼(회전하는 광고판). 가로등 속 전구가 있어야 할 위치에는 시간을 상징하는 시계를 배치했다.
에르메스와 작업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이번 전시에서 큐레이터를 맡은 브뤼노 고디숑이 나의 작업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고디숑은 프랑스 루베 지역에 있는 박물관 라 피신(La Piscine- Mus e d’Art et d’Industrie)의 큐레이터로, 내가 만든 고래 모양의 소파(Fauteuil Baleine)를 구입했었다. 고디숑이 에르메스의 아티스틱 디렉터인 피에르알렉시 뒤마에게 내 작업에 대해 얘기했고, 마침 에르메스 내부에서 선정한 무대 디자이너 후보 리스트에 내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빠르고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시노그래퍼가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번 전시에서 어떤 역할을 했나?

공연에서 무대 디자인을 연출하는 것과 같다. 보통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는 그림이나 조각품의 가치가 최대한 잘 돋보이도록 배경과 환경을 디자인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뒤마와 고디숑이 나에게 무대 디자이너로서의 역량뿐 아니라 아티스트적인 면모도 발휘하길 바랐기 때문에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마치 거울놀이하듯 각자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

서울에서만 선보인 특별 전시. 입구에서 나눠준 지팡이에 달린 편광 렌즈로 전시장 곳곳에 설치한 에니메이션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아티스트적인 면모를 가장 많이 반영한 공간은 어디인가?

여덟 번째 방, 광장으로 중앙에 회전하는 광고판 ‘모리스 칼럼’이 설치돼 있다. 개인적으로 과거의 이미지나 오브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재창조하는 작업을 좋아하는데 이곳의 환상적인 분위기가 그러한 면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물론 이 외의 모든 방에도 나의 스타일이 조금씩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커플의 드레스 룸으로 꾸민 공간에는 혀를 낼름거리는 말 머리가 벽 장식으로 걸려 있는데 이는 내가 굉장히 진지한 가운데 유머와 위트를 가미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아케이드 디스플레이에서 도자기를 조심스레 들고 있는 코끼리나 목줄을 한 물고기에서도 이런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거꾸로 놓인 물건과 같은 전복된 요소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티스트로서의 나와 에르메스라는 브랜드 중 어느 하나만 부각되지 않도록 균형을 맞추는 일이었다.

플라뇌르(fl nerie, 산책)의 두 가지 요소, ‘꿈꾸는 것’과 ‘자유로운 영혼’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번 전시가 시간과 공간의 여행이 되길 바랐다. 전시 관람이 파리 곳곳을 거니는 산책이 되는 동시에 관람객 스스로 산책자가 되어서 전시의 일부처럼 느껴지도록 말이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관객이 산책을 하며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사색에 잠기고,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단순한 전시가 아닌 하나의 공연처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환상적인 시각적 장치와 디지털 기술을 혼합해 수동적으로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랙티브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이국적인 상점들이 줄지어 있는 파리의 아케이드. 19세기에 제작한 에밀 에르메스 컬렉션 작품부터 2015년 제작한 컨템퍼러리 컬렉션까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번 서울에서의 전시는 런던, 파리, 두바이에 이어 네 번째로 열리는 것이다. 서울 전시만의 특징이 있다면?

런던이나 파리는 산책하기 좋은 도시로, ‘산책’이라는 개념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우리의 메시지를 쉽게 전달할 수 있었고 관객 역시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두바이에서는 그 나라 문화의 특성상 그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이 같은 경험을 토대로 서울 전시에는 몇 가지 요소를 더했다. 입구에서 관람객에게 지팡이를 나누어주고 여기에 달린 편광 렌즈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영상을 전시장 곳곳에 배치한 것이다. 비둘기가 주인공인 장바티스트 디 마르코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관람객의 여정에 비둘기가 따라다니는 것 같은 새로운 재미를 더했다.

전시는 공간의 특성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디뮤지엄의 특징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전시를 진행한 공간과 달리 디뮤지엄은 1, 2층으로 분리돼 있어 새로운 리듬을 찾아야 했다. 우리는 두 층을 잇는 계단이 몽마르트르 언덕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계단 밑에는 물랑루즈 일러스트레이션을, 계단 위에는 카페를 배치해 파리의 전경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나도록 연출했다. 때로는 장소의 한정성과 제약이 전시에 특별함을 더해주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되기도 한다.

현재 프랑스에서 가구와 제품 디자이너로도 활동하고 있다. 주로 어떤 스타일의 디자인을 하는가?

다양한 분야와 세계를 교차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그림과 건축, 동물, 어린 시절 등 좋아하는 것들을 접목하다 보면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한다. 예를 들어 최근 작품 중에는 토끼 귀가 달린 소파가 있는데, 토끼는 부드럽고 귀엽고 포근하지 않나. 기르다 보면 애착도 생기고. 이런 관계 형성이 가구와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가구 역시 토끼처럼 정신적 위안이나 휴식을 줄 수 있다. 가구와 인간 사이에 형성되는 애착 관계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굳이 내 스타일을 정의하자면 정서적 디자인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비 온 뒤의 모습을 재현한 방. 빗물이 만든 웅덩이는 미디어 아티스트 니콜라스 투르트르(Nicolas Tourtr)의 디지털 설치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는 자신의 디자인 스타일을 어떻게 반영했나?

아케이드 방에 전시한 4개의 디스플레이에서 내가 말한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디자인’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말 모양의 지팡이와 기수 모양의 지팡이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연출한 것이 있는데, 말이 기수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건넨다. “그만 신사인 척하고 이제 좀 달리자!”(웃음) 궁극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것은 오브제와 작품이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는 전시다. 관람객으로 하여금 그 의미가 무엇인지 느끼고 파악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알다시피 이번 전시의 모든 오브제는 에르메스의 것으로, 에밀 에르메스 박물관과 에르메스 아카이브 컬렉션, 현재의 컬렉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오브제의 가치가 잘 드러나게 조성한 전체적인 분위기와 데커레이션에서 내 스타일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11개의 방 모두 콘셉트가 각각 다르다. 그중 우리가 방금 인터뷰 사진을 촬영한 지팡이가 있는 방의 경우 어떤 의미가 있나? 관람객이 느끼는 감상은 모두 다르겠지만 디자이너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지팡이 방은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그림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 방은 관객에게 ‘상상의 세계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데, 옷장을 통과하도록 돼 있는 동선이 현실에서 초현실 세계로의 이동처럼 느껴지도록 디자인했다. 전시의 첫 부분에 위치하는 만큼 관객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의도한 것으로,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한다.

전시가 열리는 두 층을 잇는 계단. 디뮤지엄의 공간적 특성을 이용해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을 표현했다.
스트리트 아트로 꾸민 ‘파리의 거리’에는 한국의 아티스트 제이플로우가 참여했다. 그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원래 이 방은 전시가 열리는 나라의 아티스트와 협업해 꾸민다. 우리는 에르메스 한국 지사에서 선정한 리스트를 토대로 작품 스타일뿐 아니라 작가의 작품 세계가 전시 주제와 공통점이 있는지를 고려해 최종적으로 제이플로우를 선정했다. 제이플로우는 직감을 이용해 영감을 표현하는 진정한 스트리트 아티스트다. 이는 공부한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전시에 대한 설명과 함께 한국인의 시각으로 본 파리를 작품에 투영해달라고 요청했을 뿐 그 외에는 작업에 관여하지 않았다. 제이플로우가 전후 상황을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작품과 연결 지을 수 있도록 앞뒤로 어떤 방이 꾸며지는지 설명했을 뿐이다.

관람객들이 플라뇌르를 통해 무엇을 느끼길 바라나?

전시에 사용한 모든 오브제에는 나름의 생각과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전시 주제인 ‘산책’과 관련이 있다. 산책한다는 것은 곧 관찰을 의미한다. 나의 기준이나 고집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견에 놀라기도 하고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 다른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이 바로 산책의 태도로, 전시장을 찾는 이들도 그러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혹시 서울을 산책해볼 기회가 있었나? 서울에서의 산책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하다.

지난해 장소 섭외차 방문했을 때 리움미술관에 가봤다. 건축물의 조화는 물론 소장품과 전시 방식 모두가 경이로웠다. 한마디로 시노그래퍼의 역할이 빛나는 곳이었다. 이 밖에도 서울에는 디자이너로서 영감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정말 많다. 도자기, 나무와 같이 한국 작가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재료와 일상의 문화 모두가 그랬다. (월간 <디자인> 11월호를 넘겨 보며) 이 잡지 또한 나는 읽을 수 없지만 정말 아름답다. 내가 가져가도 되는 건가?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463호(2017.01)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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